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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에서 올라온 민혁은 오늘도 바쁘게 도심 속을 헤엄쳤다. 12월 안에 일자리를 구하겠다는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만만했다. 월세 이야기를 꺼내는 집주인에게도 오히려 당당하게 목소리를 냈다.
"걱정하지 마세요. 새해에는 다 낼 수 있어요."
눈을 녹이는 햇볕에 민혁의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크리스마스이브까지 며칠이나 남았지만, 그는 호텔 앞으로 향하는 날이 잦았다. 민혁은 호텔을 올려다보며 희망을 품었고, 줄곧 13층의 창문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날은 호텔 앞을 여유 없이 지나쳐야 했다. 그는 준호를 만났던 카페를 향해 골목으로 미끄러졌다.
카페 문을 여는 동시에 담배 연기와 준호의 향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친한 남자들은 인사에 익숙하지 않다.
“향수 좀 적당히 뿌려. 문에서부터 냄새나잖아.”
“너 옷이 하나밖에 없냐? 따뜻한 거 좀 하나 사 입어.”
“네가 돈 줄래? 맞아. 우리 그 일 처리하고 나면, 나는 따뜻한 코트 하나 사야겠어.”
준호는 담배를 문 채 카운터에 놓인 차갑게 식은 커피를 가져와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민혁은 그 모습에 웃음이 났다.
“여기 이제 사장님도 안 계시냐?”
민혁은 평소와 같이 준호의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조용하기만 한 겨울의 카페 안, 검은 옷을 입은 두 남자. 긴 머리와 수염의 민혁, 단정된 머리와 하얀 피부의 준호는 서로가 비슷하다는 친구들의 말에 늘 동의하지 않았다. 서로 닮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부분까지 둘은 닮았다.
'내가 인물은 쟤보다는 낫지.'
민혁은 의자에 등을 기대 천장 위로 담배 연기를 뿜었다.
“그래서 계획이 뭔데?”
준호는 주머니에서 작은 핸드폰을 꺼내 민혁에게 건넸다.
“선불폰이야. 그날은 이걸로 연락하자.”
“와, 존나 오래된 핸드폰이네. 요새 이런 걸 어디서 구해?”
“이태원에 널렸어. 이브 날 그 새끼들은 이틀에서 삼일 연속으로 놀 거야.”
“잠도 안 자고? 힘이 넘치나? 어떻게 이삼일 동안 파티하고 놀아?”
“나는 걔네들하고 계속 붙어 있을 거야.”
“너도 안 자고?”
“집중 좀 할래?”
“알았어.”
민혁은 자세를 고쳐 앉고, 담배 연기를 입가로 내뱉었다. 연기는 그들의 음모를 감추었다.
“너는 이브 날 걔네들이 클럽에 가기 전, 옥상으로 올라가 있어. 내가 눈치 봐서 돈이 있는 위치를 문자로 보내줄게.”
“그러면 13층으로 내려가서 돈을 쥐고 호텔 밖으로 나가면 그만이야?”
“아니. 그렇게 바로 쥐고 나가면 티 나지. 걔네가 돈이 있는 걸 자기들 눈으로 보고 나서 돈을 꺼내야지.”
“어차피 약쟁이들 돈이잖아. 신고도 못 한다며.”
“그래도 안 걸리는 게 좋잖아. 확실하게 하자는 거야.”
“그래. 네가 문자를 보내면 돈을 꺼내서 그다음은?”
“다시 옥상으로 올라가.”
“야. 나 얼어 뒤져.”
“옥상에 올라가서 돈을 숨겨둘 곳을 찾아봐.”
“옥상에 돈을 두고 오라고?”
“응. 무슨 이유에선지 13층에는 직원들도 가지 않으니까, 옥상에도 아무도 가지 않더라고.”
“그다음은?”
“그다음은 무슨 그다음이야. CCTV도 없고. 그 새끼들이 발 동동 구르는 동안, 이삼일쯤 지나서 돈 가져오면 그만이지.”
민혁은 미간을 찡그리며 담배를 든 손의 엄지로 눈썹을 긁었다.
“걔네가 너를 의심하지 않겠냐?”
“왜? 그날 나는 종일 걔들이랑 있을 건데.”
“네가 다른 사람한테 돈의 위치를 알려줬다고 생각할 수 있잖아.”
