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es around... 1

by 박규동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누워 있던 준호는 점점 거세지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났다. 그의 눈꺼풀 위로 드리운 푸른 그늘에 그는 조심스레 눈을 떴다. 태양이 떠오르는 바다의 끝, 차가운 수평선 너머로 거대한 푸른빛의 태양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푸른 태양이 수면 위로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자 준호는 극심한 한기가 뼛속까지 스미는 것을 느꼈다. 해변의 모래를 쓸어 담는 강풍에 준호는 실눈을 뜬 채 주위를 살폈다. 해변의 모든 사람들은 일제히 어디론가 달려가고 있었다. 그들이 차가운 푸른 태양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에게 다가오던 파도가 공중에서 얼어붙는 초현실적인 광경에 준호는 굳은 뒷걸음질을 쳤다. 그는 김 부장이 있던 술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승훈이 노래를 부르던 무대는 차갑게 얼어붙은 채 정지되었다. 준호는 술집 바닥의 구멍 속에서 자신을 향해 손짓하는 김 부장을 발견했다. 바람과 추위는 준호의 귀를 막았으나, 그는 김 부장의 입 모양을 읽을 수 있었다.

'어서 와.'


준호는 나무로 지어진 술집 바닥으로 재빨리 달려갔다. 바닥에 난 문을 내려다보자, 김 부장은 이미 어둠뿐인 지하를 향해 사다리를 타고 빠르게 내려가고 있었다. 저 멀리 차가운 태양이 점점 더 높이 떠오르는 것을 본 준호는, 그 역시 사다리 아래로 몸을 던져야 할 시간임을 알았다. 사다리를 잡고 지하로 향하는 문을 닫으려는 찰나, 강한 바람이 문을 세차게 후려쳤다. 이에 손가락을 찧은 준호는 극심한 고통과 함께 사다리에서 아래로 내동댕이쳐졌다.


하루에 세 번째 잠에서 깨어난 준호는 머리가 찢어지는 두통을 느꼈다. 어둠과 별빛만이 가득한 해변에서 그는 조심스레 주위를 돌아보았다. 모래 위에 쭈그려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는 승훈이 보였다. 그의 앞에는 김 부장과 나은, 민혁이 목소리를 높이며 상황을 따지듯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들 역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준호는 민혁이 입고 있는 코트를 바라보았다. 그는 놀라지 않은 척, 아무것도 모르는 듯 철저히 연기했다. 이내 민혁은 멍하게 서 있는 준호를 바라보았다.


민혁 : 일어났어? 괜찮아? 다친 데는 없어?

준호 : 도대체 무슨 일이야?

민혁 :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지 뭐.

준호 : 민혁아, 너 그 옷. 네 코트, 어디서 났어?

민혁 : 갑자기 무슨 소리야. 일단 여기가 어디인지, 어떻게 나가야 할지부터 생각해야 해. 알았지?


나은은 사다리에서 떨어져 붓고 피가 나는 준호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에서 느껴지는 뜻밖의 온기에 준호는 소름이 돋았다. 이미 싸늘하게 굳어 있어야 할 나은의 온기에 준호는 속으로 공포를 숨겼다.


나은 : 손은 괜찮아?

준호 : 응. 크게 다친 건 아닌 것 같아.

나은 : 내가 분명히 말했잖아. 이번 여행은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고.


준호는 이 모든 상황을 통제하거나,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여기는 어디지? 아니, 이곳에 오기 전은 어디였지?'

'나는 옥상에 있었는데. 분명 따뜻한 해변으로 향했고.'

'누군가가 나에게 약을 먹인 건가? 아직도 파티가 끝나지 않은 건가? 아니면, 나는 꿈을 꾸고 있는 걸까?'

'민혁이는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는 건가? 아무것도 이해가 가지 않아.'


김 부장은 손가락을 뻗어 하늘의 별 중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김 부장 : 저기 봐. 저기에 불빛이 있어.

나은 : 사람이 사는 집인가?


어둠 속 하늘과 바다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민혁은 더 가까이 보기 위해 어둠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그는 발에 닿는 따뜻하고 잔잔한 물결을 느낄 수 있었다.


민혁 : 물이 따뜻해.


나은과 김 부장은 신발을 벗고 바지를 걷어 올렸다. 그들은 어둠 속을 향해 망설임 없이 한 걸음씩 걷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과는 달리, 피부 아래로 스며드는 듯 따뜻한 바닷물은 그들을 더 깊숙한 어둠으로 은밀하게 끌어당기는 듯했다. 마치 홀린 것처럼, 그들은 점점 더 깊이 잠겨만 갔다. 그들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전진했다. 나은은 그녀의 옆, 겁에 질린 승훈의 어깨를 잡아 진정시켰다.


