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변화를 여는 질문

전략적 질문이 던지는 메시지

by 씨알

답을 주려는 사람의 실패

누군가가 문제를 들고 왔을 때, 우리의 첫 번째 본능은 답을 주는 것이다. 경험이 많을수록 그 본능은 강해진다. 해결책이 보이니까. 더 좋은 방법을 아니까. 그래서 말한다. 조언하고, 제안하고, 때로는 지시한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아무리 정확한 답을 주어도, 상대는 움직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고개를 끄덕이고 메모까지 하지만, 몇 주 뒤 달라진 것은 없다. 왜 그런가.


프랜 피비(Fran Peavey)는 이것을 '컨설턴시 질병'이라고 불렀다. 한 사회에서 다른 사회로,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이동하며 "내 생각에 당신은 이렇게 해야 한다"고 말하는 습관. 그 조언이 아무리 정확해도, 당사자가 스스로 만들어 낸 전략이 아니면 그 변화는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겉으로는 바뀐 것 같아도 사람들은 그 변화를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않는다.


답의 문제가 아니다. 답이 도착하는 방식의 문제다.


아이다호에서 갠지스강까지

프랜 피비는 미국 아이다호 출신의 사회변화 활동가다.

피비가 인도에 가게 된 이야기부터 시작해 보자. 인도 친구가 갠지스강을 정화하는 일을 도와 달라고 했을 때, 그녀는 하수 처리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강을 청소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아는 한 가지가 있었다. 사회변화를 위한 전략을 세우는 법, 더 정확히는 '질문하는 법'이었다.


피비는 현지에 도착해서 곧바로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았다. 대신 물었다.

"강을 볼 때 무엇이 보입니까?"

"아이들에게 강의 상황을 어떻게 설명합니까?"

"강의 상태에 대해 어떻게 느끼십니까?"


그녀가 처음부터 "이 강은 오염되었다"고 말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인도에서 갠지스강은 어머니와 같은 존재다. 그것은 문화적 모욕이 되었을 것이고, 사람들은 마음의 문을 닫았을 것이다. 피비는 그 대신, 사람들이 자기 언어로 문제를 말하도록 공간을 열었다.


반복해서 들려온 답은 이것이었다. "강은 거룩하지만, 더 이상 순수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강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피비는 이 답을 듣고 자기 자신이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오염'이라는 추상적 단어 대신, '사람들이 강을 돌보지 않고 있다'는 프레임이 들어왔다. '오염'은 주의를 강에게 돌리면서 사람의 책임을 흐리는 단어다. 마치 강이 스스로 오염된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돌봄의 부재'라는 프레임은 사람의 행위와 책임을 정면으로 가리킨다.


질문이 질문하는 사람을 먼저 바꾸었다.


짧은 지렛대와 긴 지렛대

피비는 질문을 페인트 통의 뚜껑을 여는 지렛대에 비유한다. 짧은 지렛대로는 틈만 낼 수 있지만, 긴 지렛대가 있으면 뚜껑을 활짝 열고 안의 내용물을 휘저을 수 있다.


우리가 습관적으로 던지는 질문 대부분은 짧은 지렛대다.

"왜 아직 그렇게 하지 않았나요?" — 방어를 유발한다.

"이 방법을 고려해 본 적 있나요?" — 예 또는 아니오로 끝난다.

"시드니로 이사하는 게 어때?" — 질문인 척하는 제안이다.


반면 긴 지렛대 질문은 이렇게 생겼다.

"어떤 종류의 곳에서 살고 싶어?"

"행복하게 살고 있는 모습을 떠올릴 때, 어떤 장소들이 생각나?"

"이 이사가 너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갖고 있지?"


차이가 느껴지는가. 짧은 지렛대 질문은 질문하는 사람의 판단을 전달한다. 긴 지렛대 질문은 질문받는 사람의 내면을 열어 놓는다. 전자는 방향을 지시하고, 후자는 공간을 만든다.