“나는 걔네들이랑 꾸준히 파티를 해와서 괜찮아. 그런데 크리스마스같이 큰 파티에는 손님들을 많이 부르거든. 분명 새로 온 손님들이 들락날락하면서 가장 의심받을 거야. 큰 파티의 새로운 얼굴들.”
“말은 되네.”
“간단히 말해서, 주인 없는 돈을 잠시 한 층 위로 옮겨두기만 하는 거야. 신고도 못 하는 돈을.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 우리는 그걸 가져오는 거지. 끝이야.”
민혁은 담배를 재떨이에 지지며 미소를 지었다.
“병신 같은 계획이긴 한데, 월세는 내야 하니까 해보자.”
두 남자는 커피와 재떨이를 계산대 위에 올려놓았다. 폐가 같은 카페에서 나온 두 남자가 향할 곳은 딱히 없었다. 둘은 길이라도 잃은 듯 도시를 걸었다. 날이 그렇게 춥지 않았기에 둘은 함께 걸을 수 있었다. 그들은 함께 김밥을 먹던 음식점 앞을 지나쳤다. 민혁은 유리 너머로 사장님에게 혼나고 있는 김밥집 직원 아주머니를 바라보았다. 아마 그의 어머니 나이 정도는 되어 보였다. 그분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몰라도 민혁은 마음이 좋지 않았다. 준호는 그런 민혁을 바라보며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이 서로에게 조금 더 친절하면 좋겠다.'
민혁과 준호는 길에 있는 돌을 차례대로 발로 차며 산책을 이어갔다. 그들이 하는 장난을 보면 아직 어린아이와 다름이 없었다. 단지 키가 커지고, 수염이 났을 뿐이다. 그러나 겨울은 그들에게 자비롭지 않았다. 민혁은 높은 빌딩을 바라보며 준호에게 말했다.
“내가 한 아홉 살 때인가? 내 꿈이 저기서 일하는 거였는데.”
“무슨 일?”
“몰라. 뭐, 대충 무역 같은 거.”
“네가 무역에 대해서 뭘 아는데?”
“아홉 살 때였다니까. 그때는 매일 아침 괜찮은 차를 타고, 괜찮은 직장도 가고, 저런 곳에 정장 입고 출근해서 일도 하고, 집에 돌아오면 아내도 있고 그럴 줄 알았지.”
준호는 웃으며 민혁에게 말했다.
“그러면 지금 지원해 봐.”
“대가리 총 맞았냐. 저기서 날 뽑아주게. 그냥 그때 생각했던 것처럼 되었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지 않았을까, 하는 소리야.”
“남의 떡이 커 보이는 거지. 저기 다니는 대기업 직원들도 다들 스트레스가 장난 아닐걸?”
“대기업은 상사들이 좀 더 친절하지 않냐?”
“나야 모르지. 다녀 봤어야지.”
더 이상 갈 곳이 없음을 느낀 준호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택시를 호출했다. 민혁은 장난스레 중요한 질문이 섞인 연기를 내뱉었다.
“절단기는 안 필요해?”
“필요 없어. 자물쇠 안 써.”
“간도 큰 새끼들이네.”
“다들 열쇠를 들고 다닐 수가 없으니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누구도 책임은 지기 싫다, 이거지. 고장이 나는 세탁기는 매번 바뀌어.”
그들은 다시 한번 강해지는 바람을 피해 골목으로 숨어들었다. 준호는 멀리서 다가오는 택시의 번호판을 확인했다. 민혁 역시 그에게 인사를 할 준비를 마쳤다. 준호는 도착한 택시 문을 열며 민혁을 바라보았다.
“그날, 너 핸드폰 가져오면 안 되는 거 알지?”
“알았어.”
“그리고 내가 준 핸드폰, 절대 먼저 연락하면 안 된다. 알았지?”
“알았어. 좀. 들어가라.”
“그래. 24일에 보자.”
걱정이 가득한 준호를 태운 택시는 멀어졌다. 민혁은 튼튼한 두 발을 이용해 집으로 걸어갈 차례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저녁, 그의 마음에는 두려움보다 설렘이 앞섰다. 언제나 범죄를 저지르는 순간보다는 계획할 때 기분이 더 안 좋았던 민혁이다. 어째서 이번에는 다른 기분이 드는지 고심하며 차가운 콘크리트 위를 걸었다.