김 부장 : 저 멀리 있는 불빛, 우리는 저기까지 가야 해.

나은 : 바다를 어떻게 건너죠?


그때, 준호는 왼쪽 귀에서 들려오는 예슬의 목소리를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 바람에 실려온 그녀의 목소리.


예슬 : 나를 찾아와.


준호 : 왼쪽으로 가야 할 것 같아요.

김 부장 : 불빛은 앞에 있는데?

준호 : 어차피 멀리 있으니까, 해안가를 돌다 보면 뭐라도 찾지 않을까요?

나은 : 그래요. 준호 말대로 해요. 승훈아, 가자.


그들은 다 함께 발목까지 잠긴 해안을 걸어갔다. 걷는 내내 준호는 시종일관 그의 발을 내려다봤다.

'나는 친구를 배신했다. 돈 몇 푼 때문에 친구를 차가운 옥상에 가둬 죽였는데.'

'민혁이는 정말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아니야, 민혁이는 죽지 않았어. 이렇게 나의 눈앞에 살아서 걷고 있는데. 김 부장도, 나은이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아. 혹시 승훈이는 기억하려나?'


준호 : 승훈아, 어제는 뭐 했어?


승훈은 기어들어 가는 듯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승훈 : 어제? 어제 별일 없었는데…. 여기 올 준비하고.


준호는 더 이상 질문을 이어갈 수 없었다. 준호는 자신의 앞에서 걷는 민혁을 빠르게 따라잡아 질문을 던졌다.


준호 : 여기는 도대체 어디야?

민혁 : 누가 알겠어.

준호 : 무슨 일이 생긴 거야?

민혁 : 글쎄, 시대의 재앙, 기후 위기인가? 담배 필래?


민혁은 상황에 맞지 않게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그에게서 담배를 건네받는 상황은 준호에게 분명 어색했다.준호는 민혁에게 받은 라이터의 불을 켰다. 담배에 불이 붙어 오르는 찰나, 라이터의 불꽃 너머로 준호는 무언가를 보았다.


준호 : 얘들아, 아저씨, 저기 봐요. 저기 뭐가 있어요.



그들은 빠르게 바닷물을 첨벙이며 그 무언가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열 명은 족히 탈 수 있을 듯한 나룻배가 있었다. 그것은 이 비현실적인 해변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문제는 뱃사공이었다. 온몸을 감싼 붉은 천을 뒤집어쓴 채 뱃머리에 앉아 노를 쥐고 있는 인물. 일행은 누구 하나 무엇부터 어떤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여기는 어디인가? 당신은 누구인가? 우리는 왜 여기에 있는가?'


뱃사공: 타. 건너지 않는다면, 너희는 모두 여기서 얼어 죽을 거야.


뱃사공의 목소리에서는 남성의 목소리와 여성의 목소리가 섬뜩하게 뒤섞여 들려왔다. 준호는 그 여성의 목소리가 예슬의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준호는 붉은 천 안에 감춰진 뱃사공의 얼굴을 보려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바로 옆에 서 있는 승훈의 얼굴조차 알아보기 힘든 짙고 먹먹한 어둠이었다. 민혁과 나은, 김 부장과 승훈은 차례대로 배에 올랐다. 준호가 배의 끝자락에 앉자 뱃사공은 배를 밀어냈다. 배는 저 멀리 가늘게 빛나는 붉은빛을 향해 전진했다. 준호는 민혁에게 다가가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준호 : 저 사람은 누구야? 혹시 예슬이 아니야?

민혁 : 예슬이가 누구야?


김 부장은 속삭이며 대화하는 둘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 적대감은 없었으나, 준호는 불현듯 겁이 났다. 혹시 저 남자는 알고 있지 않을까? 김 부장은 최소한 준호가 누구인지 알고 있지 않을까? 준호는 그에게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이내 김 부장은 뱃사공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김 부장 : 저기요. 여기가 어디인지 좀 여쭤봅시다.

뱃사공 : 이곳의 이름? ‘어디로 가야 하는가’라고 해.

김 부장 : 장난치는 겁니까? 당신은 누구입니까?

뱃사공 : 당신은 누군데?


김 부장은 대답하지 못하고 침묵했다. 그는 혼란 속에서 생각했다.

'나는 누구지? 내가 누구인지를 증명하기 위해 무엇을 말해야 하는 거지?'


