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goes around... Ⅵ

by 박규동

이브와 크리스마스는 승훈에게 지옥 같은 날이었다. 그는 3일이 지나지 않아 경찰들이 자기 집으로 들이닥칠 거라 예상했다. 그러나 3일, 4일이 지나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자 무언가 잘못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정확히는, 모든 인과관계가 처음부터 평범한 살인 사건과는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는 다시 호텔에 돌아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범죄자는 현장에 돌아온다'는 유명한 말은, 그를 그곳으로 향할 수 없게 했다. 핸드폰을 버리고 카드와 인터넷도 사용하지 않는 상황. 승훈에게는 정보가 절실했다.


어쩌면 미영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것이다. 승훈의 뇌는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미영 씨랑 나랑은 꽤 친한 사이였잖아?'


호텔의 과장은 본인이 해야 할 일을 승훈과 미영에게 떠넘기곤 했다. 결국 승훈과 미영이 과장의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외우는 일은 당연했다. PC방에 숨은 승훈은 과장의 아이디로 미영의 이력서를 뒤졌다.


그는 미영의 주소를 종이에 옮겨 적었다. PC방을 떠나기 전, 집을 들를까도 생각했다. 11시에 시작되는, 그가 좋아하는 코미디 프로그램을 놓치더라도 그날은 미영을 보러 가야 했다. 자신이 멀리 도망친다 하더라도 알고 싶은 것이 하나 있었다. 나은은 어디에 있는지, 그녀는 왜 자신에게서 도망쳤는지.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 길은 잔인하리만치 추웠다. 도시의 바람이 그의 얼굴을 할퀴는 듯했다. 승훈은 자신이 겨울로부터 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멀리서 달려오는 초록색 버스에 타기 위해 야생 동물처럼 달렸다.


바람을 거슬러 버스의 앞문에 손을 올린 그는 버스에 올라탔다. 현금통에 천 원짜리 두 장을 넣자 기사가 소리쳤다.


"현금 안 받아요."

"네?"

"버스 바깥에 못 읽었어요? 현금 안 받아요."

"근데 여기 현금받는 통이 있는데."

"이제 없앨 거예요."

"저는 그럼 어떡해요?"


이미 출발한 버스에 승훈은 기사 옆에 어색하게 서 있었다. 승훈의 질문에 기사는 침묵을 지켰다.


승훈은 버스의 맨 뒷자리에 앉았다. 모자를 눌러쓴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평소에는 누구도 옆에 앉을 일이 없는 맨 앞자리에 앉는 것을 좋아했다. 그의 옆에 사람이 앉았을 때 혹시나 자신의 옷에서 냄새가 나지는 않을지 불안을 느꼈던 그였다. 창밖의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버스 유리창에 붉은빛이 쏟아졌다.


승훈은 거리를 걷는 아름다운 남녀를 바라보았다. 나은이 보고 싶었다.

'어쩌면 나은이는 나를 위해 호텔에서 모른 척했던 것은 아닐까? 그들로부터 나를 지켜주기 위해?'


나은을 괴롭히던 인간들은 모두 사라졌다. 승훈이 그렇게 만들었다. 혹시나 살아남은 사람들은 없는지, 나은은 어디로 증발해 버린 것인지, 자신을 좇는 사람들은 누구고, 어디에 있는지. 수많은 질문과 함께 승훈은 버스에서 내렸다.


도심의 빛에서 벗어나 골목으로 들어간 그는 미영의 주소를 계속해서 읊조렸다. 가로등 아래에 적힌 집 주소를 보며 걷던 그는 과거 배달 아르바이트 경험 덕분에 수월하게 길을 찾을 수 있었다. 마침내 미영의 집 앞에 섰다.


주차장에서 담배를 피우던 주민이 집으로 들어가는 틈에 그는 미영의 원룸이 있는 건물로 들어섰다. 승훈은 미영의 집 문을 두드렸다.

'제발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겁내지 말았으면.'


미영의 문은 답하지 않았다. 승훈은 알고 있었다. 오늘은 미영이 일하는 날이 아니다. 이 시간에 그녀는 어디에 간 걸까? 그는 안된다는 것을 알지만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열었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미영의 집은 어둡고 조용했다. 신발장에는 신발이 없었다. 컴퓨터가 놓인 테이블과 의자, 모든 것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마치 그녀가 외출이 아닌, 증발을 한 것처럼.