'어차피 걔네가 경찰에 신고도 못 하니까 뭐. 그날 파티하는 건 확실하니까 돈은 거기에 있을 것이고. 혹시나 걔네가 다 같이 죽자고 자폭하면? 상관없어.'
'어차피 월세도 못 내는 거 다시 빵 안에 들어가는 게 최소한 따뜻하기라도 하지.'
이브의 오후, 24일의 저녁이 오기까지. 과장의 호출에 승훈은 호텔로 출근했고, 나은은 거울 앞에서 향수를 뿌렸다. 민혁은 얇은 코트 하나만을 걸친 채 지하를 벗어났다. 혹시라도 틀어질 상황을 곱씹으며, 그는 그저 빨리 해가 떨어지고 밤이 오길 바랐다. 그날 밤은 유난히 추웠고, 하늘의 별들마저 모두 얼어붙은 듯했다.
준호는 예슬을 포함한 친구들과 클럽 앞에 도착했다. 그들은 줄을 설 필요가 없었다. 준호의 표정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승훈과는 다른 모습으로, 준호의 마음 역시 죽은 지 오래였다. 거대한 스피커 뒤에 숨은 테이블. 준호는 그곳에 앉아 새로운 얼굴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예슬은 나은에게 문자를 보내느라 바빴다. 음악을 토해내는 기구 뒤에 숨은 그들은 테이블 위 잔을 채워갔다. 예슬은 준호에게 자신의 담배를 권했다.
“한입 해.”
“됐어. 다른 거.”
“벌써?”
“응.”
예슬은 그녀의 옷과 가방을 자리에 남겨둔 후 어두운 클럽에서 벗어났다. 준호는 술을 마시며 음악에 어깨가 흔들리는 시늉을 했지만, 그의 머릿속은 예슬의 발자국을 세기 바빴다. 그가 정확히 예상한 시간에 예슬은 자리에 돌아왔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새로운 술을 준비하는 직원에게 돈뭉치를 건넸다. 그녀의 손이 작아서일까, 돈은 더욱 거대해 보였다. 예슬은 바깥의 추위를 이겨내려는 듯 잔에 있는 술을 모두 목구멍 뒤로 넘겨냈다. 준호는 그런 예슬의 눈치를 살폈다.
“바깥에 사람 많아?”
“응. 정신이 하나도 없어. 춥지도 않나. 호텔 앞에 앉아 있는 애들 때문에 들어가기도 힘들었어.”
“수고했어.”
“수고는 무슨. 아 맞다. 조금 있다 나은이도 온다고 했다? 나은이 기억나지?”
“나은이? 중학교 때 임나은?”
“응.”
준호는 예상치 못한 전개에 당황했지만, 나은의 등장이 계획에 문제가 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1시쯤이 되었을까, 나은은 예슬을 향해 손을 흔들며 자리로 달려왔다. 준호와의 반가운 인사는 너무나도 짧았다. 준호는 오랜만에 보는 그녀가 자리에 앉자마자 연기를 내뱉는 것을 보았다. 예슬이 준비한 술은 준호와 나은의 모든 감각을 극대화했다. 테이블에 앉은 그들은 마치 클럽이 빠르게 움직이는 듯 테이블을 부여잡았다.
놀이기구에 탄 듯 빠르게 움직이는 밤, 그들은 초월적인 경험에 몸을 담고 있었다. 준호는 정신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귀를 뚫는 음악과 춤을 추는 사람들, 눈을 찌르는 조명. 연기와 차가운 술에 준호와 나은은 이야기를 나눌 틈조차 없었다. 준호는 다리를 떨며 손톱을 물었다. 그곳의 술을 나눠 마시는 모두가 그랬기에 의심받을 것은 없었다. 준호는 예슬의 귀에 속삭였다.
“이제 슬슬 올라가서 놀자.”
“벌써?”
왜 이렇게 서두르냐는 예슬의 말을 무시한 준호는 얼음이 섞인 잔을 들이켰다. 예슬은 나은의 귀에 말을 전달했다.
“애프터 파티 갈래?”
“그래!”
테이블 위에 남겨진 담뱃재와 술잔, 하얀 가루는 그날 밤 모든 것이 엉망이었음을 보여주었다. 클럽의 직원들은 그들이 떠남과 동시에 테이블을 치우기에 정신이 없었다. 그들이 호텔 로비에 도착했을 때 로비에는 클럽 손님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준호는 미소를 지었다.
