아메리카-5. “아르헨티나” 바다를 본 시선의 선택

평야의 나라!

by 김장렬
아르헨티나 지리.png 아르헨티나 지리 (출처 : 금성출판사 사회과부도)

아르헨티나는 넓다. 넓다는 말로는 이 나라를 다 담지 못한다. 수평선처럼 펼쳐진 평야가 나라의 중심을 이루고, 서쪽에는 안데스 산맥이 길게 누워 있으며, 동쪽으로는 남대서양이 조용히 열려 있다. 이 나라는 요새를 갖지 않았다. 대신 공간을 가졌다. 공간은 사람들에게 안정감을 주었고, 때로는 방심을 낳았다. 아르헨티나의 전쟁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 이유는 언제나 지리에 있었다. 그리고 평화를 택했을 때도, 역시 지리가 그 선택을 이끌었다.


1. 팜파스 평야, 풍요가 만든 안정과 내부의 충돌


팜파스 평야는 이 나라의 심장이다. 완만하고 끝없는 초원은 농업과 목축을 키웠고, 사람과 물자는 막힘없이 이동했다. 곡물과 쇠고기는 세계로 나갔고, 국가는 빠르게 부유해졌다. 이 평야는 싸움을 부르지 않았다. 오히려 싸울 필요를 줄였다. 풍요는 안정으로 이어졌고, 안정은 평화의 조건이 되었다. 그러나 이 평야에는 방어선이 없었다. 산맥도, 깊은 강도 없었다. 그래서 갈등이 생기면 그것은 국경에서 멈추지 않고, 평야 위를 그대로 가로질렀다.

팜파스.png 팜파스 평야 (출처 : https://www.researchgate.net)


1810년~1818년 리오데라플라타 연합주(현재의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볼리비아 일부)가 스페인 제국의 통치에 맞서 싸운 전쟁독립 이후에 아르헨티나는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균형을 먼저 마주해야 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집중된 부와 권력은 내륙의 반발을 불러왔고, 1814년에서 1880년 사이에 독립 후 국가 정체성과 중앙집권화 및 연방주의 갈등으로 벌어진 일련의 아르헨티나 내전은 이동이 쉬운 평야 위에서 정치적 갈등은 곧 무력 충돌로 번졌다. 이 시기의 내전은 전면전이라기보다, 끊임없는 충돌의 연속이었다. 팜파스는 사람을 갈라놓지 않았고, 그 때문에 갈등은 쉽게 퍼졌다. 이 내전의 시간은 아르헨티나가 전쟁을 통해 무엇을 얻는지보다, 무엇을 잃는지를 배우는 과정이었다. 평야는 싸움을 막지 못했지만, 싸움이 오래 지속되지도 못하게 했다. 결국 이 나라는 외부로 향하기 전에 내부의 균형을 배워야 했다.

아르헨티나 내전.jpg 1840년 아르헨티나 내전, 케브라초 에라도 전투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Quebracho_Herrado)

2. 안데스 산맥, 벽이 아닌 길이 되었던 순간

서쪽의 안데스 산맥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산맥은 칠레와 아르헨티나를 갈라놓는 자연의 경계였다. 높은 봉우리와 험한 길은 대규모 전면전을 어렵게 만들었고, 두 나라는 산맥을 사이에 두고 긴장을 관리하는 방법을 익혔다. 그러나 독립의 순간, 안데스는 벽이 아니라 길이 되었다. 스페인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아르헨티나의 지도자들은 방어를 택하지 않았다. 산마르틴은 안데스를 넘어 스페인군의 후방을 치는 길을 선택했다. 이 선택은 위험했고, 무모해 보였다. 그러나 바로 그 지리가 전쟁의 방향을 바꾸었다. 안데스를 넘은 군대는 식민 질서를 흔들었고, 전쟁은 단지 한 나라의 독립을 넘어 남미 전체의 해방으로 이어졌다. 이 전쟁은 지리가 전쟁을 막는 장벽이 아니라, 해방의 통로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안데스 산맥.png 안데스 산맥 (출처 : ttps://www.jsg.utexas.edu/news/)

안데스는 그 이후 다시 방패로 돌아왔다. 이 산맥은 아르헨티나를 태평양으로부터 분리했고, 해양 전략의 선택지를 제한했다. 태평양은 멀어졌고, 국가는 자연스럽게 동쪽을 바라보게 되었다. 남대서양은 넓고 조용했으며, 위협보다는 가능성으로 인식되었다. 이 선택은 오랫동안 옳아 보였다. 해양 패권을 둘러싼 경쟁은 이 나라를 비껴갔고, 전쟁은 먼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3. 라플라타 수계의 끝에 선 나라


