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원래 선하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믿지 않았다

《휴먼카인드》가 흔들어놓은 것들

by 씨알

솔직히 말하면, 나는 꽤 오랫동안 사람을 낙관적으로 보지 못했다.


30년 넘게 기업 현장에서 일했고, 그 이후에는 스타트업 생태계에서 많은 창업자와 팀을 만났다. 그 시간을 지나오며 자연스럽게 몸에 밴 생각이 있다. 사람은 생각보다 쉽게 흔들린다는 것. 감시가 느슨해지면 태도가 무너지고, 이해관계가 걸리면 신뢰도 쉽게 금이 간다. 앞에서는 그럴듯한 말을 하다가도 뒤에서는 전혀 다른 선택을 하는 장면도 적지 않게 봤다.


그래서인지 나는 어느 순간부터 사람을 볼 때 기본값이 의심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사람은 본질적으로 이기적이고, 제도와 통제가 없으면 결국 흐트러진다. 돌이켜보면 그것이 내가 조직을 이해하는 출발점이었다.


그런데 뤼트허르 브레흐만의 《휴먼카인드》를 읽으면서, 그 오래된 전제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기분 좋게 흔들린 것은 아니다. 오히려 꽤 불편했다.


우리가 사실이라고 믿어온 것들

이 책이 흥미로운 이유는 "인간은 선하다"는 말을 감성적으로 밀어붙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막연한 희망을 이야기하는 대신, 우리가 오랫동안 인간 본성의 증거라고 믿어온 이야기들을 하나씩 다시 꺼내 본다. 그리고 묻는다. 정말 그게 사실이었나.


스탠퍼드 감옥 실험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학생들을 교도관과 죄수로 나눴더니 권력을 쥔 쪽이 곧 잔인해졌고, 그래서 인간은 상황만 주어지면 쉽게 악해진다는 결론. 우리는 이 이야기를 거의 상식처럼 배워왔다. 그런데 브레흐만은 그 실험의 녹취록과 자료를 다시 추적한다.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은, 그 실험이 우리가 알고 있던 것처럼 그렇게 단순한 '인간 본성의 증거'는 아니라는 점이다. 실험자는 개입했고, 참가자들은 유도되었으며, 결과는 생각보다 훨씬 덜 자발적이었다.


키티 제노비스 사건도 비슷하다. "38명이 지켜봤지만 아무도 돕지 않았다." 이 문장은 도시인의 냉담함과 방관자 효과를 설명하는 상징처럼 오랫동안 반복됐다. 그런데 당시 기록을 다시 보면, 우리가 알고 있던 서사와는 다르다. 많은 사람이 상황을 정확히 알지 못했고, 누군가는 소리를 질러 범인을 물러나게 했고, 누군가는 신고했고, 누군가는 마지막 순간 곁에 있었다. 아무도 돕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사건이 훨씬 복잡했는데도 하나의 냉혹한 이야기로 단순화된 것이다.


이스터섬 이야기도 그렇다. 원주민들이 탐욕스럽게 자원을 남용하다 스스로 문명을 무너뜨렸다는 서사. 인간의 어리석음과 탐욕을 보여주는 대표 사례처럼 소비돼 왔다. 하지만 최근 연구들은 훨씬 다른 그림을 보여준다. 본격적인 붕괴는 유럽인들의 도착 이후 시작됐고, 노예무역과 전염병이 큰 영향을 미쳤다. 오히려 원주민들은 오랜 시간 제한된 자원을 조절하며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이 사례들을 따라가다 보면 묘한 기분이 든다. 우리가 인간을 불신하는 근거라고 여겨온 이야기들 중 상당수가, 막상 원본을 들여다보면 과장되었거나 단순화되어 있거나 결정적인 맥락이 빠져 있다는 점 때문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책장을 쉽게 넘기지 못했다. 내가 사람을 냉소적으로 보는 근거라고 믿어온 것들 가운데, 실제로는 '사실'이 아니라 '이야기'였던 것은 얼마나 많았을까.


전쟁터가 보여준 것

브레흐만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인간의 본성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곳이 어디냐고 묻고, 뜻밖에도 전쟁터를 보여준다.


1914년 크리스마스이브, 1차 세계대전의 서부전선. 불과 수십 미터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누던 독일군과 영국군 사이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독일군 참호 쪽에서 촛불이 켜지고, 캐럴이 들려오고, 영국군이 그 노래에 화답한다. 그리고 다음 날, 양쪽 병사들이 참호 밖으로 나와 중간지대에서 악수하고 담배와 초콜릿을 나누고 이야기를 나눈다. 역사에 '크리스마스 휴전'으로 남은 장면이다.


이 사건이 인상적인 것은 단지 아름다운 미담이어서가 아니다. 어제까지 서로를 죽이던 사람들이, 아주 잠깐이나마 상대를 다시 사람으로 알아본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브레흐만은 바로 그 점을 붙든다. 인간은 극한의 상황에서도 완전히 비인간적으로만 움직이지는 않는다는 것.