'이러면 로비 CCTV를 확인한다 해도 상관없지.'
사람이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기 힘든 이유는 단 하루의 계획조차 그들의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기 때문이다. 로비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그들에게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은아!”
준호, 예슬 일행과 함께 있던 나은은 승훈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듯하였다. 준호는 불편함을 느낄 수 있었다. 애초에 인사를 나눌 사이도 아니지만, 준호 역시 승훈을 모른 척했다. 나은은 승훈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이 아니라 듣지 않은 것이었다. 나은은 급하게 준호의 팔짱을 끼었고, 그들은 서로 다른 거짓말을 내뱉었다.
“나은아 저기 직원이 너 부르는데?”
“제발 저 사람 쳐다보지 마. 그냥 못 본 척해.”
“누군데?”
“아무것도 아니야.”
예슬의 일행은 12층에 내려 계단 위 공사 중이라는 표지판을 걷어찼다. 그들의 웃음소리는 12층에서 13층으로 파도처럼 역류했다. 13층에 도착한 예슬은 친구들을 위해 방의 문을 열었다. 방에 들어서며 담배에 불을 붙이는 준호는 아직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예슬을 돌아보았다.
“뭐 해? 안 들어와?”
예슬은 문고리를 잡고 선 채 비틀거렸다. 그녀는 실성한 듯 웃으며 준호의 귀에 속삭였다.
“나 세탁기에 돈 확인하고 올게.”
“지금? 굳이?”
“응.”
방으로 돌아온 준호는 사람들이 건네는 술에도 취하지 않았다. 현관문을 바라볼 뿐이었다. 문은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복도의 불빛이 방 안으로 가늘게 들어서며 예슬은 준호가 있는 소파로 달려와 그에게 안겼다. 준호는 그런 예슬을 나은에게 가볍게 옮겨냈다.
“나 화장실 좀.”
화장실 문을 잠근 준호는 민혁에게 문자를 보낸 후 빠르게 지워냈다.
'지금.'
옥상에서 추위에 떨던 민혁은 준호의 문자를 확인한 후 빠르게 삭제했다.
'진짜 얼어 죽을 뻔했잖아.'
민혁은 조용히 옥상 문을 열어 계단을 살금살금 내려갔다. 계단의 반을 내려왔을 때 민혁은 몸을 숙여 13층의 복도를 둘러보았다. 그는 마치 13층 복도에 CCTV라도 있는 듯 계단에서 내려와 빠르게 세탁실에 몸을 숨겼다. 그의 심장은 뛰었고, 민혁은 추위를 잊었다.
'존나 웃기네. 걸려도 경찰서에 갈 일은 없다는 게.'
조용히 가장 안쪽의 건조기로 걸어갔다. 뛰는 심장에 침을 삼켰다. 민혁은 '고장' 팻말이 걸린 건조기 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수많은 옷가지가 있었다. 민혁의 눈에 들어오는 가방이 있었다. 그는 가방에 들어 있는 현찰들을 빠르게 자기 옷의 모든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가방을 들고 로비를 떠나는 자신의 모습을 카메라 화면에 남길 생각이 없었다. 그는 악행에도 나름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가방 채로 묶음의 돈을 가져오는 건 아마추어나 하는 거지.'
얇은 코트였지만 주머니는 넓었다. 그는 아무런 소음도 생기지 않게 조용히 세탁실 문을 열었다. 민혁은 복도를 한번 살펴본 후 급하게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상 문을 닫은 민혁은 제일 먼저 준호에게 문자를 보낸 후 빠르게 삭제했다. 이제는 돈을 숨길 곳을 찾을 차례였다. 옥상에는 돈을 숨길 마땅한 공간이 없어 보였다.
행여나 눈이나 비가 내려 젖을 수도 있기에 적당한 공간을 찾기 바쁜 민혁이었다. 그는 염화칼슘을 보관해 놓은 통의 뚜껑을 열었다.
'너무 티 나는데…. 마땅한 곳이 없네.'
그는 주머니의 현찰들을 정돈 없이 염화칼슘 통 안에 집어넣었다.
'여기는 너무 티가 나는데….'