승훈은 미영이 없는 집에서 얻을 것이 없었다. 나은이를 찾는 일이 아니었다면 당장이라도 멀리 도망쳤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상황이 계획대로 되지 않음에 서러움을 느꼈다. 그는 상상했었다. 미영의 집 문을 두드리면 그녀가 자신을 반갑게 맞아주고, 그날 이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은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든 것을 말해줄 거라고.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나은이를 어디서 찾아야 하지?'


그는 미영의 빈집에 앉아 눈물을 흘렸다. 나은을 포기하고 싶다는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삶의 의미를 일깨워준 운명의 짝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일단 숨자. 숨어서 뉴스도 보고, 가끔은 PC방에 가서 나은의 SNS도 확인해 보자. 내가 지금 잡힌다면 나은이는 평생 못 보게 될 거야.'


승훈은 아무런 소득 없이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도착한 그는 허망함에 휩싸였다. 내일은 떠나야 했다.


그는 세상과 상관없는 사람들을 죽이곤 했다. 사라져도 세상이 굴러가는 데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인간들. 그러나 이번에는 겁이 났다. 세상이 좋아하는, 신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을 죽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의 분노를 샀을 거란 공포까지. 그는 이불속에 숨었다.

'나도 그런 종류의 사람이면 어떡하지? 사라져도 상관없는 종류의 사람. 어쩌면 나은이도 그런 사람이면 어떡하지? 나는 사라져도, 나은이와 함께 사라질 거야.'


그는 다음 날 오후까지 늦잠을 잤다. 많은 사람을 죽이고 누군가에게 쫓긴다는 불안함에도, 나은이가 보고 싶고 그녀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음에도 늦잠을 잤다. 우선 라면을 끓였다.


바닥에 놓인 작은 테이블에서 라면을 먹으며 TV를 보았다. 리모컨을 손에 쥔 그는 채널을 빠르게 건너뛰어 좋아하는 코미디 프로그램을 틀었다.

'맞아. 짐 싸야 하는데. 어디로 가지? 짐을 넣을 가방이 없잖아. 가방을 먼저 사야겠어.'


다른 살인범들도 승훈의 머리가 돌아가는 방식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남들과 다르다. 그래서 어쩌면 그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사라져도 상관없는 사람.


승훈은 가방을 사기 위해 밖으로 나섰다. 가방을 어디서 사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머리를 긁적였다. 승훈은 집에서 가장 가까운 백화점으로 향했다. 마네킹에 진열된 멋진 정장을 바라보았다.

'도망을 다니려면 많은 돈이 필요할 텐데... 만약에 곧 죽거나 잡힌다면 저런 옷을 사도 상관이 없겠지?'


승훈은 가방을 찾아 백화점을 돌아다녔다. 백화점의 내부는 모든 곳이 깨끗하고 향기가 났다. 그는 만약 자신이 살아가는 지구가 백화점 같다면 어떨까 생각했다.

'백화점에서 노숙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는 최대한 많은 물건을 집어넣을 수 있는 가방을 찾기 위해 헤맸다. 즐거운 쇼핑을 하러 온 커플들과 관광객들을 바라보며, 승훈은 억울함을 느꼈다. 자신은 도망을 위해 큰 가방을 사야 한다는 상황이 억울했다.

'저 사람들도 나름 고민, 걱정들이 있겠지.'


아름다운 원피스를 입은 마네킹을 지나치며 그는 한 사람을 떠올렸다.

'나은이가 입으면 정말 아름다울 거야.'


그는 다시 한번 억울함을 느꼈다. 남들이 보기에는 늘 혼란스럽고 제정신이 아닌 승훈이지만, 이제는 스스로도 머릿속 혼돈을 인지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어둠을 등진 승훈은 새롭게 산 정장을 손에 든 채 집으로 걸어갔다. 쓸 만한 가방은 찾지 못했다. 쇼핑은 고된 노동이었다. 그의 등은 굽었고 배는 굶주렸다. 집에 도착한 그는 다시 한번 라면을 끓여 먹었다. '맛'이라는 것을 포기한 지 얼마나 되었는지는 기억할 수도 없었다. 정장으로 갈아입은 그는 다시 한번 TV를 보며 라면을 먹었다.


