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슬은 이제 제대로 고개를 돌려 김 부장을 노려볼 수 있을 만큼 상태가 호전되었다.
"기자들이랑, 유가족이랑 얘기 다 했다면서요."
예슬은 김 부장의 얼굴에 신문을 던졌다. 그는 아무런 표정 없이 신문을 주워 들었다.
'호텔 13층, 의문의 죽음. 진상 규명을 외치는 시민들.'
"1면에 난 것도 아니고, TV나 인터넷은 아직 조용하니까. 걱정할 거 없어."
예슬은 김 부장의 뻔뻔함에 헛웃음을 흘렸다. 김 부장은 그녀의 혐오 섞인 시선과 미소를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시위하는 것들이 유가족들도 아니고, 나은이도 죽었고, 승훈이 그 새끼도 죽었고."
"김 부장."
"응."
"미안한데. 이제 나한테 반말하지 마요."
중학교 시절부터 예슬을 봐온 김 부장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은이 몰랐던 예슬의 냉혹한 모습이 그를 계속해서 밀어붙였다.
"한숨 쉴 입장 아니지 않아요?"
"말한 대로, 신문 한편에 작게 난 거니까. 걱정할 것 없습니다."
"돈은?"
군대 전역 이후부터 하루도 휴가 내지 않고 예슬의 집안을 위해 일해온 김 부장이었다. 예슬의 할아버지에게 혼나는 것은 익숙했다. 예슬의 아버지에게도 자주 혼나곤 했다. 김 부장의 멍하게 시선을 잃은 얼굴은 바닥을 향했다.
예슬은 손가락을 튕기며 언성을 높였다.
"김 부장! 아저씨! 돈은?"
김 부장은 예슬의 침대 옆에 앉아 코트 안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 후 깊은 연기를 내뱉었다. 예슬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여기 병원이에요. 드디어 정신이 나갔구나?"
김 부장은 멍한 시선으로 담배를 몇 모금 더 들이마셨다. 바닥에 꽁초를 떨어뜨린 후 발로 짓밟았다. 이내 예슬의 옆으로 걸어가 창문을 열었다.
환자복 차림의 예슬은 찬바람에 몸이 얼어붙었다. 그녀를 얼린 것은 공포와 혼란의 온도였다. 김 부장은 담배를 문 채 예슬의 얼굴에 베개를 짓눌렀다.
그는 몸부림치는 예슬의 마지막 숨소리가 베개에 먹혀들어 가는 것을 무표정하게 지켜보았다. 이내 조용해진 방에서 그는 옷매무새를 단정히 한 후 문을 나섰다.
엘리베이터의 주차장 버튼을 누른 후 벽에 기댄 그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처자식이 있었으면 조금 더 참았으려나.'
김 부장의 눈에 공존했던 해일과 파도가 균형을 잃는 날이었다.
주차장으로 내려온 김 부장은 천천히 차를 향해 걸어갔다. 차에 탄 그는 시동을 켠 후 내비게이션 화면을 바라보았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살고 싶은 의지가 부족해서일까? 도망갈 생각은 없었다. 그는 자신이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승훈을 떠올렸다.
'걔는 그렇게 개판을 만들고 어디로 갔었을까.'
김 부장의 차는 집을 향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법이 아닌 다른 모습의 처벌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부하 직원들과 맞서 싸울 생각은 없었다. 직원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달리는 차 안에서 그는 창문을 내렸다. 차갑게 들이마시는 겨울 공기 속에서 그는 생각했다.
'내년의 냄새는 다르려나.'
달력이 넘어가면 더 많은 변화가 찾아오리라 믿으며 살아왔던 김 부장이었다. 운전대를 잡은 채 고개를 숙여 흐린 하늘의 태양을 바라보았다.
그의 자동차는 창문을 내린 채 그가 사는 아파트의 주차장에 도착했다. 김 부장은 추위를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집에 들어섰을 때의 온기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는 이불을 정리하고 갈아입을 정장을 침대 위에 펼쳐 놓았다. 평소와 다름없이 샤워했다. 머리를 먼저 감고, 이를 닦고, 얼굴을 닦았다. 몸을 닦는 것은 마지막이었다.
로션을 바르고 머리를 말렸을 때 과장에게 전화가 왔다. 다행이었다. 자신이 샤워하는 중간에 왔다면 분명 전화를 피했다고 생각할 과장이었다.