피비는 이 차이를 태극권의 원리로 설명한다. 장애물을 정면으로 밀면 오히려 더 단단해진다. 그러나 장애물의 에너지와 함께 움직이며 그 힘을 받아들이면, 양쪽 모두 출발점과 전혀 다른 곳으로 이동하게 된다. 관계 자체도 변한다.


답을 주는 것은 미는 행위다. 질문을 여는 것은 함께 움직이는 행위다.


변화를 만드는 질문의 일곱 가지 성격

피비가 정리한 전략적 질문의 핵심 원칙은 일곱 가지다.


첫째, 전략적 질문은 움직임을 만든다. 정적인 질문은 현재를 고착시킨다. "왜 안 되나요?"는 방어를 부른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움직일 수 있을까요?"는 다음 한 걸음을 상상하게 한다. 진단이 아니라 움직임이 목표다.


둘째, 전략적 질문은 선택지를 만든다. 사람은 두 가지 선택지가 생기면 결정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피비는 이것을 '통제의 환상'이라고 부른다. 두 가지는 하나보다 복잡하지만, 세계는 두 가지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흥미롭다.

피비의 친구 이야기가 이것을 잘 보여 준다. 딸이 갈등 끝에 가출하려 하고 있었다. 딸을 보내느냐, 기차역에 가서 데려오느냐. 두 선택지 사이에서 친구는 꼼짝 못하고 있었다. 피비가 물었다. "딸의 갈등을 풀어 주기 위해 당신이 할 수 있는 다른 일은 뭐가 있을까?" 잠시 뒤, 친구는 전혀 새로운 답에 도달했다. 딸과 함께 기차에 타서, 12시간 동안 대화하며 문제를 풀어 보겠다는 것이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창의적 선택지가 보이지 않는다. 질문이 세 번째 문을 열어 주었다.


셋째, 전략적 질문은 더 깊이 파고든다. 표면의 문제와 진짜 문제는 다르다. 긴 지렛대 질문은 표면을 걷어내고 그 아래까지 내려간다.


넷째, 전략적 질문은 '왜'만 묻지 않는다. "왜 참여하지 않나요?"와 "당신이 참여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의 차이를 느껴 보라. 같은 방향의 질문이지만 에너지의 흐름이 전혀 다르다. 전자는 과거를 심문하고, 후자는 현재를 탐색한다.


다섯째, 전략적 질문은 예·아니오 답을 피한다. 전략적 질문 수업을 들은 어느 학생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아내에게 던지는 거의 모든 질문이 예·아니오로 끝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부부가 함께 일주일 동안 예·아니오 질문을 쓰지 않기로 약속했다. 그 주에 둘은 결혼 후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여섯째, 전략적 질문은 힘을 실어 준다. 피비가 인도에서 "당신의 강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 질문에는 두 가지가 전제되어 있었다. 당신이 이 문제의 당사자라는 것. 당신 안에 이미 답의 일부가 있다는 것. 이것이 힘을 주는 질문의 구조다.


피비가 좋아하는 질문이 하나 있다. "이 이슈에서 당신이 변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환경운동가가 벌목업자에게 이 질문을 던진다고 상상해 보라. 그것은 비난이 아니라 초대가 된다. 사업의 미래를 공동체와 함께 다시 설계해 보자는 초대. 거기서 나오는 계획은 어느 한쪽이 처음에 원했던 것과 다를 수 있다. 그러나 대화를 통해 태어난 새로운 현실은 양쪽의 목표를 동시에 담을 수 있다.


힘을 실어 주는 것은 조작의 정반대다. 조작은 상대의 머릿속에 아이디어를 집어넣는다. 전략적 질문은 이미 그 사람 안에 있는 것을 꺼내어 다루게 한다.


대규모 경찰 조직의 사례가 이것을 보여 준다. 구조조정 이후 동료들 사이에 스트레스와 불만이 쌓이고 팀워크가 무너졌다. 몇 주간의 회의에서 그들은 "우리 방식의 무엇이 문제인가?"라고만 묻고 있었다. 전략적 질문을 접한 뒤 질문이 달라졌다. "우리가 팀으로 기능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우리는 어떻게 함께 일하고 싶은가?", "각자에게 필요한 지원은 무엇인가?" 사기가 살아나고, 회의가 창의적으로 변하고, 팀워크가 회복되기 시작했다.


