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goes around... Ⅲ

by 박규동


최근 나은에게는 즐거움이 없다. 출근을 위해 화장을 고치는 거울 앞, 그녀는 한숨만 내뱉을 뿐이었다. 꿈도, 자신이 원하는 직업도 없는 그녀에게 일상은 지루했다. 어쩌면 그녀가 이상주의자인 걸까. 매일 9시에 출근하고 7시에 퇴근하는 삶의 반복을 더 이상 견디기 힘든 나은이었다. 슬픈 얼굴에 마침표를 찍듯 립스틱을 바른 후 나은은 집을 나섰다.


겨울의 바람은 그녀를 버스 정류장으로 강하게 밀어냈다. 나은은 정류장에 모인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믿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죽을 때까지 평생 9시에 출근하고 7시에 퇴근하는 거라고? 나도 그중 한 명이고?'


버스는 발 디딜 틈 없이 혼잡했다. 매일 아침, 사람들 사이에 끼어 중력에 흔들렸다. 일주일의 5일. 다섯 번의 출근과 퇴근은 늘 같았다. 그녀가 싫어하는 일을 하기 위해 그녀가 싫어하는 버스에 타야 했다.

'이건 인권침해야. 동물원의 사자, 원숭이들도 나보단 낫겠다.'


버스에서 내린 나은은 내려 회사를 올려다보았다.

'왜?'


그녀는 본인이 왜 일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 회사를 관두고 새로운 직장을 찾을 용기는 없었다. 이곳에서 보낸 시간에 얻은 기술이나 능력은 없었다. 게다가 가족의 눈치를 피하기 위해선 차라리 회사에 있는 게 나았다.


차갑게 얼어붙은 콘크리트 빌딩에 그녀는 들어섰다. 다시 한번 엘리베이터 안 인간들에게 찌그러진 후, 그녀는 사무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사무실에 가득한 플라스틱 향. 몇 년째 같은 아침이지만 공평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녀는 마케팅이 무슨 일을 하는 것인지 아직도 알 수 없다. 그런 일을 몇 년째 해내고 있다.

자리에 앉아 한숨을 돌리려는 찰나, 거대한 얼굴의 김 과장이 나은에게 다가왔다. 과하게 덧칠된 하얀 화장, 붉은 립스틱, 거대한 풍채. 그녀의 존재 자체가 나은에게는 스트레스였다.


“나은 씨. 거래처에서 아직 연락 안 왔어요?”

“제가 지금 와서요. 확인해 볼게요.”

“빨리 좀 부탁드려요.”


'저년만 죽으면 회사 생활이 조금 편해질 텐데.'


나은은 급하게 메일을 확인했다. 그녀를 찾는 메일은 없었다. 거래처와 이메일을 주고받다 보면 어느새 점심시간이 찾아온다. 회의실에서 간단히 식사하는 직원들은 신입 여직원의 결혼 이야기로 바빴다. 나은은 괜히 화가 났다. 본인보다 훨씬 못생긴 김 과장도, 사회 초년생인 신입도 사랑에 빠지고 결혼에 성공했는데. 식사를 마친 후, 화장실에서 이를 닦는 나은은 자신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걱정에 빠졌다.

중학교 시절, 같은 반 친구였던 민혁이 자주 했던 농담이 떠올랐다.


'포기하면 문제 해결이야.'


그녀는 매일 포기했다. 그날 하루 역시 포기했다. 회사에 몸을 던진 후 시간을 확인하는 것을 포기했다.

역시 포기하면 문제 해결이다. 그녀는 퇴근 시간이 되자마자 쏜살같이 건물에서 빠져나왔다.


찬바람이 그녀를 맞이했다. 버스를 타러 가는 길, 그녀는 도시의 건물들과 매달린 간판들을 바라보았다.

영어 학원, 자격증 학원, 미용실. 모든 곳에 그녀의 발자국이 닿은 듯했다. 그녀에겐 간판의 이름을 읽는 버릇이 있었다. 학원도 다녔고, 자격증도 땄고, 예전 남자친구에게 잘 보이려고 갔던 미용실도 저기에 있고.