파라나와 우루과이 강이 만나 형성한 라플라타 수계의 하류에 아르헨티나는 서 있다. 이 강들은 내륙을 묶고, 생산물을 모아 바다로 내보내는 경제의 동맥이었다. 브라질과 파라과이에서 시작된 흐름은 이곳에서 대서양을 만났다. 이 지리는 아르헨티나에게 중심이라는 감각을 주었다. 물류와 무역의 출구에 서 있다는 사실은, 스스로를 남미의 중심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이 인식은 경제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전략적 판단에는 때로 오만을 불러왔다. 흐름의 끝에 있다는 사실이, 바다의 주인이라는 착각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라프라타 수계.png 라플라타 수계 (출처 : 금성출판사 사회과부도)

4. 남대서양, 전장이 아니었던 바다의 함정


남대서양은 전장이 아니었다. 적어도 그렇게 여겨졌다. 이 바다는 주요 해상 교통로에서 비켜 있었고, 긴박한 충돌의 기억이 적었다. 바로 이 인식이 1982년의 전쟁이라는 선택으로 이어졌다.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이 영국령 포클랜드 제도를 침공하며 발발한 전쟁으로, 국내 정치적 혼란을 외부로 돌리려는 목적이 있었으나, 마가렛 대처 정부의 강력한 반격으로 영국이 승리하고 포클랜드의 주권을 유지했으며, 아르헨티나 독재 정권은 몰락하는 계기가 된 전쟁이다.

포클랜드 전쟁2.png 포클랜드 전쟁 (출처 : https://www.kmib.co.kr/article/view.asp?arcid=0005967599)

포클랜드를 둘러싼 충돌은 지리적 거리와 감정적 영유권 인식이 결합된 결과였다. 군사적 준비와 보급 능력은 이 바다의 거리를 감당하지 못했다. 전쟁은 짧았고, 결과는 명확했다. 이 전쟁은 단지 패배가 아니라, 지리를 오해한 대가였다. 바다는 의지로 건널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고, 거리는 감정으로 줄어들지 않았다.

포클랜드 이후, 아르헨티나는 전쟁을 정책의 수단에서 내려놓았다. 군부는 물러났고, 민간 통치가 자리 잡았다. 전쟁은 국가를 단단하게 만들지 않았고, 오히려 약하게 만들었다는 인식이 사회에 남았다. 이 나라는 확장보다 관리, 충돌보다 조율을 택했다. 브라질과의 관계는 경쟁에서 협력으로 옮겨갔고, 남미에서 군사적 자제를 실천하는 국가로 자리매김했다. 지리는 변하지 않았지만, 그 해석은 달라졌다.


5. 넓은 영토가 만든 한계의 영공


하늘은 이 나라가 가장 늦게 마주한 공간이었다. 광대한 국토는 공중 통제의 어려움을 동반했고, 장거리 작전은 기술과 자원의 한계를 드러냈다. 포클랜드에서 확인된 영공 통제의 한계는, 군사력의 방향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전면전을 상정한 확장은 더 이상 선택지가 아니었다. 대신 분쟁을 억제하고, 관리하는 방향이 자리 잡았다. 하늘은 여전히 넓었지만, 닿을 수 있는 범위는 냉정하게 계산되었다.

포클랜드 전쟁에서 격추 되은 아르헨티나 전투기.png 포클랜드 전쟁에서 격추되는 아르헨티나 전투기 (출처 : https://brunch.co.kr/@zeit/58)

6. 전쟁 이후의 선택, 싸우지 않는 국가로의 전환


오늘의 아르헨티나는 싸움을 준비하는 나라라기보다, 싸울 필요를 만들지 않으려는 나라에 가깝다. 팜파스는 여전히 풍요롭고, 안데스는 여전히 국경을 지킨다. 남대서양은 여전히 멀다. 이 지리는 국가에게 다시 묻는다.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확장할 것인가, 안정할 것인가. 이 나라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전쟁은 국가를 증명하지 못했고, 평화는 관리와 절제 속에서 유지되었다.

싸우지 않는 나라.png 부에노스아이레스 항구 (출처 : https://www.cunard.com/en-us/ports/buenos-aires-argentina?utm)


아르헨티나의 역사는 전쟁이 없었던 역사가 아니다. 다만, 전쟁이 무엇을 남기는지 배운 역사다. 독립의 순간에는 지리를 넘어섰고, 내전의 시간에는 지리의 개방성을 배웠으며, 포클랜드에서는 지리를 오해한 대가를 치렀다. 그리고 그 모든 경험 이후, 이 나라는 전쟁을 선택하지 않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지리는 싸우지 않는다. 지리는 다만 조건을 제공할 뿐이다. 싸울지 말지는 사람의 선택이다. 아르헨티나의 평화는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지리를 정확히 이해한 뒤에 내려진, 오래된 선택의 결과다.

아르헨티나 지리.png 아르헨티나 지리 (출처 : 금성출판사 사회과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