그는 다시 한번 얇은 코트의 주머니에 돈을 집어넣었다. 그의 얼어붙어가던 하루는 끝이 났다. 아직 클럽에 손님이 많아 혼잡할 때 그는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민혁의 붉게 얼어붙은 손은 옥상 문 손잡이를 돌렸다.
문이 열리지 않았다. 문을 밀기도 하고, 당기기도 해 보았다. 손잡이를 돌리고 또 돌리었다. 반대로 돌리기도 해보았고, 강하고 천천히 문을 당기기도 해 보았다. 문을 발로 차기에는 소음이 생길 것을 걱정했다. 핸드폰을 꺼냈지만 준호의 말이 생각났다.
'너 그 핸드폰으로는 돈 꺼낼 때 말고 절대 나한테 먼저 연락하면 안 된다.'
민혁은 침착하게 차가운 문에 등을 기대앉았다. 초록색 페인트칠이 된 바닥은 차가웠다. 이미 그곳의 옥상에서 몇 시간을 보낸 민혁이었다. 겨울의 밤은 길다. 그에게는 급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어렸을 적 아버지가 해주었던 말을 떠올렸다.
'길을 잃었을 때가 가장 움직이지 말아야 할 때이다.'
문에 등을 기댄 채 무릎을 안고 앉은 민혁은 준호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존나 웃기네. 별일이 다 있네. 준호는 의심받으면 안 되니까, 준호는 걔들이랑 계속 같이 있어야 하니까.'
민혁은 배가 고팠다. 그러나 추위는 그의 허기마저 얼려갔다. 코트 안에 깊숙이 찔러 넣은 손은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게 굳어갔다. 발가락에 감각이 사라지더라도 그에게는 굳은 믿음이 있었다. 곧 준호가 올 것이다. 그 믿음에는 일말의 의심도 없었다. 애초에 의심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문을 열려고 난리를 피웠을 민혁이다. 추위는 물도, 몸도 얼린다. 가장 무서운 건 생각과 마음도 얼린다는 것이다. 겨울밤의 민혁에게 졸음이 쏟아졌다.
'또 가만히 있으니까 별로 안 춥네.'
민혁은 졸음에 고개를 떨어트리기를 반복했다. 그의 고개뿐만 아니라 온몸이 초록색 바닥으로 떨어질 때쯤 문이 열렸다. 열리는 문은 민혁의 등을 밀어내 그를 깨웠다.
문이 열렸다는 생각만으로도 그의 손가락과 발가락의 감각이 돌아오고 있었다. 빛이 쏟아지는 문에서는 온기가 흘러나왔다. 민혁은 빛을 의심했다. 그러나 온기만은 진심으로 느낄 수 있었다. 따뜻한 바람, 열대 바다의 향이 담겨 있었다. 잔잔한 파도의 흐름. 그의 얇은 코트는 따뜻한 바람을 견디기엔 너무나도 두꺼웠다.
민혁은 코트와 셔츠를 벗고 문 앞으로 걸어 나섰다. 그의 발에 닿은 것은 분명 뜨거운 모래였을 것이다.
자신이 언제 신발까지 벗었는지 당황했지만 온기는 따듯했고, 민혁은 녹아내렸다.
민혁은 등 뒤, 열린 문을 돌아보았다. 다시는 매서운 추위의 호텔 옥상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는 따스한 빛으로 가득한 호텔의 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
로비에 도착한 그는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그의 눈앞에는 아름다운 해변이 펼쳐져 있었다. 저 멀리 아름다운 수평선으로 떨어지고 있는 태양은 따스하게 빛났다. 에메랄드빛 파도가 닿을 듯한 해변의 한 자리. 그곳에는 민혁을 위한 의자가 있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나를 위한 의자다.'
따뜻한 태양과 오고 가는 시원한 파도. 민혁은 자리에 앉았다. 하늘의 노을은 연보랏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민혁은 노을의 향을 맡을 수 있을 듯했다. 그는 옆에 놓인 칵테일을 한 모금 들이켰다. 그곳에는 갈증도, 추위도, 허기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노을을 반사하는 바다와 하늘이 닿는 곳을 응시했다.
'천국이 있다면...'