"부장님. 회사 호텔로 와주실 수 있으세요?"
"그래요. 지금 출발할게요."
깨끗한 정장에 향수를 뿌린 김 부장은 아파트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차를 가져가면 다시 집에 차를 갖다 놓을 사람이 없잖아.'
그는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결정했다.
겨울의 찬 바람에 코트와 향수 향기를 펄럭이며 김 부장은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버스가 도착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3분. 180초는 짧기만 했다.
거대한 푸른색 버스는 그의 앞에 멈춰 섰다. 그는 형장의 이슬이 되기 위해 걷는 사형수처럼 버스에 올라탔다. 승객이 많지는 않았으나, 그의 앞에 놓인 빈자리는 없었다. 그해의 마지막 날, 세상 모든 운이 그를 비껴가는 것처럼. 그가 하차할 차례가 다가오고, 그는 벨을 눌렀다.
뒷문 앞으로 다가선 그는 열린 문을 통해 차가운 겨울로 내려섰다. 눈앞에 펼쳐진 호텔을 올려다보았다. 그해의 마지막 달이 호텔을 차갑게 비추고 있었다.
호텔 앞에는 의문의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시위대가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영정 사진을 든 사람들은 많았으나, 김 부장은 알고 있었다. 그중에 유가족은 없다는 것을.
'아휴, 나쁜 새끼들.'
김 부장은 파리 떼 같은 인파를 뚫고 호텔에 들어섰다. 머피의 법칙일까, 아니면 경영이 멈춘 호텔에선 당연한 일일까. 엘리베이터는 작동하지 않았다. 김 부장은 머쓱한 듯 코를 만지고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나쁜 놈이라도 마지막 날은 버스에서 자리에도 앉고, 엘리베이터 정도는 작동해야 하는 것 아닌가.'
계단을 오르던 그에게 다시 한번 전화벨이 울렸다.
"거의 다 왔어요. 계단이에요."
김 부장은 13층 복도의 문을 열었다. 그는 복도의 중간, 문 앞에 서 있는 남자들을 보았다. 남자들은 그에게 깍듯이 인사했다. 김 부장 역시 미소로 그를 맞이하며 방을 향해 걸어갔다.
"오랜만이네."
남자는 김 부장을 위해 방의 문을 열어주었다. 그곳에는 정장을 입은 직원들이 있었다. 마치 면접을 보러 온 듯 과장이 앉아 있는 자리 앞에는 빈 의자가 있었다. 김 부장이 의자에 앉는 동안 과장은 따뜻한 미소로 그를 맞이해 주었다.
차갑고 녹슨 파이프는 승훈을 토해냈다. 오물과 부패한 시체 사이에서 눈을 뜬 승훈은 새로 태어난 기분이었다. 오물이라는 양수를 뒤집어쓴 그의 머리는 어느 때보다 더 맑아졌다.
그동안 승훈은 머릿속의 목소리를 잠재우기 위해 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는 몰랐다. 머릿속의 목소리를 죽이는 방법은 거리의 노숙자들이 아닌, 자신을 죽여야 함을. 그는 하늘아래 지고 있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태양과 땅 사이에 선 승훈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했다.
'태양이 뜨고, 지고. 나도 지구 위에 서 있는 인간인데.'
승훈은 지는 태양을 머릿속으로 흡수했다. 그는 본인이 해야 할 일을 알고 있다. 그러나 김 부장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것 또한 알고 있다. 나은이가 자신을 좋아하든 말든 상관이 없었다. 일단은 그녀를 보러 가야 했다. 그래야만 했다.
승훈은 자신이 죽인 시체들을 밀치고 길가로 나왔다. 온갖 오물에 뒤섞여 거리를 걷는 그에게 사람들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에게 쏟아지는 유일한 관심은 악취에 의한 경멸의 눈빛이었다. 그의 믿음은 더욱 견고해졌다.
고작 하루였지만, 그는 오랜만에 집에 왔다. 승훈은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마치 오페라 가수라도 되는 듯 깔끔한 차림으로 호텔로 향했다. 버스가 아닌 택시를 탄 후, 호텔을 향해 다리를 건넜다. 다리 아래의 강은 아직 얼어 있었다. 다리 아래의 얼음에서 그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그 어떤 상상이나 꿈도 비치지 않았다.