일곱째, 전략적 질문은 '묻기 어려운 질문'을 묻는다. 모든 사회에는 금기시되는 질문이 있다. 그런데 바로 그 금기 때문에 그 질문에는 가장 큰 힘이 숨어 있다. 옷을 입지 않은 왕에게 사실을 드러낸 것은 아이의 질문이었다. "왕은 왜 옷을 입고 있지 않죠?"


피비는 한 발 더 나아간다. 중병 환자에게 "당신은 살고 싶은가요, 죽고 싶은가요?", 일중독자에게 "당신은 기쁨을 위해 무엇을 하나요?", 정치인에게 "상대 정당의 공약 가운데 당신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이 질문들은 이슈의 표면이 아니라, 그 이슈를 떠받치고 있는 가치와 전제를 건드린다. 그래서 어렵다. 그러나 그래서 강력하다.


씨앗으로 심어진 질문, 꽃으로 돌아온 답

갠지스강 이야기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포스터 대회의 탄생 과정이다.


사람들은 강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피비는 생각했다. 이 일은 다음 세대에 걸쳐야 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 어른들에게 한 가지 질문을 추가했다.

"강을 정화할 수 있도록 당신은 아이들을 어떻게 준비시키고 있습니까?"


하나같이 돌아온 답은 같았다.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공백은 오래 머물 수 없었다. 강에 대한 깊은 사랑, 아이들에 대한 사랑,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 이 세 가지가 같은 마음 안에서 공존할 수 없었다. 인지적 불협화음이 너무 컸다.


일주일 뒤, 피비가 샤워를 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달려왔다. "피비, 당장 오세요. 엄청난 아이디어가 나왔어요." 그들이 내놓은 계획은 이것이었다. 베나레스의 학생들에게 강의 건강 상태를 포스터로 그리게 하고, 큰 음악 행사에서 그 포스터를 전시하자. 아이들의 눈에 비친 강을 어른들이 보게 되면, 부끄러움이 행동으로 바뀔 것이다.


이 아이디어는 어디서 온 것인가. 피비가 낸 것이 아니었다. 그 방에 있는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일주일 전 심어진 질문이 작동하고 있었다. 질문이 씨앗이었고, 포스터 대회가 꽃이었다.


그 뒤로 매년 500명에서 800명의 아이들이 갠지스강 둑에 모여 포스터를 그렸다.


피비는 말한다. 강력한 질문에 당장 답이 없어도 실망하지 마라. 아주 긴 지렛대 질문은 던져진 순간에는 답이 없을 수 있다. 그러나 며칠, 몇 주 동안 마음속에서 계속 덜그럭거린다. 씨앗이 심어졌다면 답은 자라난다.

질문은 살아 있다.


듣기는 바라보기다

전략적 질문의 나머지 절반은 질문이 아니라 경청이다. 피비는 이것을 '역동적 경청(dynamic listening)'이라고 부른다.


보통의 경청은 상대의 말을 들으면서 머릿속으로 반응을 준비한다. 다음에 무슨 말을 할지 생각하고, 판단하고, 때로는 딴생각을 한다. 역동적 경청은 다르다. 그것은 듣기보다 바라보기에 가깝다.


피비의 표현이 정확하다. 당신의 귀는 맞은편 사람의 가장 깊은 곳을 향한다. 그 사람의 생각, 감정, 꿈, 존재의 본질에 귀를 기울인다. 당신의 귀는 말 사이, 한숨 사이, 질문 사이를 오가며 의미와 결의와 움직임과 필요를 찾는다.


구체적으로 역동적 경청은 무엇을 '보는' 것인가. 피비는 이렇게 정리한다. 사람들이 왜 돌봄에서 멀어지는지, 행동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무엇인지 본다. 무엇이 사람들을 밀어 움직이게 하는지, 그리고 왜 이 문제에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느끼는지 본다. 그 사람이나 집단이 세상을 어떤 모습으로 바꾸고 싶어 하는지 본다. 변화의 길에 놓인 저항을 어떻게 줄일지 본다. 마음 깊은 곳에 심겨 있는 꿈과 목표를 본다.


