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카-7. "페루" 같은 산맥 다른 전쟁과 평화

by 김장렬
페루지도.png 페루 지리 (출처 : 금성출판사 사회과부도)

남미 서쪽에는 안데스 산맥이 있다. 칠레와 페루는 그 산맥을 공유한다. 그러나 전쟁의 모습은 다르다. 칠레에서 산은 바깥을 막았다. 페루에서 산은 안쪽을 쪼갰다. 전쟁은 밖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안에서 커지기도 한다. 페루는 충돌이 반복된 나라였다. 외부 전쟁도 있었고, 내부 폭력도 길었다. 이를 정치의 실패로만 설명하면 남는 것이 없다. 먼저 지도를 봐야 한다. 이 글은 한 가지에 집중한다. 페루의 전쟁은 많은 경우 지리가 만든 충돌의 형태였다. 그리고 평화는 그 지리를 관리하는 과정에서 가까워졌다.


1. 차단이 아니라 분절을 만든 안데스 산맥


페루의 안데스는 국경의 뒤에 있지 않다. 국토 한가운데를 관통한다. 해안과 고원, 아마존을 동시에 갈라놓는다. 이 분절은 단순한 이동 불편이 아니다. 권력의 방식이 된다. 국가는 모든 지역을 같은 속도로 통치할 수 없다. 길이 끊긴 곳에서는 행정도 늦어진다. 보급과 치안, 신뢰도 함께 늦어진다. 이 지형은 충돌의 조건을 만든다. 지역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살고, 다른 요구를 낳는다. 중앙은 하나의 기준으로 묶으려 한다. 그 간극이 커질수록 정치적 마찰은 커진다. 안데스는 페루에서 전쟁을 막는 벽이 아니었다. 충돌이 분절된 채로 지속되는 구조를 만들었다.

페루 안데스 산맥.png 페루 안데스 산맥 (출처 : https://www.reddit.com)


2. 권력과 전쟁이 압축되는 공간, 해안 사막과 수도 리마(Lima)

페루의 해안은 넓지 않다. 대체로 사막이다. 그 좁은 띠 위에 항만과 인구, 행정과 군사력이 모였다. 수도 리마도 이 해안 사막 위에 자리 잡았다. 이 지형은 바다를 통해 바깥과 빠르게 연결된다. 무역과 세금, 결정과 명령이 한 곳으로 집중되었다. 그러나 집중은 효율과 함께 취약성을 남긴다. 해안은 빠르고, 산은 느리다. 국가의 리듬이 둘로 갈라진다. 이 구조는 전쟁의 양상에서도 드러났다.

페루 해안과 사막.png 페루 해안과 사막 (출처 : http://www.startour.pe.kr/local/s_america/Guide-Peru.htm)

1879~1884년 태평양 전쟁에서 전쟁의 핵심은 내륙 점령이 아니었다. 해안과 항만, 그리고 해상 통제가 전개의 중심이었다. 사막과 바다는 전쟁을 가능하게 했지만, 전면전으로 무한히 확장시키지는 않았다. 이 전쟁의 의의는 분명하다. 첫째, 페루의 해안 지형은 전쟁을 집중시키는 공간이었다. 권력과 자원이 모인 곳에서 충돌도 모였다. 둘째, 그 집중은 전쟁 이후에도 오래 남았다. 영토의 변화보다 국경과 자원, 국가 정체성에 대한 기억이 더 길게 이어졌다. 해안은 페루에서 완충지대가 아니었다. 전쟁과 정치가 압축되는 무대였다. 지리는 전쟁을 부르지 않았지만, 전쟁이 벌어지는 방식과 범위를 규정했다.