호텔 앞은 난장판이었다. 클럽 앞에는 평소와 다름없이 비싸고 화려하지만 춥게 입은 남녀들이 줄을 서 있었고, 그 옆에는 진상규명이라는 단어를 반복해서 외치는 시위대가 있었다. 가끔은 시위대와 클럽 손님들이 시비가 붙기도 했다. 승훈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구경도 하지 않고 호텔 로비로 들어섰다.
수많은 사건 사고가 지나고, 호텔 로비는 버려진 지구와도 같았다. 승훈은 천천히 계단을 하나하나 오르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에는 어떤 표정도 없었다.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13층에 도착한 그는 계단 위를 바라보았다. 마지막 한 층을 더 올랐다.
바람은 온 힘을 다해 옥상의 문을 막고 있었다. 거센 바람도 승훈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승훈이 옥상의 철문을 열고 바람을 맞았을 때 그에게는 시원하다는 생각뿐이었다.
옥상에 첫발을 내디딘 그는 바닥의 옷가지를 발견했다. 어떤 남자의 것으로 보이는 낡은 검은 코트. 왠지 그 옷이 익숙하고, 오랜만이었다.
그는 김 부장이 이야기한 대로 옥상 구석에 있는 노란 통을 향해 한 걸음씩 발을 내디뎠다. 그것을 열어 굳어 있는 나은을 발견한 순간 그는 미소를 지었다. 마치 보물섬의 보물 상자를 발견한 해적처럼.
승훈은 웃고 있는 나은의 시체를 보물 상자 안에서 꺼냈다. 나은의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자, 통화 기록에는 그녀가 몇 번이나 그의 전화를 거부했는지 분명히 쓰여 있었다. 승훈은 개의치 않았다. 그가 깨달은 것은 이 모든 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주워온 낡은 밧줄을 나은의 목에 묶었다. 밧줄의 반대편 끝은 옥상 기둥에 묶어 고정했다. 그는 여전히 지상에서 들려오는 소음을 들을 수 있었다. 새해를 즐겁게 맞이하려는 사람들과 시위하는 사람들의 소음. 승훈은 자신의 영혼을 전시할 준비를 끝냈다.
준호가 급하게 호텔 앞에 도착했을 때, 아수라장에 서 있던 사람들은 모두 옥상을 바라보았다. 하얗게 굳은 여인의 시체가 옥상에 걸렸다. 목에 줄이 감긴 나은의 시체는 13층의 창문에 부딪히기를 반복했다.
준호는 나은의 시체에서 민혁의 코트를 알아볼 수 있었다.
'너는 옷이 하나밖에 없냐?'
승훈은 옥상의 난간에 앉아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나는 너희들이 싫어. 세상이 싫고. 왜냐면 너희들이 나를 먼저 싫어했으니까. 세상이 나를 먼저 싫어했지."
"... 그래도 다 이해해."
지상의 사람들은 아무런 말소리 없이 나은과 승훈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몇몇은 핸드폰을 꺼내 그런 승훈의 모습을 찍고 있었다.
준호는 다친 다리를 질질 끌며 로비에 들어섰다. 승훈의 목소리 사이에서 준호는 분명 민혁의 분노를 들을 수 있었다. 경영자가 없는 호텔의 엘리베이터는 작동하지 않았다. 준호는 비상계단의 문을 열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다리가 지금 잠시만이라도 멀쩡해지기를 바랐다. 그는 민혁의 경고를 잊지 않았다.
승훈은 말을 이어갔다.
"내가 죽었으면 누구 한 명이라도 나서서 나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밝혀달라고 했을까? 나 자신을 동정해 달라는 이야기가 아니야. 나는 불쌍한 존재라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야. 매일 40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데, 너희들은 신경도 안 쓰지. 새해에는 달라질 거야. 나는 상관없는 사람이 아니야.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아."
지상의 사람들은 욕설과 야유를 내뱉었다.
"닥쳐. 하루에 40명이야. 10일이면 400명이고 100일이면 4,000명이야. 너희들이 거기에 속하지 않을 거라는 자신이 있어? 최소한 너희들이 사랑하는 사람이 4,000명, 40,000명에 속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해? 나는 그래서 알게 된 거야. 너희들이 왜 여기에 있는지. 너희들은 두려운 거야. 너희같이 하찮은 것들이 죽으면 아무도 신경을 안 쓸 테니까."
지상의 인파는 최면에 걸린 듯 승훈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승훈의 분노는 초현실적인 최면이었다.
