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점수표는 원래 내 것이 아니었다

by 씨알

억울했을 것이다.


열심히 했다는 걸 스스로는 안다. 누구보다 잘 안다. 과정도 알고, 맥락도 알고, 그 일에 쏟아부은 시간의 무게도 안다. 그런데 결과로 나온 숫자 하나, 말 한마디가 그 전부를 지워버린다. 더 황당한 건, 그 평가가 처음부터 공정하지 않았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저 사람이 나를 제대로 봤는지, 저 기준이 애초에 맞는 기준이었는지, 의심이 올라오지만 입 밖으로 꺼내기가 쉽지 않다. 그냥 삼킨다. 그리고 혼자 남은 밤, 그 말이 다시 돌아온다.


"결국 내가 별로였던 건가."


먼저 말해두고 싶은 게 있다. 그 분노, 정당하다.


공정하지 못한 평가에 상처받는 것은 나약함이 아니다. 그 반응은 자신이 쏟은 것의 무게를 정확히 알고 있다는 증거다. 아무렇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보다, 억울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그 일을 더 진지하게 대했던 것이다. 그러니 그 감정을 먼저 부정하지 않아도 된다. 분노는 때로 자기 존중의 다른 이름이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를 짚고 싶다. 그 점수표, 처음부터 완전하지 않았다.


평가는 언제나 평가자의 자리에서 나온다. 그 자리에는 그 사람의 경험이 있고, 그날의 기분이 있고, 자신도 미처 들여다보지 못한 편견이 있다. 조직 안에서의 평가는 더 그렇다. 성과는 보이는 수치로만 읽히고, 보이지 않는 기여는 기록되지 않는다. 오래 쌓은 신뢰보다 최근의 실수가 더 크게 남는다. 말해지지 않은 기준이 말해진 기준보다 더 강하게 작동한다. 그리고 평가자 역시 사람이다. 자신이 인정받지 못했던 기억, 자신이 극복하지 못한 열등감, 자신이 두려워하는 무언가가 타인을 보는 눈에 섞인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투사(projection)라고 부른다. 남을 낮게 보는 시선은 종종 그 시선의 주인이 자신에게 가하는 혹독함의 반영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그러니 그 점수표를 흐린 거울 앞에서 본 내 모습이라고 믿지 않아도 된다. 거울이 흐리다는 것을 모르면 왜곡된 상이 진실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문제는 거울이 흐린 것이지, 내 얼굴이 아니다.


에픽테토스는 노예였다. 주인에게 팔렸고, 한쪽 다리는 학대로 평생 절었다. 그의 삶은 타인의 평가와 낙인으로 가득 차 있었다. 노예라는 신분 자체가 하나의 점수표였다. 그런데 그가 죽고 난 뒤,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그의 말을 침대 맡에 두고 읽었다. 지위도, 자유도 없던 사람의 생각이 제국의 황제를 움직인 것이다. 에픽테토스는 사람이 통제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나눴다. 내 생각, 내 선택, 내 태도는 어느 정도 내가 다룰 수 있다. 그러나 타인의 판단, 타인의 기분, 타인이 나를 보는 방식은 끝내 내 손 밖에 있다. 그는 이 구분을 위로로 제시하지 않았다. 이것은 냉정한 진단이었다. 인간이 고통받는 가장 흔한 이유는, 통제할 수 없는 것을 통제하려 애쓰기 때문이라는 진단. 노예의 몸으로 황제의 스승이 된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단단한 말이었다.


공자의 말도 같은 자리를 건드린다. 논어의 첫 편, 마지막 문장이다.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는다면, 군자가 아니겠는가." 오래도록 겸손의 미덕으로만 읽혀온 문장이지만, 다시 들여다보면 더 예리한 이야기다. 공자가 주목한 것은 화를 내는 것만이 아니다. 인정받지 못할 때 찾아오는 허전함, 까닭 없이 마음이 작아지는 느낌, 별것 아닌 일에도 흔들리는 그 상태 전체를 본 것이다. 공자가 이 문장을 논어의 맨 앞에 배치한 것은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배움과 성장의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먼저 이 흔들림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를 먼저 물은 것이다. 남의 시선에 중심을 잃지 않는 것, 그것이 모든 성장의 전제조건이라는 뜻이다.


논어에는 이런 구절도 있다. "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也 — 남이 나를 알아주지 못함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제대로 알지 못함을 걱정하라." 여기서 '남'을 '나 자신'으로 바꿔 읽으면 의미가 달라진다.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에 앞서, 내가 나를 얼마나 정직하게 알고 있는가가 먼저다. 내가 나를 알면, 타인의 평가는 판결문이 아니라 참고 의견으로 남는다. 그 평가가 맞는 부분은 수용하고, 틀린 부분은 흘려보낼 수 있다. 그런데 내가 나를 모르는 상태에서는, 낮은 점수표 하나가 통째로 진실처럼 느껴진다.


16세기 프랑스 철학자 몽테뉴는 이렇게 썼다. "타인의 의견이 나에게 고통을 준다면, 그것은 내가 나 자신에 대해 아직 결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혹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이 문장은 자책을 권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내가 나를 먼저 정의하면, 남의 말은 나를 규정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내 기준이 서 있는 사람은 불공정한 점수표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는다. 억울함을 느끼되, 그 억울함이 나를 정의하도록 두지 않는다. 몽테뉴 자신도 평생 외부의 시선과 싸웠다. 그는 그 답을 밖에서 찾지 않았다. 자기 자신을 끝까지 들여다보는 것, 그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그의 수상록은 그 긴 관찰의 기록이었다.


물론 타인의 평가를 통째로 무시하자는 말이 아니다. 불편한 피드백이 실제로 나를 성장시키기도 하고, 내가 보지 못하던 것을 짚어주기도 한다. 뼈아픈 말이 나중에 가장 값진 말이 되는 경우도 있다. 다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문제다. 조각가가 돌에서 불필요한 부분을 쳐내듯, 타인의 말에서 쓸 만한 것을 취하고 나머지는 흘려보내는 일. 그 선택의 주권이 내게 있어야 한다. 그런데 내 기준이 흐릿하면 그 주권은 저절로 남에게 넘어간다. 낮은 점수를 받았을 때 마음이 철렁하는 이유는, 그 숫자를 진짜로 받아들일 준비가 이미 내 안에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왕양명은 "마음이 곧 이치(心卽理)"라고 했다. 진리는 밖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발견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내 가치를 외부의 평가에서 확인받으려는 습관은 이 방향과 정반대다. 고과 등급, 면접 결과, 상사의 한마디, 동료의 눈빛. 거기 담긴 숫자와 말들이 어느새 나를 설명하는 언어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내 삶 전체를 보지 못한 자리에서 나온 것이다. 내 시간의 맥락을 모르고, 내 사정의 결을 모른 채 내려진 판단이 대부분이다. 참고할 수는 있어도, 그것을 내 이름표처럼 달고 다닐 이유는 없다.


공정하지 못한 평가에 상처받았다면, 그 감정은 충분히 머물러도 된다. 서두를 필요 없다. 다만 그것이 지나간 다음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그 점수표는 처음부터 완전하지 않은 자리에서 나왔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지 않을 권한이 나에게 있다는 것.


내 삶의 점수표를 적는 손은 원래 내 것이었다. 잠시 남에게 빌려줬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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