TV를 보며 웃는 자신의 모습을 거울로 바라보았다. 거울 속 승훈은 TV에서 눈을 떼지 않고 계속 웃고 있었다. 정장을 입은 채 라면을 먹는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제야 그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아채기 시작했다. 그는 화가 났다.


평소 입던 허름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는 평소보다 더욱 화가 났다. 망치와 모자, 장갑이 있는 보일러실로 향했다. 나은에게 어울리는 남자가 되기 위해 가둬 두었던 곳의 문을 열었다. 어째서인지 문을 막아놓은 방식이 누군가의 손길이 닿은 듯했다. 그러나 승훈은 상관하지 않았다.


분노는 그의 시야를 흐리게 만들었다.

'다 죽일 거야.'


승훈은 모자를 눌러쓴 채 마법의 배수로가 있는 곳으로 빠르게 걸었다. 가로등에 비친 그림자조차 그를 말리고 싶어 하는 듯 빛은 짧았다. 살이 빠졌는지 허리춤의 망치가 발목으로 떨어지길 반복했다. 모든 것이 일상과 다르다는 것도 화가 났다. 어쩌면 나은이 아니었으면 지금쯤 편하게 호텔 창고에서 핸드폰 게임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혹독한 날씨와 연이은 실종에 산책로에는 사람이 없었다. 오늘 폭력을 선사할 노숙자를 찾지 못한다면 승훈은 폭발할지 모른다. 가장 어두운 날에도 빛이 드는 법이라고 했던가, 승훈은 다리 밑에 등을 돌려 누워 있는 노숙자를 발견했다.


두꺼운 여러 겹의 옷을 입은 노숙자는 추위에 떨며 누워 있었다. 승훈은 바지춤에서 망치를 꺼냈다.


그때, 누워 있던 노숙자가 짐승처럼 빠르게 몸을 일으켜 망치를 든 승훈을 넘어뜨렸다.


승훈은 예상치 못한 기습에 바닥으로 고꾸라지며 머리를 강하게 부딪혔다. 그는 눈앞이 흐릿해진 와중에 자신의 손에 닿을 거리에 있는 망치가 누군가의 발에 차이는 것을 보았다.


김 부장은 누더기 같은 옷을 벗어내며 먼지를 털었다.


"아, 냄새. 추워 죽을 뻔했네."


김 부장은 내려다보았다. 초점을 잃은 채 바닥에서 꿈틀대는 승훈은 김 부장을 향해 중얼거렸다.


"너도 같은 한패지. 나은이한테 그렇게 한 놈들하고."

"나은이? 나은이 죽었어."

"거짓말. 안 죽었어."

"나은이는 말이야, 호텔 옥상의 노란 통 안에 얼어 죽어있어. 죽기 전에 너의 연락은 다 거부한 다음에."


김 부장의 다음 계획은 간단했다. 승훈을 옮겨 돈의 위치를 묻고, 사건의 자초지종을 들은 후 그를 죽이는 것.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그림이 스쳐 지나갔다.


자신에게 물을 끼얹는 예슬의 모습.

돈은 필요 없다는 준호의 모습.

분명히 느껴지는 제삼자의 손길들.

그리고 예슬의 목소리.


"김 부장님 요즘 왜 그래요?"


예슬의 목소리는 그녀의 할아버지의 목소리와 겹쳐 김 부장의 머리에 울렸다. 그는 더 이상 견디기 힘들었다. 직장인들이 받는 스트레스는 모두 비슷한 모습이다. 연말이면 다들 생각한다.

'더는 못하겠다. 새해에는 다를 것이다.'


김 부장은 배수로를 향해 승훈의 발목을 잡고 끌어갔다. 그는 손쉽게 승훈의 몸을 들어 올렸다. 승훈은 자신이 여러 명을 집어넣었던 마법의 배수로에 빨려 들어갔다.




준호의 공포는 김 부장과 커피를 마시기 전부터 시작되었다. 처음 낡은 카페로 민혁을 불렀을 때, 어차피 전과자인 민혁이 모든 죄를 뒤집어쓸 거라 생각했던 순간부터. 아니면 옥상에서 얼어가는 민혁을 두고 철문을 잠갔을 때부터.


