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둡고 미지근한 바닷물 위를 미끄러지는 배 위에서 나은은 뱃사공에게 성큼 다가갔다.
나은 : 이건 불공평해.
뱃사공 : 뭐?
나은 : 음악이 아름다운지, 아름답지 않은지는 주관적인 문제야. 왜 당신이 그걸 결정하지?
뱃사공 : 오직 나만이 너희를 집으로 돌려보내 줄 수 있으니까. 아니면 얼어 죽던가.
나은이 뱃사공에게 따지고 있을 때, 김 부장은 준호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김 부장 : 뱃사공의 게임에 우리가 놀아나야 할 필요가 있어?
준호 : 무슨 소리예요?
김 부장 : 밀어버리자. 우리가 배의 노를 잡는 거야.
준호 :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모르잖아요.
김 부장 : 너는 어떻게 확신해? 뱃사공이 정말 약속을 지키고 우리를 집으로 보내줄까?
준호와 김 부장은 속삭임을 멈추고 나은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나은은 뱃사공에게 날카로운 목소리로 대응했다.
나은 : 그러면 다음 게임은 내가 결정하게 해 줘.
뱃사공 :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나은 : 내가 진다면, 민혁이나 승훈이에게 그랬듯이 나를 멀리 보내버려도 상관없어.
뱃사공은 흥미로운 듯 잠시 고개를 끄덕였다. 김 부장은 나은의 팔을 잡고 배의 꼬리 쪽으로 돌아왔다.
김 부장 : 나은아, 그렇게 혼자 독단적으로 결정하지 마.
나은 : 내 목숨 걸고 내가 하는 거예요. 아저씨랑 준호는 어차피 잃을 것도 없잖아요.
준호는 그들의 언쟁 속에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빛이 나는 것은 별들 뿐이었다. 이곳에 조금만 더 있다가는 시력을 잃을 것 같다는 강박은 어둠보다 진했다.
준호 : 나은이가 원하는 대로 해줘요.
나은은 뱃사공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배 위에서 중심을 잡는 것 조차 신경 쓰지 않았다.
나은 :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데려가 줘.
뱃사공 : 그다음은?
나은 : 내가 그림을 그릴게. 그곳의 사람들 반 이상이 그림에 만족하면 우리를 집으로 보내줘.
뱃사공 : 고작 머리를 쓴 게 그거야? 나 혼자 아름다운 게 무엇인지 결정하지 말라는 거지?
나은 : 그래. 그림에 만족한 사람들에게선 무엇이든 받아낼게.
뱃사공은 급하게 뱃머리의 방향을 바꾸었다. 빠르게 돌아가는 배에 김 부장과 준호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그들이 다시 정신을 차리고 바라본 정면에는 빛을 내는 작은 마을이 있었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만난 문명의 모습이었다. 준호는 인간이 만들어낸 빛이 반가웠다.
‘시골 같지만, 이번에는 항구와 가로등도 있으니 훨씬 낫겠군.’
뱃사공 : 저 섬에 몇 명이 있는지는 이미 알고 있어. 어떤 물건이든 20개 이상 받아오면 집으로 돌려보내 줄게.
나은 : 진심으로 약속해.
뱃사공 : 나는 거짓말한 적 없어. 사람들이 너의 그림에 만족해야 해. 거짓말이나 반칙할 생각은 없어?
나은 : 너처럼 편법을 쓸 바에 도전도 하지 않았어.
뱃사공은 항구의 나무토막에 배를 붙였다. 항구의 가로등엔 거미줄이 가득했다. 준호는 그런 모습이 괜히 정겨웠다. 그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이거를 피우면 2개밖에 남지 않네.’
뱃사공 : 곧 돌아올게. 열심히 해봐.
뱃사공이 떠난 항구에 셋은 멍하니 서 있었다. 항구는 술 냄새와 담배 냄새로 가득했다. 나은은 종종 급작스러운 선택을 내리곤 했다. 그 선택들은 그녀를 운명이 설계해 놓은 정확한 위치로 이끌었다. 김 부장은 담배를 피우는 준호를 바라보았다.