그녀는 버스에 타고 싶은지, 버스에 치이고 싶은지 고민에 빠졌다. 정류장에 몰려있는 사람들을 보자 한숨부터 나올 뿐이었다. 그녀는 컨베이어 벨트 위의 부품과 같이 버스에 올라탔다. 다시 한번 인간들에게 압축당하는 그녀는 생각했다.

'나는 분명 전생에 죄를 지은 게 분명해.'


지난 몇 년간 그랬듯이 자신이 내릴 차례가 오기까지 기다려야 했던 나은이었다. 어째서인지 고장 난 로봇처럼 그녀는 쳇바퀴를 벗어났다.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일단 버스에서 벗어났다. 그녀가 버스의 벨을 누른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내린 골목은 담배 냄새와 술 냄새로 가득했다. 겨울의 밤하늘, 담배 연기는 구름을 대신했다. 술집의 간판들은 별과 달을 대신했다. 겨울의 추위와 인간들의 소음은 달콤하지 않은 조합이었다. 생각 없이 골목을 걸어가던 그녀는 반가운 얼굴을 발견했다.


"예슬아!"


얼마 만일까. 16년? 17년?


중학교 시절 나은은 조용한 아이였다. 공부를 아주 잘한 것도 아니지만 절대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았다. 그런 그녀는 가끔 학교에 가지 않는 상상을 했다. 수업 도중에 도망을 치는 상상. 같은 반의 예슬이는 마치 나은이의 꿈을 사는 아이와 같았다. 문제아보다는 개구쟁이라는 단어가 어울렸던 아이. 곱슬머리와 큰 안경. 나은은 예슬의 예술가다운 모습이 부러웠다.


예슬이 중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이후 둘은 한 번도 대화를 나눠 본 적이 없었다. 그날 겨울 밤거리에서 본 예슬의 모습엔 아직 중학생 시절의 모습이 남아 있었다. 곱슬머리와 큰 안경, 작은 체구에 맞지 않는 거대한 코트. 예슬의 이름을 외치고 나은은 생각했다.

'나도 예슬이처럼 중학교 때 모습이 남아 있을까?'


예슬은 반가운 표정으로 달려와 나은을 안았다. 아마 그때가 나은이 그날 처음으로 웃었던 순간일 것이다.


“예슬아 너 왜 이렇게 이뻐졌어? 한국은 언제 왔어? 나는 너 평생 미국에서 사는 줄 알았어.”

“너무 반갑다. 한국 들어온 지 꽤 되었지. 한국에서 일하는 경험도 좀 필요할 것 같아서. 근데 너는 여기서 뭐 해?”

“나?”


'나는 여기에서 뭐 하고 있지? 요즘 어떻게 지내냐는 질문인가? 아니면 지금 이곳에서 뭐 하고 있냐는 질문일까? 둘 다 적당한 답이 없는데.'


“나는 퇴근하는 길이지. 친구들하고 술 마셨나 봐?”

“마시고 이제 집에 가려 했는데. 우리 같이 한잔 하자. 어떻게 살았는지 좀 알려줘.”


예슬은 나은이 대답도 하기 전, 팔짱을 낀 후 가까운 바로 빠르게 걸어갔다. 그들은 시끄러운 바의 구석, 가장 조용한 자리에 앉았다. 나은은 바에서 나는 단내와 오래된 나무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끈적하고 더러운 메뉴판을 건넨 예슬의 손은 고왔다. 실내의 온기는 나은을 녹여내었다. 녹아가는 과정에 섞인 와인은 그녀를 더욱 취하게 했다.

'이렇게 많이 마실 생각은 없었는데.'


나은은 핸드폰에 가득한 강아지 사진을 보여주던 예슬에게 옛날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중학교 때 아직 연락하는 애들 있어?”

“음…. 준호?”