김 부장 : 저는 그냥…. 회사원인데요.


멀리서 별처럼 보이던 붉은빛은 점점 가까워졌다. 준호는 그 붉은빛을 뿜는 건물을 알아볼 수 있었다. 자신이 민혁을 불러냈던 바로 그 카페였다. 민혁은 카페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민혁 : 여기는 카페야, 폐가야 뭐야?


배가 해변에 닿기 직전, 뱃사공은 기묘한 움직임으로 등을 돌려 배 위의 사람들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준호는 붉은 천 속에서 붕대를 감은 뱃사공의 얼굴이 희미한 형태를 띠고 있음만을 볼 수 있었다.


뱃사공 : 여기에 있더라도, 가만히 있으면 얼어 죽을 거야.

민혁 : 저희는 집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도와주실 수 있으세요?

뱃사공 : 그럼. 도와줄 수 있지. 너희가 쓸모 있는 인간이라면.


배에서 내리기도 전 모두가 이곳이 상식과 이성이 통하지 않는 곳이라는 사실을 슬슬 인지하고 있었다. 이제 여기가 어디인지, 우리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는지는 두 번째 질문에 불과했다. 민혁은 첫 번째 질문, 즉 '쓸모 있는 인간'에 집중했다.


민혁 : 집에 가고 싶다면 쓸모 있는 사람이 되라고요? 그게 뱃값을 내라는 뜻입니까?

뱃사공 : 아니, 얼어 죽던가. 내려.


뱃사공은 민혁을 향해 긴 검지를 뻗었다.


뱃사공 : 너부터.


"여기에 두고 가면 어떡하냐", "여기까지라도 태워다 줘서 감사하다", "이제는 어떡하라는 것이냐" 등의 산발적인 말들이 오간 후, 준호의 일행은 해변에 서서 떠나는 배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건너온 바다 너머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을 느낄 수 있었다.


민혁 : 저 사람 말이 맞아. 여기에 있다가도 얼어 죽을지 몰라.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 반대 방향으로만 가면 되잖아?

나은 : 여기 허름한 카페 말고는 전부 다 모래뿐인데 괜찮을까요? 계속 앞만 보고 걸어가도? '쓸모 있는 인간'이 되라는 말은 도대체 무슨 소리야?

김 부장 : 일단은 저기 카페에 들어가 보자. 사람이 있을지 몰라. 없더라도 잠시 쉴 수는 있잖아.


준호와 승훈은 아무런 의견 없이 그들을 따라 카페로 들어섰다. 준호는 카페 계산대 너머로 너무나도 익숙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똑같았다. 똑같은 카페, 똑같은 사장님. 그는 주인아주머니가 자신을 알아보지 않기를 바라며 카페 구석, 가장 어두운 테이블에 앉았다.


아주머니와 대화를 나누는 민혁은 분명 서로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듯했다. 이내 주인아주머니는 계산대 위로 고개를 들고 정확히 준호를 바라보았다. 준호는 순간 숨이 멎는 듯 긴장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민혁과의 대화를 이어갔다.


'나를 모르는 건가. 아니면, 이 모든 것이 나를 놀리는 연극인가.'


민혁을 제외한 일행은 테이블에 앉아 이 모든 상황이 무슨 영문인지 이야기를 이어갔다. 민혁이 계산대 위에 커피 값을 내려놓을 때, 준호는 그의 낡은 코트 안주머니에서 삐져나온 5만 원권 현찰 다발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민혁은 그중 한 장을 꺼내 커피 값을 계산했다.

'분명, 13층 세탁기에 있던 돈일 거야. 민혁이는 코트를 옥상에 두고 갔는데. 그렇다면... 돈은 계속 코트에 있었다는 건가?'


민혁은 쟁반 위 커피 다섯 잔을 힘겹게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후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들이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을 논의하고 있을 바로 그때, 준호는 계산대 뒤 아주머니가 돈을 씹어 먹는 모습을 두 눈으로 목격했다. 그녀는 마치 며칠을 굶주린 짐승처럼 계산대의 현찰을 게걸스럽게 우적우적 먹어 치우고 있었다. 준호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일행에게 짐승 같은 그녀를 가리켰다.