태평양 전쟁 중 페루와 칠레와의 해전.jpg 태평양 전쟁 중 페루와 칠레 간 해전 (출처 : https://ko.wikipedia.org/wiki)

3. 무시할 수 없고, 통제하기도 어려운 고원

페루의 고원은 높다. 사람이 살 수는 있지만, 쉽게 움직일 수는 없다. 중앙정부의 손이 닿기 어렵고, 그러나 완전히 비워둘 수도 없다. 이런 공간은 정치적 균열이 생길 때 오래 버틴다. 도시는 빠르게 바뀌지만, 고원은 천천히 반응한다. 천천히 반응하는 곳은 쉽게 꺼지지 않는다. 페루의 내부 폭력과 반정부 운동은 이 지형과 자주 겹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전투의 묘사가 아니다. 지속 가능성이다. 고원은 은신처라기보다 충돌이 사라지지 않고 남을 수 있는 지속 공간이다.

페루 고원.png 페루의 고원 (출처 : https://kr.freepik.com)


4. 아마존 경계, 끝내기 어려운 전쟁, 정리하기 어려운 평화

페루의 동쪽은 아마존으로 열려 있다. 밀림과 강은 길이 많아 보이지만, 국가가 한꺼번에 다루기에는 어려운 공간이다. 이 지형은 통합을 어렵게 한다. 행정도 느리고, 치안도 흩어진다. 국경 분쟁 역시 길어지기 쉽다. 접근이 어렵고, 경계가 분명하지 않다. 아마존은 전쟁을 크게 만들지는 않는다. 그러나 전쟁을 끝내기 어렵게 만든다. 끝내지 못한 충돌은 다시 돌아온다. 그래서 페루의 평화는 선언보다 관리에 가까웠다.

페루의 아마존 경계 이키토스.png 페루의 아마존 경계 이키토스 (출처 : https://weekly.chosun.com/news)

5. 관망자가 되기 어려운 외교 지리

칠레는 대륙의 끝에 가깝다. 페루는 서쪽이지만 중심부에 더 가깝다. 북과 남, 내륙과 아마존이 모두 닿아 있다. 이 위치는 마찰을 피하기 어렵게 만든다. 자원이 있는 국경은 긴장을 낳는다. 출구가 많은 것은 장점이지만, 접점이 많은 것은 부담이다. 페루의 외교와 안보는 종종 ‘선택’보다 ‘대응’에 가까웠다. 지리는 선택지를 넓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위험도 함께 넓힌다.

페루 전통 군사 퍼레이드.jpg 페루 전통 군사 퍼레이드 (출처 : https://mobile.newsis.com/photo)

6. 지리를 관리하는 것이 평화였다

안데스는 사라지지 않는다. 해안의 압축도 쉽게 풀리지 않는다. 아마존의 경계 역시 그대로 남아 있다. 그래서 페루의 과제도 반복된다. 이 나라에서 전쟁은 종종 지리가 만들어낸 충돌의 형태로 나타났다. 산맥은 국토를 나누었고, 해안은 권력을 한 곳에 모았으며, 고원과 밀림은 충돌을 오래 남게 했다. 그렇다면 평화는 무엇이었는가. 페루에서 평화는 감정이나 선언이 아니었다.

전쟁을 끝내는 승리도 아니었다. 지리를 관리하는 능력이었다. 도로와 행정, 치안과 통합. 중앙의 속도를 지역의 현실에 맞추는 일. 군사력만큼이나 통치와 신뢰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칠레의 산맥이 전쟁을 멈추게 했다면, 페루의 산맥은 전쟁을 안으로 들여보냈다. 산맥은 같았지만, 자리는 달랐다. 그 차이가 역사를 갈랐다. 전쟁을 부르는 지리가 있고, 전쟁을 막는 지리가 있다. 그리고 어떤 지리는 전쟁을 끝내기 어렵게 만든다. 페루는 그 지리 위에서 전쟁을 겪었고, 그 지리를 관리하는 방식으로 조심스럽게 평화를 찾아왔다.

페루지도.png 페루의 지리 (출처 : 금성출판사 사회과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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