준호의 이름에 반가움이 솟았지만 그 이상은 묻기 어려웠다. 그녀 역시 준호의 집안 가세가 기울었다는 뉴스를 본 적 있었다. 준호의 어려워진 삶의 이야기로 분위기를 우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나은이었다. 그녀의 머리에 민혁이나 다른 몇 명의 이름이 떠오르기도 했지만 물어볼 수 없었다.

'예슬이는 어떻게 나이를 하나도 안 먹었을까.'


“예슬아 너는 남자친구 있어?”

“많지.”


나은은 웃음을 터뜨렸다.


“많아? 그럼 그중 한 명만 소개해줘. 그러면 결혼 생각은 있어?”

“아직은 없어. 아마 계속 없을 것 같긴 한데, 뭐 나를 엄청나게 사랑해서 죽겠다는 사람이 나타나면 한번 해볼 만도 하겠지? 너는?”

“나는 작년에 헤어졌어.”

“왜?”

“누가 결혼 얘기를 꺼냈는지, 누가 싫다고 했는지도 모르겠는데. 결혼 이야기하다 보니 남이 되더라고.”


예슬은 남은 술을 나은의 잔에 비우며 자신감 넘치게 그녀를 위로했다.


“너는 이쁘니까 금세 또 너 좋다는 사람들이 나타날걸? 게다가 결혼 생각을 굳이 해야 하나? 너 혼자로서 즐겁게 살면 그만이지.”


나은은 예슬이 건네준 잔을 비운 후 한숨 쉬듯 이야기했다.


“그게…. 요새 재밌는 게 없어.”

“그러면 하고 싶은 건?”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없는 게 문제야.”

“내가 볼 땐 네가 하고 싶은 게 없는 게 아니야.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거지.”

“정말?”

“응. 이번 주 금요일에 뭐 해?”


언제인지 모르게 술값을 계산한 예슬을 따라 나은은 다시 한번 차가운 거리로 나섰다. 택시를 기다리는 나은은 담배를 피우고 있는 예슬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예슬에게는 나은에게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중학교 때처럼, 나은은 다시 예슬이 되고 싶어졌다.


“나도 하나 피워보면 안 돼?”


예슬은 술에 취해 말을 얼버무리며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


“이걸 끊어야 하는데. 그런데 굳이 그 고생을 하면서 끊어야 하나 싶고. 이거 하나 안 핀다고 인생이 달라지나. 담배를 끊으면 인생에서 즐거움이 하나 사라지는 건데….”


나은은 예슬이 하는 말을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마치 마셨던 와인이 말로 다시 쏟아져 나오는 듯했다. 비틀거리는 예슬은 나은의 담배에 불을 붙여주었다. 그녀가 한 모금을 들이마시고, 예슬의 택시가 도착했다. 예슬은 나은의 볼에 키스한 후 택시에 몸을 던졌다. 나은은 마음속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나쁘지 않네? 겨울이랑 잘 어울린다. 그나저나. 누군가 나의 기도를 들어준 건가. 친구와 노는 게 이렇게 재밌는 건지 까먹고 살았어.'


따뜻한 택시에 몸을 싣자 나은은 벌써 금요일이 기대되었다. 숙취로 고생한 하루가 지나고, 평소와 같은 하루가 더 지난 후 금요일의 퇴근 시간까지 나은은 굳게 버텨냈다. 그날 역시 퇴근 시간이 되자마자 감옥 같은 사무실을 빠져나온 나은이었다. 그녀는 예슬과 노는 하루가 완벽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추위에 고생할 게 뻔했지만 멋진 가죽 재킷을 입고 향수를 뿌렸다. 그녀는 예슬을 보러 가는 길에 땀 한 방울 흘리기 싫었다.

그렇게 그녀는 택시를 타고 예슬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택시에서 내린 나은은 그늘진 건물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예슬을 보았다. 저번과 같은 모습이네. 본인만큼 꾸미지 않은 모습이 자유로워 보였지만 어째서인지 서운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은을 향한 밝고 활기찬 모습은 그날 역시 같았다.