다시 그에게 졸음이 쏟아졌다. 그는 알고 있다. 이제는 졸음이 쏟아져 긴 잠을 잔다고 해도 괜찮은 곳에 있다. 민혁이 완전히 잠이 들려는 찰나에 한 마리 나비가 날아와 그의 어깨에 앉았다. 나비는 마치 붉은 하늘이 살을 뜯어 보낸 듯 노을같이 아름다웠다. 나비는 그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듯 급해 보였다. 민혁은 나비가 하는 말을 이해할 방도가 없었다. 그렇게 공중에 손을 휘저어 나비를 날려 보낸 민혁이었다. 더 이상 아무것도 그의 잠을 방해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는 꿈속으로 빠져든다.
옥상에서 일어나는 계절의 변화와 상관없이 호텔 방은 담배 연기와 술 냄새로 가득했다. 바닥에는 쏟아진 술과 카드들이 쌓여 있었다. 술과 연기에 나은은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 이렇게 혹독한 겨울에 따뜻한 실내에 있는 것, 그것마저도 행운일 것이다. 나은은 보통 인간들이라면 한 번도 겪지 못할 쾌락을 느끼고 있다.
나은이 졸기 시작하는 것을 눈치챈 예슬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손목을 잡고 주방의 식탁에 앉혔다.
“계속 놀아야지 잠들면 어떡해?”
“미안. 너무 졸려서.”
“완전히 깨워줄게.”
예슬의 안주머니에서는 하얀 가루가 쏟아져 나왔다. 테이블 위에 놓인 하얀 가루는 민혁이 있는 해변의 모래와도 같았다. 카드를 이용해 해변의 모래를 일렬로 정돈하는 예슬의 모습은 나은에게 마치 마법사와도 같았다. 예슬은 나은에게 종이 빨대를 건넸다.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긴 후 해변의 모래를 들이마신 나은은 예슬에게 소리쳤다.
“커피를 백 잔은 마신 것 같아! 나 지금 목소리 너무 커?”
예슬은 그런 나은이 웃기고 귀여웠다. 나은은 거실로 돌아가 파티를 이어갔다. 나은은 준호를 바라보았다.
“불쌍한 승훈이.”
“뭐?”
“내가 소리 내서 말했어? 나는 생각만 한 줄 알았는데?”
“응. 지금도 나한테 말하고 있잖아.”
“미안. 갑자기 너무 흥분되는 거 있지.”
준호는 미니바에서 차가운 맥주를 꺼내 나은에게 건넸다.
“정신 차리는 데 도움 될 거야.”
예슬을 포함한 호텔 방 안의 모두가 즐거운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그곳에서 정신을 잃지 않고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은 준호뿐이었다. 준호는 눈을 감고 음악에 취해 있는 나은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준호가 건넨 맥주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채 음악에 고개를 흔들거렸다. 순간 그녀의 코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그 광경은 추하기만 했다. 가장 추한 일들은 가장 아름다운 사람들에게 일어나기도 한다. 나은의 코에서 흘러나온 피는 그녀의 입술에 묻어 립스틱과 구별이 되지 않았다.
준호는 휴지로 그녀의 피를 닦아주었다. 나은은 아직도 음악의 아름다움에 빠져 고개를 흔들거렸다. 준호는 그녀를 붙잡은 채, 파티를 위해 많은 약을 처방해 주는 친구에게 물었다.
“야. 얘 괜찮은 거 맞아?”
“응. 괜찮아. 코의 실핏줄이나 점막이 하얀 가루에 베인 것뿐이야. 금방 멈출 거야. 이거 하나 먹으라 해.”
“이게 뭔데?”
한 알은 긴장에 잠긴 준호 자신을 위해, 나머지 하나는 코피를 흘리는 나은을 위해. 나은은 그것이 무엇인지 묻지도 않은 채 맥주와 함께 삼켜냈다. 즐거움이란 걸 모르고 살던 그녀는 자신의 쾌락과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그녀는 흘러나오는 음악의 파동이 자기 몸의 진동과 일치하는 느낌을 받았다. 한쪽 코에 휴지를 틀어막은 그녀는 준호에게 말을 얼버무렸다.
“준호야. 너 강에 돌 던지면 물이 일렁이는 거 알지? 내가 평소에 그 정도의 파동인데, 지금 나오는 음악이 나라는 파동과 똑같다? 그래서 하나가 됐어.”
“그래. 조금 쉬어.”
