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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별일기 Jul 21. 2020

딸, 김치 가지러 와.


5년 전,  교사로 일했던 시절 친하게 지냈던 동료 교사, 지금은 언니라고 부르는 언니와 아침마다 아이들 오전에 먹일 우유를 간식 바구니에 담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담는 게 그때 당시 소소한 낙이였다.



'아, 여름이다. 다슬기 잡으러 가야 되는데'

'다슬기?'

' 응, 나 어릴 때 가족들끼리 계곡으로 다슬기 잡으러 갔었거든 그래서인지 여름이 되면 다슬기 생각이 나'

' 잡기만 했던 거야?'

'아니 다슬기 넣고 국수도 해 먹고 그랬지. 말하니깐 또 먹고 싶다'



언니는 그 말을 한 후 고개를 들어 하늘을 한번 쳐다보았고, 입가에는 작은 미소가 언뜻 스쳐 지나갔다.

언니에게 다슬기는 곧 가족과의 추억을 의미했고 그 힘은 강했는지 언니는 매년 여름마다 다슬기를 잡으러 갔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언니의 그 이야기와 추억을 부러워했다. 별거 아니지만 가족과 작고 소소한 추억 하나를 기억하고 있고 그 추억이 서른이 넘은 지금에도 힘을 가지고 있는 게 대단해보기도 했다. 세상에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게 가장 얻기 힘든 거라던데 어찌 보면 언니의 추억도 그와 같았다.


나의 어린 시절의 추억은 가족과 보낸 추억보다 혼자 보낸 시간이 더 많이 기억되었다. 아무도 없는 집에 티브이를 켜고 혼자 엄마 구두를 신고 거실을 활보하며 드라마 여 주인공을 혼자 따라 한다던가, 혼자 중국집에 음식을 시킨 후 외상을 한다던가의 추억들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어린 시절은 부모님 두 분의 이혼 과정이 길었던 시기였고 나는 이 집에 살다 저 집에 살다 다시 이 집에 사는 과정을 겪은 후 결국 엄마와 살게 되었지만 혼자서 자신과 아이의 계를 책임져야 했던 엄마는 늘 바빴고,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엄마는 이혼 과정에서 마음을 많이 다치셨다. 그래서인지 일 외의 모든 여유 시간을 나보다는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더 좋아하셨다. 아마 그렇게 그 시기를 버텨내셨을 거라 추측만 할 뿐이다. 하지만 서로 함 하는 시간이 없었던 우리. 서른이 넘은 나이가 되서서도 나는 엄마가 어색했고 환갑이 된 엄마도 내가 어색했다.


모녀가 같이 쇼핑하고, 차도 마시고, 친구처럼 지내는 일이 우리 모녀에게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일들이었다. 하자고 해도 엄마는 한사코 거부(?)를 하셨다.  가족은 혈연으로 형성되는 것뿐만 아니라 함께 한 시간의 축척으로 완성되는 것임을 엄마와 나를 통해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어색할 뿐이지 서로에게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다. 결혼 4년 차, 난임과 유산으로 고생하는 딸이 걱정될 때면 엄마는 늘 전화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딸, 김치 받으러 와'


낯 간지러운 감정 표현을 못하시는 엄마의 김치라는 단어 속에


네가 보고 싶다는 말,

너의 안부가 궁금하시다는 말,

나를 생각하고 있다는 마음


모든 게 담겨있다. 매번 사는 게 힘들 시기일 때마다 김치 가지러 오라는 엄마의 연락. 엄마는 직감적으로 딸의 상태를 아셨다.  김치는 그렇게 게 엄마로 추억되고 기억되는 음식이 되겠다 싶다.

어린 시절 가족과 소소하고 예쁜 추억은 없지만, 지금 이 순간도 나중에 어떤 시절이 되어 기억되고 추억될 시간이라 생각하니 오늘 하루를 그냥 보내기 싫은 마음이 들었다.


그런 마음이 들어 오늘 엄마에게 김치를 받으러 가기로 했다. 가서 씩씩하게 잘 지내는 모습도 보여드리고, 엄마가 차려주시는 맛있는 음식도 든든히 먹고 오고, 이런 추억들이 나중에 나를 살게 한 큰 힘이 되겠구나 생각되니 평범한 일상 소중했고 감사했다. 난임 시절 갖지 못하는 아이만 보느라 내가 놓치고 살았던 이 소중한 일상들을 다시 하나씩 하나씩 소중하게 담아와야겠다.


자, 어서 김치 받으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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