“방금 퇴근했어? 그럼 배고프겠다. 밥부터 먹자.”


둘은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어두운 레스토랑에 들어섰다. 예슬은 점원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 듯 어두운 구석의 자리로 빠르게 걸어가 앉았다. 어두운 레스토랑. 나은은 발음할 수 없는 와인과 처음 보는 안주를 먹으며 인생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았다.


“가끔은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이 느껴져. 마치 영화 속 엑스트라라든가 게임 속 캐릭터처럼 말이야. 근데 내가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하면 많은 게 괜찮아.”

“뭐가 괜찮아?”

“싫어하는 일을 매일 하고, 외롭고, 과장한테 욕먹어도 상관이 없다는 생각이 들거든. 근데 문제는 또 가끔은 내가 모든 것이라고 느껴져.”

“모든 것?”

“응. 내가 전부인 거. 세상의 모든 것이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 같은 기분.”

“아무것도 아니면서, 전부이기도 한 거야?”

“그렇지? 마음에 병이 들었나 봐.”

“병이 아니야. 즐거움이 없을 뿐이지. 나가자!”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입는 예슬의 모습에 나은은 당황했다.

'와인은 아직 많이 남았는데.'


저번과 같이 예슬은 나은이 끼어들 틈도 없이 빠르게 계산을 마친 후 시끄러운 식당에서 빠져나왔다. 밖으로 따라 나온 나은은 담배를 문채 핸드폰을 바라보는 예슬의 옆에 섰다. 예슬은 이미 택시를 부른 듯 핸드폰을 확인했다. 나은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예슬은 나은의 입에 담배를 물려준 후 불을 붙여주었다. 나은은 웃으며 연기를 내뱉었다.


“어디가? 집에 가게?”

“아니. 나 미국에서 만난 친구들 소개해 줄게. 같이 가자.”

“안 돼. 나 어색한 게 제일 싫어.”

“거기서 미래의 신랑을 만나게 될지 어떻게 알아?”


나은은 그녀의 농담에 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농담은 나은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예슬이랑 같은 학교를 나온 친구들이라면, 분명 성공하고 잘생긴 사람들도 있긴 하겠지? 따뜻한 택시 안, 나은은 작은 두통을 느꼈다. 그녀는 택시 창문을 내리고 잠시 눈을 감았다. 바깥의 찬바람과 차분함에 두통은 사라지고 기분이 좋았다. 눈을 감고 바람을 맞는 나은은 생각했다.

'어디로 가는 거지. 지금은 다리 위를 달리고 있는 것 같네. 한강의 바람과 냄새가 느껴져.'


택시에서 내린 예슬은 나은의 손을 잡고 소음 가득한 인파에 섞였다.

그녀 앞에 늘어선 줄에 나은은 예슬의 귀에 소리쳤다.


“여기 뭐야? 클럽 줄이야? 나 클럽 가기 싫어.”

“안에 친구들이 있어. 앉아서 술만 마셔도 돼. 그나저나 데리러 나온다고 했는데 왜 안 나올까.”


나은은 클럽이 있는 호텔을 올려다보았다.

'저 호텔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면 어떨까? 그저 여기 줄을 선 이십 대 애들하고 다른 게 없어 보이려나?'


버스 정류장도, 회사도, 클럽을 기다리는 줄에도 사람은 너무 많았다. 시끄러운 음악 소리는 새어 나왔고,

모든 곳에선 담배 냄새가 났다. 예슬은 기다리는 연락이 있는지 핸드폰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때 나은은 호텔 로비에서 익숙한 얼굴을 보았다. 익숙한 얼굴이라기보다는 그 얼굴에 있는 흉터를 알아볼 수 있었다. 분명 승훈이었다. 승훈 역시 그녀를 본 듯했지만, 나은의 눈을 피했다. 술기운에 나은은 승훈에게 다가가 몇 마디 말을 걸었다. 대화가 이어지려는 참에 예슬은 나은의 팔짱을 꼈다.