김 부장 : 나도 피웠던 것 같아. 이곳에 오기 전에.
준호 : 하나 줘요?
김 부장 : 응.
나은은 작은 마을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항구의 나무토막을 집어 들어 이젤의 흉내를 낸 것을 만들었다. 그녀는 민혁이 준 붓을 집어 들었다. 준호와 김 부장은 나은을 위해 항구 앞의 잡화점으로 향했다. 그곳의 문을 열자 온갖 사무기구와 플라스틱의 향이 진하게 풍겨왔다. 잡화점의 카운터에는 거대한 풍채의 여성이 앉아 있었다. 준호는 그녀의 진한 붉은 립스틱이 부담스러웠다. 물감과 도화지를 계산하는 준호는 생각을 숨기고 있었다.
‘사장님이 되게 무례하네.’
준호 : 사장님, 저희가 마을 주민분들 그림을 그려드리고 있거든요. 혹시 관심 있으면 그림 그려드릴까요?
항구 앞에 앉은 잡화점의 사장님은 증명사진을 찍듯 올곧은 자세로 앉아 정면을 응시했다. 준호와 김 부장은 그들의 옆에서 초조함에 나은을 바라보았다. 미간에 힘을 준 채 그림에 집중한 나은의 모습에 희망이 감돌았다. 항구의 가로등 아래에서 그림을 그리는 경치는 마을 주민들의 이목을 끌었다. 술에 취한 마을 주민들은 하나, 둘 밖으로 나와 그림을 그리는 나은과 잡화점 주인을 구경했다. 준호는 고민에 빠졌다.
‘붓을 잡은 지 꽤 시간이 되었는데, 그림을 확인해 볼까.’
준호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나은의 뒤에 서서 그림을 바라보았다. 당황한 준호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 준호의 표정을 본 김 부장은 불안을 느꼈다. 김 부장 역시 준호 옆에 서서 나은의 그림을 바라보았다. 김 부장은 다시 한번 진한 화장에 올바른 자세로 앉아 있는 잡화점의 사장을 바라보았다. 나은에게는 분명 재능이 있었다. 그녀의 그림 솜씨는 흠잡을 곳이 없었다. 그러나 뱃사공은 이야기했다. 사람들이 만족해야 한다고. 그녀의 도화지에는 잡화점 사장을 닮은 거대한 낙타 한 마리의 그림이 있었다. 김 부장은 나은에게 속삭였다.
김 부장 : 나은아, 정말 잘 그리기는 했는데, 이걸 보면 화를 내지 않을까? 우리는 사람들을 만족시켜야 하잖아 그렇지?
나은 : 보이는 대로 그리는 거예요. 아, 빼먹은 곳이 있네.
나은은 낙타의 입술에 진한 붉은색을 마침표처럼 찍어냈다. 그림을 받아 든 잡화점 사장의 얼굴은 화끈 달아올랐다. 항구에 술 취한 사람들은 그림과 여사장을 향해 폭소를 터뜨렸다. 여사장은 화가 난 채 떠났지만, 항구에는 자신을 그려달라는 사람들이 줄을 이루었다. 준호는 그런 광경에 웃음이 났다.
‘나은이가 잘하고 있는 거구나.’
나은이 그리는 인물 대부분은 낙타였다. 선인장을 씹는 낙타, 담배를 피우는 낙타, 넥타이를 맨 낙타. 술병을 들고 붉은 얼굴을 한 낙타. 많은 사람이 웃음을 짓고 만족했다. 이렇게 몇 명의 그림만 더 그린다면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김 부장은 그림의 대가로 받은 물건들을 정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술이나 담배, 무엇에 쓰는지 알 수 없는 알약 등. 대부분은 술병이었다.
문제는 늘 모든 것이 완벽하게 흘러갈 때 발생한다. 나은의 앞에 허름한 노숙자가 앉았다. 준호는 노숙자의 눈을 응시했다. 그 눈빛은 모든 것을 포기한 것 같으면서도 모든 것을 이겨낸 듯했다. 노숙자는 자유로웠다. 사람들은 냄새나는 노숙자 때문에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함에 화가 난 듯했다. 항구의 노숙자는 강한 인상을 주었다. 그는 마치 길가에 방치된 왕 같은 자세로 의자에 앉아 나은의 그림을 기다렸다. 김 부장은 자신이 받은 물건들을 세어보았다.