나은은 이 모든 광경에 전혀 동요하지 않고 카페 냅킨 위에 침착하게 스케치하고 있었다. 계산대의 주인아주머니가 모든 돈을 먹어 치웠을 때, 그녀는 고개를 꺾어 준호를 섬뜩하게 노려보았다. 야생의 맹수처럼 준호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민혁과 김 부장은 그녀가 달려든다면 언제든 맞서 싸울 태세가 되어 있는 듯했다. 그녀는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카페 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민혁과 준호는 카페 문밖으로 따라 나와 그녀가 어디로 향하는지 바라보았다. 그녀의 비명은 바다 너머의 허무한 어둠 속으로 점점 희미해져 사라질 뿐이었다. 민혁과 준호는 카페로 돌아왔다.


나은 : 어디로 갔어?

민혁 : 바다 반대편으로 소리 지르면서 미친 듯이 뛰어갔어.

나은 : 우리도 따라가야 할까? 그쪽으로? 따라가면 뭔가 나오지 않을까?

김 부장 : 미친 여자잖아.

나은 : 여기 안 미친 사람이 누가 있어요?

김 부장 : 내 말은, 저 사람보다는 멀쩡해 보이는 뱃사공 말을 따르자는 거지.

나은 :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집에 갈 수 있다는 게 무슨 뜻인데요?

김 부장 : 그걸 알아내려고 지금 여기 앉아 있는 거 아니야.


나은과 김 부장의 언쟁에는 준호는 사실 큰 관심이 없었다. 준호는 오직 민혁의 주머니에 있는 돈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탐욕이 아닌 강렬한 호기심이었다. 준호는 민혁에게 물었다.


준호 : 너 그렇게 많은 돈은 다 어디서 났어?

민혁 : 장난치냐? 돈이 어디서 나기는. 담배 하나 피울래?


민혁은 주머니에서 담뱃갑과 라이터를 꺼냈다. 이내 민혁의 담배를 물은 준호는 더 이상 질문을 이어갈 수 없었다. 그는 이 초현실적인 공간에서 허락된 실내 흡연에 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가 왔던 그곳에서 처럼. 준호는 침묵을 지키는 승훈에게는 마음껏 질문해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다.


준호 : 승훈아, 어제는 여행 갈 준비 했지?

승훈 : 응.

준호 : 그 전날은?

승훈 : 그 전날? 그 전날….


승훈이 생각에 잠겨 길게 침묵했을 때, 카페의 문이 열렸다. 화려하게 치장했지만 어딘가 광기에 찬 젊은 남녀 한 쌍이 들어섰다. 그들은 천천히, 굶주린 듯 민혁에게 다가왔다. 민혁의 일행은 숨죽인 긴장에 침묵을 지켰다. 젊은 남녀는 시계와 반지, 주머니의 온갖 번쩍이는 보석과 잡동사니를 꺼내었다. 남자가 민혁에게 조용히 물었다.


남자: 저…. 혹시, 그거 있죠?


민혁은 당황했다. 그들이 정확히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의 주머니에는 담배와 라이터, 현찰이 전부였다. 그는 말없이 테이블 위에 담배와 라이터를 올려두었다.


남자: 이거 말고….


민혁은 주머니의 5만 원권 두 장을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남자: 저희 이거 다 드릴게요. 시계, 목걸이랑 주머니에 있는 거 전부요.


민혁의 동의와 동시에 젊은 남녀는 카페 주인이 그랬듯 지폐를 찢어 먹었다. 그들은 환호와 비명이 섞인 소리를 지르며 어둠을 향해 미친 듯이 뛰어갔다. 그들의 환호는 클럽의 소음을 담고 있었다. 나은은 테이블에 놓인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금은보화를 냉정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나은: '쓸모 있는 인간'이 되라고 했지, 뱃사공이? 민혁아, 우리 이 물건들 전부 다 뱃사공한테 주면 어떨까?


술에 취한 듯 붉어진 얼굴과 화려한 복장의 젊은이들은 그 후로도 계속해서 카페를 찾아왔다. 민혁은 그들이 먹을 돈을 대가로 받은 잡동사니들을 자신의 코트 안에 집어넣었다. 뱃사공에게나 자신에게나 당장은 필요가 없는 피리는 승훈에게, 붓과 종이는 나은에게 주었다. 민혁에게는 점점 더 복잡한 걱정들이 생겼다.


민혁 : 이렇게 돈을 다 써도 되는 걸까? 게다가 뱃사공이 돌아올지 어떻게 알아? 뱃사공은 어디서 찾아야 하지?

나은 : 우리가 처음에 그 사람을 어떻게 찾았지?

민혁 : 준호 말을 듣고 해안가를 따라갔잖아. 준호야, 다시 한번 그 사람을 찾을 수 있겠어?


말문이 막힌 승훈에게 수많은 질문을 쏟아내던 준호는 민혁에게 대답했다.


