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 교사로 일했던 시절 친하게 지냈던 동료 교사, 지금은 언니라고 부르는 언니와 아침마다 아이들 오전에 먹일 우유를 간식 바구니에 담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담는 게 그때 당시 소소한 낙이였다.
'아, 여름이다. 다슬기 잡으러 가야 되는데'
'다슬기?'
' 응, 나 어릴 때 가족들끼리 계곡으로 다슬기 잡으러 갔었거든 그래서인지 여름이 되면 다슬기 생각이 나'
' 잡기만 했던 거야?'
'아니 다슬기 넣고 국수도 해 먹고 그랬지. 말하니깐 또 먹고 싶다'
언니는 그 말을 한 후 고개를 들어 하늘을 한번 쳐다보았고, 입가에는 작은 미소가 언뜻 스쳐 지나갔다.
언니에게 다슬기는 곧 가족과의 추억을 의미했고 그 힘은 강했는지 언니는 매년 여름마다 다슬기를 잡으러 갔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언니의 그 이야기와 추억을 부러워했다. 별거 아니지만 가족과 작고 소소한 추억 하나를 기억하고 있고 그 추억이 서른이 넘은 지금에도 힘을 가지고 있는 게 대단해보기도 했다. 세상에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게 가장 얻기 힘든 거라던데 어찌 보면 언니의 추억도 그와 같았다.
나의 어린 시절의 추억은 가족과 보낸 추억보다 혼자 보낸 시간이 더 많이 기억되었다. 아무도 없는 집에 티브이를 켜고 혼자 엄마 구두를 신고 거실을 활보하며 드라마 여 주인공을 혼자 따라 한다던가, 혼자 중국집에 음식을 시킨 후 외상을 한다던가의 추억들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어린 시절은 부모님 두 분의 이혼 과정이 길었던 시기였고 나는 이 집에 살다 저 집에 살다 다시 이 집에 사는 과정을 겪은 후 결국 엄마와 살게 되었지만 혼자서 자신과 아이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엄마는 늘 바빴고,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엄마는 이혼 과정에서 마음을 많이 다치셨다. 그래서인지 일 외의 모든 여유 시간을 나보다는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더 좋아하셨다. 아마 그렇게 그 시기를 버텨내셨을 거라 추측만 할 뿐이다. 하지만 서로 함께 하는 시간이 없었던 우리.서른이 넘은 나이가 되서서도 나는 엄마가 어색했고 환갑이 된 엄마도 내가 어색했다.
모녀가 같이 쇼핑하고, 차도 마시고, 친구처럼 지내는 일이 우리 모녀에게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일들이었다. 하자고 해도 엄마는 한사코 거부(?)를 하셨다. 가족은 혈연으로 형성되는 것뿐만 아니라 함께 한 시간의 축척으로 완성되는 것임을 엄마와 나를 통해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어색할 뿐이지 서로에게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다. 결혼 4년 차, 난임과 유산으로 고생하는 딸이 걱정될 때면 엄마는 늘 전화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딸, 김치 받으러 와'
낯 간지러운 감정 표현을 못하시는 엄마의 김치라는 단어 속에
네가 보고 싶다는 말,
너의 안부가 궁금하시다는 말,
나를 생각하고 있다는 마음
모든 게 담겨있다. 매번 사는 게 힘들 시기일 때마다 김치 가지러 오라는 엄마의 연락. 엄마는 직감적으로 딸의 상태를 아셨다. 김치는그렇게내게 엄마로 추억되고 기억되는 음식이 되겠다 싶다.
어린 시절 가족과 소소하고 예쁜 추억은 없지만, 지금 이 순간도 나중에 어떤 시절이 되어 기억되고 추억될 시간이라 생각하니 오늘 하루를 그냥 보내기 싫은 마음이 들었다.
그런 마음이 들어 오늘 엄마에게 김치를 받으러 가기로 했다. 가서 씩씩하게 잘 지내는 모습도 보여드리고, 엄마가 차려주시는 맛있는 음식도 든든히 먹고 오고, 이런 추억들이 나중에 나를 살게 한 큰 힘이 되겠구나 생각되니 평범한 일상이 소중했고 감사했다. 난임 시절 갖지 못하는 아이만 보느라 내가 놓치고 살았던 이 소중한 일상들을 다시 하나씩 하나씩 소중하게 담아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