‘16개. 거의 다 술병이구먼. 여기 있는 사람들은 왜 이렇게 다들 취해 있는 거야.’
노숙자의 그림을 완성한 나은에게 준호는 지저분한 낙타의 그림을 기대했다. 나은이 건네준 그림 속에는 웅장하고 아름다운 사자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그림을 받아 든 노숙자는 무척이나 기뻐했다. 노숙자는 준호에게 무엇에 쓰는지 모를 열쇠 하나를 건넨 뒤 떠났다. 낙타와 바퀴벌레 등의 그림을 받아 든 항구의 사람들은 화를 내기 시작했다.
‘나는 술에 취한 낙타로 그리더니, 저 냄새나고 쓸모 하나 없는 인간은 사자로 묘사해?’
‘우리를 놀리는 거지?’
‘우리는 모두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라고, 너희 이방인들하곤 달라.’
심지어는 이미 건넨 술병을 되찾으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김 부장과 언성을 높이며 서로를 밀쳤다.
김 부장 : 그리는 사람 마음이지. 이미 받은 건 못 돌려주니까 다들 그렇게 아세요. 주정뱅이들이. 술에 취할 것이면 곱게 취할 것이지.
‘우리는 열심히 일한다고, 술에 취할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들은 뭔데? 남의 생김새를 갖고 놀리기나 하고.’
항구의 가로등에 거미줄은 그대로였다. 김 부장과 준호는 그림의 대가로 받은 담뱃갑에서 몇 개비를 꺼내 담배 연기를 뿜어냈다.
김 부장 : 열쇠까지 해서 17개.
준호 : 어떡하죠? 3명만 더 그리면 되는데.
김 부장 : 3명을 찾아도 자신을 그린 얼굴에 만족할지 모르잖아.
항구에 앉은 셋은 침묵에 잠겼다. 나은은 이내 준호의 팔을 잡고 의자에 앉혔다.
나은 : 준호야 너 그려줄게. 아저씨는 그다음이에요.
준호 : 이러면 뱃사공이 말한 것처럼 반칙 아니야?
나은 : 네가 진심으로 좋아하면 반칙이 아니지?
나은이 준호의 얼굴을 그리며 그에 대한 기억이 멀리 있는 향기처럼 스며들기 시작했다. 준호에게 받은 인상을 그리며, 준호의 과거를 알 수 있는 기분이었다. 그녀의 눈앞에는 어린 시절 동네에서 함께 숨바꼭질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준호의 어색한 미소에는 민혁과 함께 선생님에게 반항하던 중학교 시절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나은은 조금만 더 그림에 집중한다면 그의 기억에 닿을 수 있겠다는 직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는 친구의 과거보다는 현재에 집중하기로 했다.
나은 : 여기, 다 그렸어.
그림을 본 준호는 미소를 지었다. 잠옷을 입고 하품하는 게으른 사자. 용맹하고, 길들일 수 없지만, 게으른 사자의 모습. 준호는 거울을 보는 듯했다. 준호는 확신했다. 그녀가 민혁을 그린다면, 본인이 받은 그림과 같은 그림을 받았을 것이다. 준호는 자신의 주머니에 있는 민혁의 라이터를 답례로 건넸다.
김 부장은 어색하게 자리에 앉았다. 나은은 눈과 손목이 아프지도 않은 듯 다시 한번 그림에 몰입했다. 김 부장의 모습을 그리는 나은은 그녀의 자리를 찾은 듯 보였다. 준호는 호텔에 있던 나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나 준호는 알 수 없었다. 머릿속 나은의 모습이 꿈일지, 기억일지. 준호는 호텔에서 취해 길을 잃은 나은의 모습이 현실이라는 생각을 묻어갔다. 그림에 몰두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 그런 모습이 현실일 리 없었다.