지친 준호는 친구들에게 나은을 잘 봐달라고 부탁한 후 예슬과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1시간이 덜 되는 시간이 흐르고 나왔을 때 거실은 같은 모습이었다. 시끄러운 음악, 술과 담배 냄새, 바닥에 널린 담뱃재와 카드, 술. 방에서 나온 준호는 친구들에게 물었다.
“나은이 어디 갔어?”
이미 정신이 나갈 만큼 취한 친구들은 실눈을 뜬 채 웃으며 답했다.
“누구?”
준호는 나은을 찾아 복도로 나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엔 한 가지 생각이 스쳐 갔다.
'아침이 왔을 때 세탁기 안에 돈은 사라진 상태이겠지. 그런데 애프터 파티에 처음 온 나은이도 같이 사라진다면….'
준호는 처음부터 나은에게 책임을 전가하거나 누명을 씌울 생각은 없었다. 상황이 그렇게 흘러갔을 뿐이다.
나은은 멀리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를 좇아 13층의 복도를 헤집고 다녔다. 그녀는 머릿속에 반복되는 음악 소리를 멈출 수가 없었다.
'음악이 나오는 곳을 찾아야 해. 음악과 하나가 되어야 해.'
술과 연기, 해변의 모래, 그리고 누군가가 건넨 한 알의 알약에 그녀는 다시 한번 아이가 된 기분을 느꼈다.
그녀는 13층 모든 방의 문을 하나씩 열기 시작했다.
첫 번째 방의 문을 연 나은은 아기를 안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문 앞에서 방 안을 들여다보던 나은을 한 남자가 밀치고 들어섰다. 방 안에서는 아기를 안은 또 다른 나은이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왔어? 수고했어. 오늘은 어땠어?”
“매일 똑같지 뭐. 아기는 많이 안 울었어?”
나은은 강하게 문을 닫았다.
'여기가 아니야.'
그녀는 언제 손에 들려 있었는지도 모르는 위스키를 병째로 들이마셨다. 그렇게 그녀는 두 번째 방의 문을 열었다. 그녀가 매일 출근하던 회사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사무실의 플라스틱 향을 맡은 나은은 혐오에 경기를 일으켰다. 그녀는 방 안으로 들어가 과장의 머리에 술병을 내리쳤다. 마치 만화 속의 장난스러운 캐릭터와 같이 그녀는 빠르게 방에서 웃으며 뛰쳐나왔다. 그녀가 다시 문을 열었을 때 바닥에는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김 과장과 소리를 지르는 다른 직원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그들에게 극적인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렇게 그녀는 문을 닫았다.
그녀는 자신의 주머니에 있는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렇게 세 번째 방을 열었다. 그곳에는 의자에 앉아 그림을 그리는 나은이 있었다. 나은은 본인이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녀는 이젤 앞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드디어 그녀의 음악을 찾은 듯했다. 잔잔한 파동. 물감 향기와 방의 인테리어 모든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림을 그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마저도. 그러나 그림을 바라본 그녀는 소리를 질렀다. 캔버스 위에는 승훈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소리를 지르며 방에서 뛰쳐나온 나은의 앞에는 승훈이 서 있었다.
“나은아 너 괜찮아? 무슨 일이야? 옷에 피는 뭐야?”
나은은 강하게 승훈을 밀치고 계단이 있는 곳으로 도망쳤다. 계단 앞에 선 그녀는 내려가야 할지 올라가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빠르게 선택하지 않으면 캔버스에 있던 승훈이 쫓아올 것이다. 그녀는 내리막이 싫었다.
나은은 옥상을 향해 계단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옥상 문 앞에 선 그녀는 문 건너편에서 빛이 쏟아지고 있음을 보았다.
'아침이 온 걸까? 제발 아침이 온 게 아니면 좋겠어.'
그녀는 아침이 두려웠다. 아침 해가 뜨면 세상의 모든 파티는 끝이 날 것 같았다. 나은은 도저히 플라스틱 사무실과 김 과장이 있는 현실로 돌아갈 수 없었다.
'제발 아침이 온 게 아니었으면. 제발.'
망설이던 나은은 계단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옥상 문 손잡이를 잡았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나은은 심호흡했다.
'그래. 다른 방의 문을 여는 것과 다름이 없는 거야. 할 수 있어. 문을 열 수 있어. 문은 열릴 거야.'