준호는 커피를 빠르게 비운 후 호텔을 나서는 김 부장의 등을 본 후 눈이 붉어졌다. 아직은 옥상으로 올라갈 때가 아니었다. 그것은 계획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심장이 빠르게 뛸 때 합리적인 선택은 쉬운 것이 아니다.

'어차피 계획대로 된 건 하나도 없잖아.'


준호는 김 부장이 떠난 로비에서 옥상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의 숫자는 빠르게 변해갔다.


12층에 내린 준호는 이젠 뭐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듯이 당당하게 13층으로 올라갔다. 그는 크리스마스에 자신이 도망쳐 나왔던 방의 문을 바라보았다. 닫혀 있는 방문 너머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어차피 죽게 놔둘 계획이었으면, 예슬이는 왜 살려준 건데?"


겁에 질린 준호는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방의 문을 열었다. 깔끔하게 청소된 방 안,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닫힌 화장실 문을 바라보았다.


"누구 찾아?"


준호는 화장실 문을 열었다. 인간이 숨어 있을 리 없는 선반 구석구석을 확인했다. 그는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목소리가 흘러나왔던 13층 방문을 닫았다.


준호는 재빠르게 옥상으로 뛰어 올라갔다. 닫혀 있는 옥상의 철문을 마주했다. 자신의 공포를 직면할 시간이었다. 차가운 문손잡이를 잡고 돌렸을 때 문을 막고 있는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차갑고 굳어버린 어떤 덩어리. 그는 힘을 주어 문을 밀어냈다.


차가운 바람이 그의 땀을 식혀주었다. 그는 자신이 열어젖힌 철문 뒤에 무엇이 있을지 알고 있었다. 그저 문을 닫을 용기가 없을 뿐이었다. 문을 닫고 돌아볼 용기가 없었다. 심지어는 그가 그랬듯이 누군가가 문을 잠그면 어쩌나 하는 망상까지 들었다.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옥상의 난간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지는 해가 그의 마음을 위로해 줄 때 바람에 닫히는 철문 소리가 다시 그의 심장을 뛰게 했다. 공포를 마주할 때가 왔다.


뒤를 돌아본 준호에게 그가 찾는 것은 없었다. 그곳에는 민혁이 아닌, 나은의 시체가 굳은 채 누워 있었다. 웃고 있는 나은의 시체는 민혁의 낡은 코트를 이불 삼아 덮고 있었다. 나은의 옆에 놓인 다른 옷가지들을 바라보았다. 민혁의 신발과 양말, 그의 셔츠까지. 준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준호는 옥상 구석에 있는 거대한 노란 통을 발견했다. 천천히 다가가 상자를 열었다.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눈이 올 때 뿌리는 염화칼륨과 몇 개의 모래주머니 그뿐이었다.


다시 나은의 시체를 돌아본 준호는 그녀가 추워 보였다. 준호는 나은의 시체를 안아 눈을 녹이는 소금과 모래 위에 내려놓았다. 나은은 녹지도, 되살아나지도 않았다.

'돈은? 나은아, 돈은 어딨어?'


준호는 옥상 구석구석을 뒤져보았다. 그러나 옥상에는 그가 찾는 것 중 그 어느 것도 없었다. 그는 호텔 아래를 내려보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 민혁이 있지는 않을까, 아니, 있기를 바랐다.


준호는 등을 돌려 옥상 철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너도 여기에 갇혀볼래?"


문 뒤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준호는 급하게 문을 열었다. 13층의 모든 문은 그에게 말했다. 합리적으로 시작된 그의 공포는 점점 망상이 되어갔다.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은 준호는 모든 층의 복도에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준호는 호텔에서 뛰쳐나와 택시에 몸을 숨겼다. 민혁을 닮은 택시 기사가 준호에게 물었다.


"오늘 엄청나게 춥죠?"

"네."

"얼마나 추웠을까."

"예?"

"인간이 저체온증으로 죽으면 덥다고 착각해서 옷을 다 벗고 죽는 경우가 있다고 해요."

"그 얘기를 왜 하시는 건데요?"

"왜 할 것 같아요?"

"저 그냥 여기서 세워주세요."


택시에서 도망치듯 나온 준호는 헛구역질을 반복했다. 택시 기사는 혼잣말과 구역질을 하는 승객을 무시한 채 겨울의 길을 홀로 달려갔다.