“데리러 나왔다! 이제 줄 안 서도 돼. 들어가자.”


어두운 구멍 안으로 들어서던 나은은 뒤를 돌아봤다. 승훈은 같은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생각해 보면 중학교 때 승훈과는 한마디도 해보지 않은 나은이었다. 아이들이 승훈이를 무시하는 게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흉터 때문인지 아직도 바닥을 내려다보는 버릇이 남아 있는 게 신기하기도 했다.


“예슬아 잠깐만.”


나은은 급하게 클럽의 계단을 올라 로비에 있는 승훈에게 다가갔다. 그렇게 명함을 건네준 나은은 빠르게 지하의 어두운 구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녀는 최근 어떤 음악이 유행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음악 소리가 너무 큰 것이 걱정되었다.

'너무 시끄럽네. 귀에 문제 생기는 것 아니야?'


예슬은 나은의 손목을 잡은 채 점점 더 깊은 곳으로 향했다. 거대한 스피커 뒤에는 계단을 올라서야 닿을 수 있는 테이블이 있었다. 예슬은 그곳을 막고 있는 줄을 치워내며 테이블로 향했다. 잘생긴 남자들과 예쁜 여자들이 있었다. 그들이 건네는 술도 마셨다. 그러나 나은은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하나도 듣지 못했다. 예슬과 그들은 춤을 추지도 않았다. 그저 높은 위치에 있는 테이블에 앉아 술을 마실 뿐이었다. 나은이 할 수 있는 것은 가끔 핸드폰을 보며 술을 홀짝이거나 담배를 피우는 것뿐이었다. 예슬은 웃으며 나은에게 수제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


나은은 뜨겁고 찌그러진 담배 연기를 들이마셨다. 그녀가 경험해 온 담배와는 맛이 달랐다. 나은은 필터라고 하기엔 조잡한 담배의 구멍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담배를 5분 이상 바라보았고, 예슬은 그 모습이 웃기기만 했다. 나은은 기분이 좋았다. 예슬의 말이 맞았다.

'내가 원하는 것들이 없는 게 아니었어. 보이지 않았던 것이지.'


클럽의 음악은 점점 크게 나은의 가슴에 울렸다. 나은은 자신의 마음에서 해체되는 음악을 진심으로 느낄 수 있었다. 대학생 때 이후 이 정도로 음악에 빠진 기분은 처음일 것이다. 그녀는 예슬의 친구들이 권하는 위스키를 한 모금 들이마셨다. 나은은 위스키에서 이렇게 달콤한 향이 나는지 알지 못했다. 그녀는 기분이 좋았다. 예슬에게 고마움을 느낀 나은은 맥락 없이 예슬을 크게 끌어안았다. 테이블에 앉은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나은은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다시 한번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맞아. 내가 어렸을 때는 매일 이런 기분이었어. 유치원에 다닐 때 아니면 초등학생 때. 길에서 술래잡기해도, 친구의 집에서 함께 놀아도 분명 이런 느낌이었어. 그때는 왜 몰랐던 거지? 아니면 내가 까먹은 건가?'


예슬과 나은은 수제 담배를 나누어가며 들이마셨다. 취한 것인지 어떤 것인지 예슬은 나은에게 음악에 대한 철학을 설교하고 있었다.


“소리라는 게 결국 우리 몸이 진동을 감지하는 것이거든? 근데 어떤 진동은 우리를 울게 해.”


그녀를 울게 한다는 이야기에 나은의 머릿속은 슬픈 생각으로 가득 찼다. 본인의 나이 또래와 비교하면 발을 맞춰 나가지 못하는 자기 모습을 떠올렸다. 어쩌면 그녀가 부모님을 실망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그녀는 정말 잘하고 있는지. 그녀의 머릿속에는 슬픈 생각이 가득 찼다. 그러나 아직 그녀는 행복했다. 나은은 그것이 참 희한하다고 생각했다.