김 부장을 그려내는 나은은 그에 대해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나은의 붓은 그려지는 대상의 심장박동을 따라 움직일 뿐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눈앞에 앉아 있는 김 부장의 심장은 뛰지 않는 듯했다. 그의 안경과 코트, 그는 분명 회사원이었을 것이다. 그에 맞지 않는 검은 운동화. 운동화를 신어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나은이 바라본 김 부장의 눈은 잠을 이겨내려는 투사의 눈과 같았다. 그녀는 진심으로 느낄 수 있었다. 저 남자는 강한 사람이다. 물론 살아온 세월이 많은 만큼 나은보다 겪은 일도 더욱 많을 것이다. 그가 내리는 잔인한 모든 판단이 모두 옳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틀렸다고 하더라도 분명 준호와 나은보다는 많은 근거를 토대로 내린 잘못된 판단이었다. 나은은 확신했다. 김 부장이 저 졸린 눈을 또렷이 뜨고 자신을 바라본다면 그는 그 무엇보다 무서운 존재일 것이다. 나은은 그가 잠에서 깨어나지 않길 바랐다.
나은 : 여기 다 그렸어요.
김 부장은 그림을 집어 들었다. 그의 눈빛은 또렷이 돌아왔다. 그러나 잔인함과 매서움은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잃어버린 마음을 되찾은 듯 보였다. 그가 들고 있는 그림 속에는 상처투성이의 사나운 사자가 있었다. 사자는 세상과 싸우며 살아왔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상처뿐이다. 김 부장은 그를 죽지 않게 만든 것들이 그를 강하게 만들었다고 믿고 살아왔다.
그러나 그는 알지 못했다. 그를 죽지 않게 만든 것들이 그에게 너무나 큰 상처들을 남겼다. 상처는 곪고, 감염되어 그의 마음을 갉아먹어 왔다. 그림 속 피 흘리며 죽어가는 사자의 눈에는 아직 해일 같은 분노가 남아 있었다. 사자는 졸린 낙타의 눈을 하고 있지 않았다. 김 부장은 그걸로 만족했다. 그는 답례로 자신이 입고 있던 코트를 나은의 어깨에 걸어주었다.
준호 : 아저씨 다른 건 없어요? 얼어 죽어요.
김 부장 : 어차피 나은이 덕에 우리 모두 집으로 돌아갈 텐데 겉옷이 왜 필요하겠어.
준호 : 아저씨 코트까지 19개예요. 나은이가 본인의 모습을 그리는 건 안 되겠지?
김 부장 : 그린다고 해도, 자신의 물건을 자신에게 주는 건 뱃사공이 분명 인정하지 않을 거야. 우리 그림을 그린 것도 이미 반칙처럼 느껴지는데.
준호 : 나머지 하나는 어디서 구하죠.
김 부장은 불이 꺼지는 잡화점을 바라보았다.
김 부장 : 나은아, 잡화점 여사장의 그림을 다시 그려보는 건 어때? 무조건 그녀가 마음에 들만한 그림을 그리는 거야. 엄청난 미녀를 그리는 거야.
나은 : 다시 그린다고 하더라도 뚱뚱한 낙타를 그릴 거예요. 저는 보이는 데로 밖에 그리지 못해요. 아마 그래서 화가가 되지 못했나 봐요. 제가 온 곳에서.
준호는 몇 개의 가로등만이 빛나는 텅 빈 항구의 거리를 응시했다.
‘어쩌지, 당장 뛰어다니며 한 명을 더 찾아야 하나.’
밤하늘의 별빛은 바다 위 붉은 천을 입은 뱃사공을 비추었다. 뱃사공이 도착하기 전에 얼른 한 명을 더 찾아야 했다. 그가 만족할 그림을 그려야 했다. 아무런 걱정이 없는 듯 앉아 있는 나은이 말했다.
나은 : 걱정하지 마. 나한테 생각이 있어.
준호 : 뭔데?
나은 : 안 알려줄 거야. 혹시나 그 자식이 반칙이라는 소리를 하면서 나를 죽인다면, 너랑 아저씨는 모르고 있는 게 나을 거야.