준호는 바지를 잡아 올리며 힘겹게 계단을 올라갔다. 오르는 내내 들려오는 승훈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에게 들려오는 승훈의 목소리는 잔인하기 그지없었다. 민혁은 분명히 준호에게 말했다.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모두를 죽게 만들 것이라고.
13층의 방 안, 시체가 두들기는 창문 안의 남자들은 그들만의 대화를 이어갔다. 과장은 김 부장에게 담배를 건네주었다.
"부장님. 제가 이해가 안 돼서 그래요. 갑자기 이런 좌회전을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그냥 화나서? 이성을 잃어서? 20년 넘게 이 일을 해오신 분이?"
"새해잖아요. 과장님은 새해에 결심 같은 거 없습니까?"
"뻔하죠. 운동도 하고, 술도 좀 줄이고, 집에서 시간 더 많이 보내고."
"나도 새해에는 조금 다른 사람으로 살아보려 했지."
"사람이 갑자기 바뀌면 죽는다잖아요."
"맞네."
둘은 웃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옥상에서 울려 퍼지는 청년의 목소리에 움직이려는 직원들에게 과장은 가만히 있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위에 쟤는 죽였다고 하지 않았어요?"
"죽였지. 부활했나 봐요. 그래도 걱정할 것 없어요. 나만 믿어."
"운명대로 안 살면 힘든 것 같아요. 평생 신이랑 씨름하면서 사는 것 같아."
"그러니까 과장님도 사고 치거나 사표 내지 말아요."
과장은 안타까운 한숨을 내뱉었다. 정든 동료의 퇴사는 안타까운 법이다.
"그러게, 내가 같이 치킨집이나 하자 했잖아요. 욕조 옆에 불 피워 놨어요. 술도 거기에 놔뒀고."
"쪽팔리게 여기서 기다릴 건 아니죠?"
"어쩔 수 없어요. 알잖아요."
"정말 오늘은 되는 일이 없네. 먼저 들어갈게요."
"네. 들어가세요."
과장은 허리를 굽혀 김 부장에게 인사했다. 김 부장은 코트와 정장의 겉옷을 벗은 채 화장실로 들어서 문을 잠갔다. 화장실을 가득 매운 연기 아래 그가 잠수할 차례가 다가왔다.
방 안의 남자들은 옥상에서 울려 퍼지는 승훈의 목소리를 들으며 김 부장이 잠든 화장실의 틈새를 막았다.
"나도 꿈이 있었어. 뭐였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대충 이런 모습이었을 거야."
승훈의 바닥을 내려다보는 버릇은 줄에 걸린 나은을 바라보게 했다. 지상의 사람들은 충격을 받은 것인지, 최면에 걸린 것인지 그 누구도 움직이지 않고 옥상을 바라보았다. 그 와중에도 일부는 핸드폰을 통한 생중계를 이어갔다.
"세상을 죽여버릴 수는 없으니까, 대충 눈에 보이는 몇 명만 죽이면서 살아왔어. 처음에는 너희들이 정말 역겨운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이 순간에는 아니야. 진심이야. 너희들의 꿈은 무엇이었는데?"
말끔하게 차려입고 사람들에게 소리를 지르는 승훈의 모습은 그가 보았던 TV 속 코미디언들과 같았다. 배지를 달고 있지는 않았지만 분명 그들과 닮았다.
10층 정도에 도착한 준호는 숨을 돌리며 눈물을 닦았다. 그는 천재도, 무당도 아니지만, 알 수 있었다. 승훈을 막아야 했다. 승훈은 난간 위에 서 있는 것이 지쳤는지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진정한 악은 우리가 죽기를 원하지 않아. 고통받기를 원하지. 이제는 바꿔야지. 어떻게 바꿀까?"
클럽에 들어갈 줄을 기다리던 사람들도, 시위를 하던 사람들도 모두 조용히 그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투표? 투표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투표로 이 모든 더러운 것들을 바꿀 수 있다면, 그들은 우리에게 투표를 할 수 있도록 놔두지 않았을 거야. 내가 그들의 것을 빼앗는 방법을 알려줄게. 그들에게 지옥을 보여주는 거야. 그들의 지옥은 우리의 파라다이스야. 모두 파라다이스로 떠나고 싶지 않아? 지구라는 땅에 우리가 고통받기 위해 태어났어? 매일 죽고 싶어 하면서 살아가면 그게 무슨 인생이야? 소극적인 자살인가? 우리는 파라다이스로 향할 거야. 우리는 사라질 거야. 상관없는 것들이 사라질 때, 상관없는 것들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을 때. 그때는 그들의 차례야. 이제 모두 집으로 돌아가."