얼어붙은 강 위의 다리를 걸어가는 준호는 추위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는 두통을 느꼈다. 붉은 얼굴과 얼어붙은 눈물. 다리를 건넌 준호는 다시 한번 택시를 잡았다. 그는 택시 기사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았다. 아무리 궁금해도 택시 안의 거울을 쳐다보지 않았다.


택시에서 내린 준호는 집으로 뛰어들었다. 옷을 갈아입지도 않은 채 침대에 누워 이불속에 숨었다. 따뜻하지 않았다. 핸드폰을 꺼놓았다. 김 부장 혹은 예슬, 어쩌면 살아 있을지 모르는 민혁에게 연락이 온다면 그는 이 모든 공포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이불을 돌돌 말아 숨은 준호는 나비가 될 수 없는 애벌레와 같았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잠드는 것뿐이었다.


"일어나."


준호는 침대에 숨어 주변을 바라보았다. 집으로 들어오는 바람에는 소리가 담겨 있었다.


"나 좀 도와줘."


"이것 좀 제발 열어줘. 누가 밖에서 잠근 것 같아."


침대 위에 굳어 머리까지 이불을 덮은 준호는 목소리로부터 해방될 수 없었다.


"왜 도와주지 않는 건데. 나 여기서 얼어 죽는다고."


준호는 눈을 감고 자는 척을 이어갔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척. 자신은 모든 것과 상관없다는 시늉을 이어갔다. 이내 힘을 쓰는 민혁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준호는 침대에 누가 앉은 듯 눌리는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알았어. 이제 열어달라고 안 할게."


이불속에 숨은 그는 라이터에 불이 켜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불 안으로 스며드는 담배 연기가 그에게 말했다.


"그 대신 부탁이 있어. 아무도 이곳에 오지 못하게 해 줘."

"어디를,... 왜?"

"창피하거든. 아무도 나를 보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는 못 해."

"문도 열어주지 못하고, 나의 다른 부탁들도 들어주지 못하겠다고?"

"응. 나는 못 해."


민혁은 준호가 덮은 이불을 강하게 당기기 시작했다. 준호는 겁에 질려 눈을 감고 이불을 잡았다. 이불이 침대에서 떨어지고 준호는 민혁을 보았다. 하얀 도화지처럼 하얘진 피부. 나무 또는 물건과 구분이 안 되는 생기 없는 육체.


준호는 공포에 질려 꿈에서 깼다. 피해망상은 준호의 현실을 꿈으로 둔갑시켰다. 준호는 홀로 누군가와 전쟁하듯 집에 숨어 절대 나오지 않았다. 그가 어딜 가든 모든 문은 그에게 말했다.


"열어줘. 추워."


공포에 질려 도망도 가고, 용서를 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카페 화장실 문도, 창고 문도. 자신의 앞에 선 모든 문은 그에게 말했다.


"열어. 열라고. 나 죽는다고. 제발. 열어."


준호는 현관을 포함해 집 안의 모든 문을 열어놓았다. 집 안의 모든 것은 얼어붙어갔다. 이불을 뒤집어쓴 준호는 한 번도 열어본 적 없는 거실의 거대한 창문을 바라보았다. 창문 바깥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추위에 떠는 준호는 더 이상 참기 힘들었다.


"너도, 너도 이 개새끼야. 남의 돈 훔치려고 한 거잖아. 너도 도둑질하려다가 이렇게 된 거잖아. 왜 나한테 그러는데."

"그러니까. 부탁 좀 들어줘. 문 좀 열어줘."

"무슨 문. 무슨 문 이 개새끼야."

"호텔 옥상에 문."

"문은 닫혀 있다고. 제발 나 좀 내버려 둬. 나도 돈은 구경도 못 했어."

"아무도 옥상에 올라오지 못하게 해 줘."

"네 말 안 들으면. 안 들으면 어떡할 건데? 내가 겁나서 계속 숨어 살 줄 알아?"

"쪽팔리니까, 문 좀 닫아줘. 안 그러면 다 죽일 거야."

"다 죽여. 상관없으니까. 다 죽여."

"한 명이라도 올라오면, 다 죽게 만들 거야."


준호는 추위에 떨며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창문을 주먹으로 깼다. 그의 집에서 따듯한 건 유리에 찢어진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그의 피뿐이었다. 준호는 민혁의 목소리를 반복해서 읊조렸다.


"다 죽게 만들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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