음악가 카렌 해그버그의 말이 이것을 보충한다. 피아니스트는 세심하게 듣지 않으면 같은 한 음이 얼마나 다양하게 연주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연습 중에조차 우리는 자기 연주를 제대로 듣지 않는다. 상상의 연주를 듣거나, 실제로 듣기보다 '느끼기'만 하거나,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생각하는 것은 듣는 것이 아니다. 판단하는 것도 듣는 것이 아니다. 듣기는 오직 듣기다.


우리가 정말로 귀를 기울이는 순간이 있다. 보통은 위험을 감지했을 때다. 발걸음을 멈추고, 귀가 쫑긋 서고, 생사가 달린 것처럼 듣는다. 피비는 말한다. 전략적 질문에 필요한 경청이 바로 그런 것이라고. 누군가의 삶이 달려 있는 것처럼 들어야 한다고. 실제로 그렇기 때문이라고.


질문의 계단: 사실에서 행동까지

피비는 전략적 질문을 한꺼번에 던지지 않는다. 단계가 있다.

1단계 — 사실과 관찰. 무엇이 보이는가? 무엇을 듣고 있는가? 어떤 정보를 갖고 있는가? 상황을 함께 보는 단계다.

2단계 — 분석. 이것이 왜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누구의 동기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의미를 함께 읽는 단계다.

3단계 — 감정. 이 상황이 당신에게 어떤 감정을 일으키는가? 몸에서 무엇이 느껴지는가? 피비는 이 단계를 절대 건너뛰지 말라고 강조한다. 감정이 처리되지 않으면 생각이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한다. 감정을 고칠 필요는 없다. 고칠 수도 없다. 다만 존중하며 들어야 한다.

4단계 — 비전. 당신은 이것이 어떻게 되기를 바라는가? 이 상황이 당신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 여기서부터 '있는 것'에서 '될 수 있는 것'으로 이동이 시작된다.

5단계 — 변화. 그 비전에 도달하려면 무엇이 달라져야 하는가? 누가 차이를 만들 수 있는가? 비슷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그것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6단계 — 대안과 장애물. 가능한 모든 방법을 탐색하고, 각 방법 앞에 놓인 장애물을 확인한다. 특정 대안에 편향되지 않고, 겉보기에 이상한 아이디어까지 포함시킨다.

7단계 — 지원과 행동. 당신에게 필요한 지원은 무엇인가? 누구와 이야기해야 하는가? 내가 어떻게 도울 수 있는가? 구체적인 다음 한 걸음을 함께 설계한다.


이 계단은 한 번에 다 올라갈 필요가 없다. 피비도 말한다. 결정이 분명하지 않으면 억지로 만들지 마라. 며칠간 숙고하고, 며칠 밤 꿈속에서 다듬는 시간이 필요할 수 있다.


당사자의 '변화관'을 읽어라

피비가 소개하는 개념 가운데 '변화관(change view)'이라는 것이 있다. 사람은 저마다 변화가 어떻게 일어난다고 믿는지에 대한 숨겨진 관점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사람들에게 '사회에서 어떤 변화를 보았는가'를 묻으면 자주 나오는 사례가 흡연 문화의 변화다. 그 변화가 어떻게 일어났는지 물으면 답이 사람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법률 변화를, 누군가는 교육 캠페인을, 누군가는 담배회사에 대한 소송을 꼽는다.


여기서 피비의 관찰이 날카로워진다. 교육 캠페인을 변화의 핵심이라고 본 사람은, 다른 이슈에서도 교육 캠페인에 에너지를 쏟을 가능성이 높다. 소송을 말한 사람은 법적 도전을 선호한다. 글을 쓰는 사람은 대중 기사의 힘을 믿는다. 사람이 기꺼이 쓸 전략은 바로 그 사람의 변화관에서 나온다.