준호 : 내가 마법사도 아니고 어떻게 찾아.


답이 없는 승훈에게 괜한 성질이 난 준호는 민혁에게 화를 냈다. 민혁에게 미안함을 느낌과 동시에 다시 한번 예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오른쪽 귀였다.


준호 : 잠깐만, 어쩌면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들은 양손 가득 잡동사니들을 들고 준호를 따라 카페를 나섰다. 그들의 눈앞에 분홍 스웨터를 입은 마른 남자가 민혁에게 돈을 구걸하려는 듯 서 있었다. 그는 붉은 뿔테 안경을 민혁에게 건네며 돈을 갈구했다. 민혁은 그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거래를 거부하는 민혁과 분홍 스웨터의 남자가 언쟁을 벌이며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김 부장은 그런 그들을 말린 후 분홍 스웨터의 남자를 돌려보냈다. 그 남자는 후회할 것이라며 민혁을 협박한 후 어둠 속으로 떠나갔다.


김 부장 : 그렇게 욕까지 할 필요는 없었잖아.

민혁 : 뭔가 재수가 없는 인간이어서요. 게다가 붉은 안경을 뭐에다 써요?

김 부장 : 그럼 피리나 붓은? 목걸이는 필요해? 여기서?

민혁 : 일단은 준호나 따라가죠.


그들은 해안가의 오른쪽을 향해 걸어갔다. 그들의 걸음걸이에서 주머니 속 물건들이 찰랑이는 소리가 들렸다.누군가 들었다면 잔잔하고 따뜻한 바다에 파도가 돌아왔다고 착각했을 것이다. 준호는 가까워지는 예슬의 목소리를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목소리가 가까워졌을 때, 익숙한 나룻배와 붉은 천을 입은 뱃사공을 볼 수 있었다. 준호는 미소를 지으며 일행을 돌아보았다. 어쩌면 이제 정말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여기가 어디인지, 이들이 자신을 왜 기억하지 못하는지 모두 상관이 없었다. 집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민혁은 자랑스럽게 나룻배 위로 그의 낡은 코트를 털어내었다. 온갖 금은보화와 잡동사니가 그의 주머니에서 쏟아졌다. 붉은 천 속에서 뱃사공의 냉소적인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뱃사공 : 쓸모 있는 인간이 되라고 했더니, 쓸모없는 것들을 모아서 뱃값을 치르려 해?


준호와 일행은 어둠으로부터 다가오는 배고픔과 갈증에 성난 군중의 환호와 비명을 들을 수 있었다. 붉은 안경의 남자는 민혁을 노려보며 군중을 선동했다. 미쳐 날뛰는 군중은 점점 가까워졌다. 민혁은 자신의 바지 주머니에서 라이터와 담배를 꺼내 준호에게 건넸다. 가장 먼저 상황을 파악한 듯, 민혁은 미소를 지었다. 그에게 뾰족한 수가 있는지 준호는 알 수 없었다.


민혁 : 내가 유인해 볼게. 뱃사공에게 말을 좀 잘해서 출발할 준비를 해줘. 알았지?


민혁은 주머니에서 남은 5만 원권 몇 장을 꺼내 들어 그들을 향해 흔들었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남녀들과 카페의 아주머니, 분홍색 스웨터를 입은 남자까지. 그들은 마치 폭력이란 달콤한 환각에 빠진 군중과도 같이 민혁을 향해 진격했다. 민혁은 어린 시절 친구들과 함께 소독차를 향해 달리던 희미한 기억을 떠올렸다.

'소독차는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민혁은 돈을 머리 위로 흔들며 배의 반대편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바닥에 현금을 뿌리며 많은 무리를 따돌린 민혁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그의 주머니에는 먼지 보푸라기 외에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었다. 카페의 불빛 아래에 선 민혁은 배에 타서 그를 기다리는 일행에게 손짓을 보냈다. 먼저 가라는 그의 손짓은 이내 달려드는 군중들에게 파묻히며 피가 튀었다. 뱃사공은 민혁의 뼈와 살이 발라지는 끔찍한 모습을 일행에게 보여주지 않았다. 뱃사공은 배를 밀어내어 등 뒤의 차가운 바람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


나무로 만든 작은 배에 앉은 그들은 아무런 이야기도, 어떤 표정도 짓지 않았다. 준호는 더 이상 자신이 누구인지, 이곳이 어디인지 신경 쓰지 않았다. 배는 산봉우리가 있는 섬을 향하고 있었다. 준호는 멍하게 어둠을 응시했다.

'이곳에는 왜 해가 뜨지 않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