S.L.A. 마샬의 연구 역시 비슷한 질문을 던진다. 그는 2차 세계대전 후 수백 명의 병사를 직접 인터뷰해 전투 행동을 분석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실제 전투에서 적을 향해 방아쇠를 당긴 병사의 비율이 15~25%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나머지는 부상자를 돌보고 동료를 엄호했지만, 살아 있는 사람을 직접 겨누는 그 행위만은 끝내 하지 않았다. 이후 군대는 이 심리적 저항을 제거하기 위해 훈련 방식을 통째로 바꿨다. 전쟁 기계가 인간의 선함을 극복하기 위해 따로 설계를 해야 했다는 이 역설은, 한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깨진 유리창 이론도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작은 무질서를 방치하면 큰 범죄로 이어진다는 이 이론은 오랫동안 "강한 통제가 필요하다"는 믿음을 뒷받침해왔다. 하지만 브레흐만은 범죄율 감소를 더 넓은 데이터 속에서 본다. 그러자 뉴욕만의 이야기로 설명되지 않는 흐름이 보인다. 경제, 인구구조, 환경 요인 등 여러 변수가 함께 작동하고 있었다.


중요한 건 이것이다. 사람을 믿지 말고 강하게 통제해야만 조직과 사회가 굴러간다는 믿음도, 생각보다 그렇게 단단한 진리가 아닐 수 있다는 점.


신뢰를 전제로 설계하면

1994년, 넬슨 만델라는 27년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이 됐다. 오랫동안 억압받아온 다수의 피해자들이 권력을 쥔 순간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보복을 예상했다. 어쩌면 그것이 더 현실적인 전망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델라는 다른 길을 택했다. 진실과 화해 위원회(TRC)였다. 가해자가 공개적으로 진실을 고백하면 처벌을 면제하는 방식은 당시에도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게 과연 정의냐는 질문은 당연했다.


그럼에도 결과만 놓고 보면, 그 선택은 분명 의미가 있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대규모 보복과 내전으로 치닫지 않고 체제 전환을 이뤄냈다. 상처가 사라진 것은 아니고, 완벽한 해결도 아니었다. 그래도 최악의 시나리오를 피했다는 점은 분명했다.


브레흐만은 여기서 한 가지를 묻는다. 사람을 의심하고 통제하는 방식만이 현실적인가. 어쩌면 인간 안의 더 나은 가능성을 전제로 설계하는 편이, 때로는 더 현실적인 것 아닐까. 이 질문은 책 속의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곧바로 내 이야기로 들어왔다.


리더에게 남는 질문

책의 마지막에서 브레흐만은 몇 가지 단순한 원칙을 제시한다. 의심이 들면 최선을 상정하라. 윈-윈 시나리오를 생각하라. 질문하라. 상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라. 현실주의자가 되라.


처음엔 고개가 끄덕여졌다. 맞는 말이었다. 그런데 곧 이런 생각이 들었다. "최선을 상정하라"는 원칙은, 모르는 사람에게 적용하기는 오히려 쉽다. 선입견이 없으니까. 정말 어려운 것은 오래 알아온 사람을 다시 보는 일이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오래 함께한 사람, 같이 고생한 사람, 익숙한 사람에게 마음이 더 가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문제는 그 자연스러움이 판단까지 흔들기 시작할 때다. 그러면 어떤 문제는 가볍게 넘기고, 어떤 불편한 말은 제대로 듣지 않게 된다. 그리고 그런 작은 차이가 쌓이면 조직 안에서는 생각보다 큰 편향이 된다. 능력 있는 사람, 새로 들어온 외부 경력자, 다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씩 떠나기 시작한다. 그들이 떠나는 이유를 리더는 종종 뒤늦게 깨닫는다.


결국 중요한 것은 '사람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만이 아닌 것 같다. 누구를 더 쉽게 믿고, 누구에게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지, 그걸 스스로 아느냐의 문제에 더 가깝다.


오래된 사람에게 선의를 보내는 일은 어렵지 않다. 정말 어려운 것은 새로 온 사람에게도 같은 여지를 주는 일이다. 나와 다른 방식으로 말하는 사람,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의견을 내는 사람의 말도 끝까지 들어보는 일이다. 아마 리더십의 질은 거기서 갈린다. 편한 관계에서는 누구나 너그러울 수 있다. 진짜 차이는 불편한 관계에서 드러난다.


스탠퍼드 감옥 실험은 우리가 믿어온 방식 그대로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키티 제노비스의 38명은 사실과 달랐다. 이스터섬은 단순한 자멸의 신화가 아니었다. 전쟁터에서도 사람은 끝내 서로를 완전히 사물처럼 대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근거로 사람을 판단해왔던 걸까.


리더가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은 결국 조직의 공기가 된다. 그리고 그 시선은 '믿느냐, 믿지 않느냐'보다 먼저 — '누구를 어떻게 보고 있느냐'의 문제다.


당신은 오늘, 구성원 모두를 같은 눈으로 보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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