인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피비가 "변화가 어떻게 일어났는가"를 물었을 때, 사람들은 영국 지배로부터의 독립 과정을 말했다. 사티아그라하, 단식, 직접행동, 시민 총회, 수도로의 행진. 그것이 바로 오늘날 그들이 갠지스강 정화를 위해 기꺼이 사용할 전략이기도 했다.


그래서 물어야 한다. "당신이 보아 온 가장 의미 있는 변화는 무엇이었고, 그것은 어떻게 가능했나요?" 이 질문의 답에 그 사람이 앞으로 쓸 전략의 씨앗이 들어 있다.


고통을 듣는 사람

피비의 글에서 가장 무겁고 가장 중요한 대목은 '고통을 들어라(Listen to Pain)'라는 부분이다.


고통을 듣는 것은 단지 듣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 고통의 현실을 부정하지 않은 채 자기 마음 안으로 충분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용기와 취약함이 모두 필요하다.


삶의 중요한 문제에 대해 질문을 던지면, 결국 아픈 곳을 건드리게 된다. 빈곤, 환경 파괴, 차별, 폭력. 이 이슈들은 사람들에게 너무 두렵고 너무 아픈 경험과 연결되어 있어서, 주제를 여는 것만으로도 압도적일 수 있다. 타인의 고통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무력감이다. 내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가.


피비는 여기서 급하게 해결책으로 넘어가지 말라고 말한다. 개인의 고통은 고립된 것이 아니라 집단적 고통과 연결되어 있으며, 그 고통을 낳거나 외면하는 방식은 공동체와 제도의 수준에도 존재한다. 감정을 고칠 필요는 없다. 고칠 수도 없다. 다만 존중하며 들어야 한다.


경청은 돌봄이다. 변화가 익어 가도록 기다리는 것도 돌봄이다. 돌봄은 치유다.

고통의 세계 안으로 전략적 질문을 가져갈 때, 우리는 그 세계가 스스로를 치유하는 과정의 일부가 될 수 있다.


이제 나아가, 질문하라

피비는 정보만으로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한때 사회변화 운동에서는 사람들에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려 주기만 하면 필요한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정보는 출발점일 뿐이다. 실제로는 그 이슈에서 움직임이 일어나도록 촉진하고, 변화에 필요한 집단적 의지를 만들고 유지해야 한다.


힌디어에 '선컬프(sunculp)'라는 말이 있다. 개인의 의지가 아니라 전체 맥락의 의지에 접속하는 과정, 사회 전체를 향한 결심과 헌신을 뜻하는 말이다. 피비는 전략적 질문이 소심한 사람 안에서도 이 선컬프를 불러낼 수 있다고 말한다.


피비의 마지막 관찰은 냉소에 대한 것이다. 그녀는 시민들의 무관심을 보는 것이 아니라, 너무 깊이 돌보았다가 실망하게 될까 두려워하는 마음을 본다고 말한다. 수동적이고 고립된 방식으로 세계에 대한 정보를 받아들이고, 그 수동성에 도전하면 자신이 가진 것을 잃게 될까 두려워하는 사람들. 해방의 습관과 멀어진 사람들. 동시에 자기 자신, 가족, 사회와 더 나은 관계를 갈망하는 사람들.


우리가 무엇을 하든, 혹은 하지 않든, 그것은 우리가 함께 사는 삶에 영향을 준다. 변두리에 앉아 있더라도 우리는 자원을 소비하고, 관계를 맺고, 어떤 목표를 향해 살고 있다. 중요한 것은 '관여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다. 이미 관여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관여할 것인가'다.


피비는 이렇게 권한다.

"상상력만이 한계가 되는 깊고 역동적인 질문부터 시작하자. 이웃과 동료가 실제로 무엇을 생각하는지 들어 보자.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싶어 하고, 무엇이 되고 싶어 하는지를 충분히 들은 다음에는, 사람들 자신에게서 나온 전략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자."


답을 주는 것은 쉽다. 질문을 여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사람과 변화는 답이 아니라 질문에서 열린다.


그리고 질문은 살아 있다.


※ 이 글은 Fran Peavey 저, Vivian Hutchinson 편, 『Strategic Questioning: An Approach to Creating Personal and Social Change』(1997)를 기반으로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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