'분명 슬픈 생각들은 드는데 슬프지 않네? 우울한 전망이 있지만 지금은 행복해.'


나은은 어린 시절에 오븐에 손을 덴 경험을 떠올렸다. 뜨거운 것을 만지고, 손에 상처를 입고, 고통에 눈물이 나고. 지금의 그녀라면 다른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뜨거운 것을 만지고, 손에 상처를 입고, 그래도 행복한.

나은은 본인이 예슬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음을 자각했다. 다시 한번 예슬의 말에 집중했다.


“또 어떤 소리, 음악은 우리의 기분을 좋게 해. 심지어는 잊고 지냈던 기억이 떠오르기도 하지. 고작 진동 때문에? 믿어져? 결국 여기 있는 모두가 파동인 거야. 흘러 들어온 파동에 섞인 것뿐이지.”


나은은 스테이지에서 춤을 추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음악에 맞춰 움직이는 인간들의 육체. 나은은 물살에 흔들리는 호수 위의 나뭇잎을 떠올렸다. 나은이 생각에 잠겨 바쁠 때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은 외투를 들고일어나기 시작했다. 예슬은 나은에게 물었다.

“애프터 파티 갈래?”

“아니. 나 너무 졸려.”

“그래. 그럼 오늘은 들어가서 자.”


나은은 자신이 어떻게 택시 안에 있는지 마치 순간이동을 한 듯했다. 어찌 되었든 택시에 탔으니 집으로 가는 것이다. 택시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가는 그녀의 다리는 비틀거렸다. 그녀는 현관문을 열고 신발을 벗었다.

'우리 집 냄새가 이렇게 좋은지 몰랐어.'


그녀는 침대에 눕자마자 잠들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손을 씻거나 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드디어 즐거운 게 생겼어. 내가 원하는 건 회사 같은 바깥세상엔 없던 거야. 정말 좋은 하루였어.'



아침 해가 그녀의 눈가를 비추며 그녀는 잠에서 깼다. 이렇게나 잘 잔 기분이 얼마 만인지 기억할 수도 없었다. 그 어떤 숙취도 없었고, 꿈도 꾸지 않았다. 그녀는 만화 속 공주처럼 기지개를 켠 후, 거실에 나왔다. 소파에 털썩 앉은 나은은 천장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집에 부모님이 없어서 다행이다. 배가 고프다. 살아갈 이유를 찾았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다고 했다. 가끔은 잃는 게 있고 또 잃는 게 있기도 하다. 나은의 삶에는 분명 즐거움이 차올랐다. 겨울의 한파에 숨은 뜨거운 동굴에서 보낸 그날 이후 그녀의 삶은 달라졌다. 그녀는 매주 금요일, 예슬을 만나는 날이 기대되었다. 심지어는 금요일이 빨리 오지 않아 잠자리에 들지 못하고 식은땀이 나기도 했다. 금요일의 파티는 그녀에게 충분한 보상이 되었다.


그러나 파티가 시작된 첫날, 그녀는 실수를 저질렀다. 승훈에게서 계속해서 전화가 오기 시작한 것이다. 반가움에 서로의 안부를 묻는 첫 전화 이후, 나은은 그가 부담스럽기 시작했다. 회사 일을 핑계로, 친구들과의 만남을 핑계로 전화를 끊었던 나은이었지만, 이제는 그의 전화를 받지 않기로 했다. 언제부터인지 그녀는 참을성이 없어졌다. 승훈에게서 날아온 문자 메시지에 나은은 화가 폭발할 듯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뭐 해?”


나은은 그의 번호를 차단할지, 아니면 전화를 걸어 욕을 한 후 차단할지 고민에 빠졌다. 그러나 그녀의 화를 눈 녹듯이 녹여주는 문자 메시지가 예슬에게서 도착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뭐 해?”


녹은 화는 식은땀이 되어 흘렀다. 나은은 승훈에게 친구들과 파티가 있다고 대충 둘러댔다. 1년에 한 번 있는 크리스마스. 그날 파티는 엄청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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