나은이 심호흡을 한 후 문을 열자 그곳에는 빛이 가득했다. 너무나도 밝아 나은은 눈을 뜨기 힘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확신했다. 그것이 아침의 태양이 아닌 것을. 빛은 따뜻했다.
'천국에서는 이런 향기가 나는구나. 습도도 온도도 적당해.'
나은에게 그곳이 딱히 즐겁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곳에는 슬픔도, 고민도 없었다. 그녀는 발에 걸린 누군가의 옷가지를 걷어찬 후 자리에 앉았다. 모든 고통과 걱정으로부터 도망친 느낌이 들었다.
'하얀빛의 따뜻함. 다른 것들은 아무것도 안 보이네? 음악 소리도 들리지 않아. 이곳은 너무 밝아. 아침이 오지 않을 것 같아. 어쩌면 난, 이곳에 있고 싶어.'
나은은 하얀빛으로 가득한 옥상에 누웠다. 몇십 년 만에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눕는다고 해도 이런 포근함은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가고 싶은 곳은 이곳 외에 어디도 없다. 그녀는 어느새 잠옷을 입고 곰 인형을 안은 채 잠들었다. 잠드는 그녀를 향해 박수와 환호를 보내는 사람들의 소리에 나은은 미소와 함께 잠들 수 있었다.
승훈은 자신을 보고 도망치는 나은의 모습을 믿을 수 없었다.
'함께 공원에도 가고, 매일 통화도 했는데. 로비에서는 나를 못 알아본 게 분명해.'
'그러면 지금 그녀는 왜 도망친 거지? 나로부터 도망친 건 아닐 거야. 절대.'
승훈은 나은이 지나간 13층의 방들을 하나하나 뒤지고 있었다. 그녀가 지나간 모든 곳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방 안에 온갖 낙서가 되어있는 방, 술병이 깨져 있는 방들을 지나 승훈은 사람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승훈은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오는 문 앞에 멈추어 섰다. 그곳에서는 음악과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승훈은 마스터키를 이용해 조용히 방의 문을 열어 틈새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승훈은 미영이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승훈 씨 13층에 귀신이 산대요.'
'나은이가 여기 있었다.'
'저 나쁜 새끼들. 저 새끼들이 약을 먹여서 나은이의 기억을 다 지워낸 거구나.'
'그래서 그랬던 거야. 나은이가 나를 몰라본 게 아니었어. 약에 취해 있던 거야.'
'분명 매일 통화도 하고 공원에도 갔는데. 나쁜 새끼들.'
승훈은 빠르게 로비의 청소 도구함으로 달려갔다. 그는 어떤 도구를 꺼내야 할지 몰랐다. 그의 눈앞에는 유일한 친구가 되어줬던 바퀴벌레가 있었다. 바퀴벌레는 그에게 따라오라며 구석으로 빠르게 기어갔다. 바퀴벌레가 도착한 곳의 선반에는 검은 비닐봉지가 있었다. 승훈은 검은 봉투에서 망치를 꺼내 바지춤에 숨겼다. 나은이를 위한 복수와 함께 그의 머릿속이 맑아져야 할 차례였다.
엘리베이터에 선 승훈은 12에 가까워지는 층수를 바라보았다. 그는 분명 화가 났었다. 나은의 무시에 화가 났고, 나은을 무시하게 만든 이들에게 화가 났었다. 어째서일까, 호텔 위로 올라갈수록 그의 마음은 가벼워졌다. 그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12층에 도착했다. 한 층의 계단을 더 오른 그는 파티가 있는 방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자신의 일터가 낯설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다.
'복도에서부터 술 냄새가 나네.'
승훈은 문 앞에서 망치를 꺼낸 후, 방의 문을 열었다. 그곳의 인간들은 승훈을 보고 놀라지 않았다. 술병을 내려놓지도, 음악 소리를 줄이지도 않았다. 실눈을 뜨며 웃는 남자는 문 앞의 승훈에게 소리쳤다.
“아저씨, 문 닫아.”
승훈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문에 새어 나오는 한기를 느낀 것은 준호뿐이었다. 준호는 예슬이 잠들어 있는 침실을 향해 조용히 걸어갔다. 침실에 들어온 준호는 문을 잠근 후, 놀란 예슬에게 조용히 하라는 듯 손가락으로 입을 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