뱃사공은 항구에 정박해 노를 내려놓았다. 생명이 남아 있지 않은 듯한 그는 고개를 돌려 항구 바닥 위의 술병과 잡동사니를 살폈다. 뱃사공은 배에서 내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은은 젖은 나무로 만든 이젤과 붓을 들고 뱃사공의 배로 뛰어내렸다.
뱃사공 : 19개. 넌 집에 가지 못해.
나은 : 알아. 마지막 하나의 그림은 너야.
뱃사공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뱃사공 : 나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너는 집에 돌아가지 못해.
나은 : 알겠으니까, 가만히 있어.
배는 바다의 물결에 의해 항구에서 조금씩 멀어졌다. 항구의 끝자락에 앉은 준호와 김 부장은 그들이 무슨 대화를 하는지 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분명히 볼 수 있었다. 나은은 뱃사공의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뱃사공이 마음에 든다고 할 리가 없잖아.’
가로등 아래, 김 부장은 나은이 그려준 본인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듯 배 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준호는 그런 그를 보며 어떻게 이렇게 무관심할 수 있는지 의아했다. 깊은 어둠에 오기 전, 자신만이 갖고 있던 기억을 고백할 기회를 점점 잃어가는 준호였다.
준호 : 아저씨, 이거 다 제 잘못 같아요.
김 부장 : 뭐가?
준호 : 우리가 여기에 있는 거요. 기억은 나지 않지만, 저의 잘못 같아요.
김 부장 : 네가 기억하지 못하면 네가 잘못한 게 아니지.
준호 : 어째서요?
김 부장 : 네가 기억하지도 못하는 일로 벌을 받으면 얼마나 억울하겠어.
준호 : 그래도, 기억나면 말할게요.
김 부장 : 그래.
배의 위에선 나은은 숨조차 쉬지 않는 뱃사공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그녀의 붓질에는 막힘이 없었다. 어떤 후회도, 계획도 없어 보이는 붓질을 마친 그녀는 미소를 띠었다. 그녀는 그림을 꺼내 뱃사공에게 건넸다.
나은 : 자, 가져.
뱃사공의 얼굴은 붉은 천에 가려 볼 수 없었지만, 그는 분명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뱃사공은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뱃사공을 그렸다는 그림에는 마을의 위, 하늘을 비행하는 한 마리의 용이 있었다. 붉은 날개의 웅장함은 그 용이 이곳의 지배자임을 암시했다. 그 누구도 반대하거나 맞설 수 없는 신비로움과 힘을 갖은 용은 구름을 삼키며 비상하고 있었다. 뱃사공은 깊은 침묵에 잠겨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이내 뱃사공은 나은에게 노를 건넸다.
뱃사공 : 자, 20번째 잡동사니다.
나은 : 약속대로 집으로 돌려보내 주는 거지?
뱃사공 : 그래. 게다가 선택권도 하나 주지.
나은 : 무슨 선택권?
뱃사공 : 항구의 저 두 남자와 함께 떠날 것인가, 아니면 그들의 기억까지 함께 갖고 떠날 것인가?
나은 : 그게 무슨 소리야?
뱃사공 : 저들의 기억을 되찾아 주는 거야. 물론 너의 기억은 당연히 되찾을 권리가 있지. 아니면 항구의 두 바보와 집으로 돌아가던지, 기억을 되찾은 그들과 돌아가던지.
나은 : 집으로 돌아가면 모두 기억을 되찾게 되는 것 아니야?
뱃사공 : 네가 입은 코트와 주머니 안의 라이터는 마을 주민의 것일까?
나은은 깊은 고민에 잠겼다.