승훈은 줄에 외롭게 매달린, 얼어 붙은 영혼을 내려다보았다. 민혁의 눈으로, 나은의 영혼으로, 승훈의 목소리는 이어졌다.
"다들 이제 자유야. 나는 내가 누군지 알아. 나는 상관없는 사람이 아니야. 모두 집으로 돌아가서 자유가 되도록 해. 너희들의 목을 밧줄에 매달고, 손목을 긋고, 목을 그어. 그들에게 지옥을 보여줄 때야. 파라다이스로 향할 순간이 온 거야. 삶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살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환희를 느껴봐. 너희들의 운명을 완성시켜. 그렇게 너희들은 마지막으로 상관있는 것들이 되는 거야. 그렇게 되면, 이 위대한 우리의 문명은…."
옥상의 문을 연 준호는 승훈을 향해 달려들었다.
'다 죽게 만들 거야.'
새해가 얼마 남지 않았다.
준호의 손가락 끝이 승훈에게 닿을 때, 승훈은 추락했다. 군중은 소리 지르지 않았다. 누구 하나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 그곳의 사람들은 침묵을 지킨 채 조용히 집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승훈의 추락은 민혁의 분노, 나은의 영혼이 진실임을 증명했다. 준호는 나은이 걸려 있는 밧줄을 힘차게 들어 올렸다.
준호는 나은을 안은 채 옥상의 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불편한 다리 탓에 나은의 시체는 준호의 품에서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시체가 지은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문 앞에 선 준호는 옥상의 문손잡이를 잡아 돌렸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손잡이는 돌아가지 않았다. 준호는 손잡이를 왼쪽으로도, 오른쪽으로도 돌려보았다. 강하게 밀기도 해 보고, 당기기도 해 보았지만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치 문의 저편에 있는 또 다른 준호가 문을 잠근 듯했다. 준호는 지쳤다. 웃고 있는 나은과 문에 기대앉았다.
새해에는 사람들이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졌다.
문이 움직이는 소리에 준호는 잠에서 깼다. 옆에 있던 나은은 이미 떠난 지 오래였다. 준호는 문 건너편에서 흘러오는 따뜻한 온기와 바다 내음을 맡을 수 있었다.
문을 열고 그가 처음으로 본 것은 별빛이 가득한 밤하늘이었다. 누군가 별빛을 건반 삼아 곡을 연주하듯 아름다운 음악이 흘러나왔다. 별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디딘 그는 자신이 언제 신발을 벗었는지도 몰랐다. 더위에 윗옷을 던진 준호는 발에 닿는 모래의 촉감을 느꼈다. 해변의 모래를 밟을 때 그의 다리는 절름거리지 않았다. 발목이 아프지도 않았다. 그는 해변을 걸으며 앞을 향해 계속 나아갔다.
해변에는 나무로 지은 칵테일 바가 있었다. 그곳에 도착한 준호는 바텐더에게 테킬라 선라이즈 두 잔을 부탁했다. 김 부장은 열심히 닦은 잔을 꺼내 테킬라와 오렌지 주스를 섞어 내었다. 석양이 담긴 음료 두 잔을 손에 든 준호는 음악이 흘러나오는 무대를 지나쳤다. 그는 늘 보사노바를 좋아했다. 무대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무대에는 말끔히 차려입은 승훈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흔드는 힘이 있었다. 구석의 테이블에 앉은 나은은 노래하는 승훈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나은의 그림 속 승훈의 얼굴엔 어떤 흉터도 없었다.
준호는 그들을 지나 파도가 들이치는 곳으로 향했다. 밤바다는 잔잔했다. 아무런 소란이 없었다. 그는 의자에 기대 누워 있는 민혁의 옆에 앉았다. 준호는 김 부장에게 받은 칵테일 한 잔을 민혁에게 건넸다. 민혁은 미소를 지으며 준호의 잔을 받아 한 모금 들이켰다.
함께 밤바다의 보이지 않는 수평선을 바라보던 준호는 민혁에게 담배를 건넸다.
"끊었어."
"그러면 나도 끊을까?"
"마음대로."
"여기서 뭐 하는데?"
"해 뜨는 거 보려고. 새로운 해."
다시 또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은 아이들을 잠에서 깨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