‘집으로 돌려보내 준다는 약속은 사실인 것 같은데…. 저들의 기억은 돌려주지 않겠다고? 뱃사공의 말을 들을 필요가 있을까? 이곳에서 빠져나가기만 한다면, 그걸로 된 것 아닐까? 아니지, 어차피 빠져나갈 것이라면 굳이 잃어버린 기억을 두고 올 필요 없지. 선택권 또한 준다고 말했어, 그렇다면 기억까지 되찾는 게 확실히 이득이야. 왜 선택할 수 있게 해주는 거지? 뱃사공을 믿어도 될까? 분명 함정이 있을 거야. 민혁이에게 그랬듯이, 승훈이에게 그랬듯이. 아니야, 괜히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 준호와 아저씨는 분명 본인들의 기억을 되찾고 싶을 거야.’
나은은 뱃사공의 꾀에 넘어가지 않겠다는 강한 마음가짐으로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입술을 꼬집으며 퍼즐의 답을 찾던 그녀에게 계책이 떠오른 듯 보였다.
나은 : 그들의 기억도 가져갈 거야. 그런데 그전에 나에게 먼저 보여줘, 그들의 기억을.
뱃사공 : 좋을 대로 해. 노는 너의 것이니까.
항구의 끝자락에 앉은 준호와 김 부장은 어째서인지 고민에 빠져 있는 나은을 바라보기만 했다.
준호 : 뱃사공이 그림에 만족한 것일까요?
김 부장 : 그렇다면 나은이는 뭘 저렇게 고민하는 거지?
준호는 자신을 향해 서서히 고개를 돌리는 나은의 얼굴을 보았다. 붉어진 얼굴에는 눈물이란 얼룩이 묻어 있었다. 그녀는 준호에게 경멸이 담긴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에는 분노 역시 담겨 있는 듯했다. 준호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혼란을 느꼈다.
민혁이 떠올랐다. 준호는 민혁이 어디에 있는지, 민혁에겐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생각했다.
‘혹시 나은이가 민혁이랑 승훈이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들은 걸까? 왜 나은이는 화가 나 있지? 왜 울고 있지? 뱃사공이 또 무슨 짓을 한 거지?’
김 부장을 바라보는 나은의 눈빛에는 공포가 가득했다. 마치 잠시라도 함께 있을 수 없다는 듯한 공포의 눈빛. 다가갈 수 없는 무엇을 보았을 때의 눈빛. 김 부장은 나은의 공포 섞인 눈물을 감정 없이 바라봤다.
준호는 배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믿을 수 없었다. 뱃사공은 손님처럼 배의 끝자락에 앉았다. 나은은 배의 머리로 향해 강하게 노를 젓기 시작했다. 배는 항구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준호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는 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준호 : 아저씨, 나은이가 혼자 돌아가는 걸까요? 어떡하죠?
김 부장은 항구의 바닥에 놓인 술병을 하나 집어 들었다. 준호는 그가 포기했음을 직감했다.
준호 : 아저씨, 말 좀 해봐요.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예요.
김 부장 : 나은이가 가는 방향을 잘 봐둬. 절대 잊지 마. 뱃사공은 분명 돌아올 거야.
준호 : 돌아온다고요? 어떻게 알아요? 그리고 뱃사공은 돌아온다니, 나은이는 돌아오지 않는 거예요?
김 부장은 조용히 자신이 마시던 술병을 준호에게 건넸다. 희한한 술이었다. 어둡고 따뜻한 이곳의 바닷물이 섞여 있음이 분명했다. 그의 혀에 닿는 순간 술을 마시는 과거 준호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준호는 바다를 향해 호텔의 향이 담긴 술을 뱉어냈다. 다시 술병을 받은 김 부장은 술을 마시며 떠나가는 나은을 바라보았다.
나은은 어느새 수평선에 닿을 듯 멀어지고 있었다.
김 부장 : 지금 나은이 머리 위에 별을 잘 봐둬.
준호는 나은의 머리 위의 별을 바라보았다. 노란빛을 내는 날카로운 별. 별이 반짝인 순간 준호는 다시 나은의 배로 눈을 돌렸다.
김 부장 : 무조건 저 별을 향해 전진하는 거야. 저 방향이야.
준호 : 저희는 배도, 아무것도 없는데요.
김 부장 : 걱정하지 마. 뱃사공은 돌아올 거야.
준호는 파도가 담긴 남자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물결에는 변화를 향한 갈망이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