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남편의 말년운

웃음의 힘은 싸우고도 춤추게 한다

by 하얀 나비
딸이 그린 크리스마스 카드입니다



남편과 내가 40년 동안 결혼 생활을 이어올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내가 잘 웃는 사람이거나, 남편이 잘 웃기는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심하게 싸워도 한번 웃으면 봄 눈 녹듯이 폭탄이 녹아버려 전투력을 상실하고 만다.


웃으면 지는 거다.



남편은 순수하고 어찌 보면 얍삽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가끔은 너무 순해 보여서 말다툼을 하고 있을 때도 나 스스로 마음이 풀려 버리곤 한다.



어느 날 크게 언쟁을 하고 난 뒤 나는 소파에 누워 있었다.


남편은 뭔가를 들고 내 앞을 지나서 베란다로 나가려 했다.



유리문이 닫혀 있었는데 열린 줄 알고 그대로 꽝 부딪히면서 큰 소리와 함께 만화처럼 뒤로 튕겨나갔다.


충격으로 안경이 삐뚤어져 떨어질 듯 한쪽 귀에 걸려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웃으면 지는 건데


그걸 끝내 참지 못하고 웃고 말았다.



남편의 신경이 앞에 있는 유리문을 무시하고 모두 뒷 쪽 소파에 있는 나에게로 쏠려 있었을 것이다.



어떤 날은 다투고 난 뒤 냉랭한 공기 속에 남편 혼자 소파에 앉아 외국 영화를 1시간째 보고 있었다.


1층에서 아들이 올라와 물었다.



“아빠 뭐 봐?”



“쥬라식 파크”



아들이 화면을 잠시 보더니 말했다



“아빠 이거 쥬라식 파크 아닌데”



남편은 의문점이 풀린 듯 말했다


“어쩐지 끝날 때가 다되어 가는데도 공룡이 안 나오더라.”



그날도 나는 마시던 물을 뿜으며 웃고 말았다.



남편은 영화를 틀어놓고 있었지만 사실은 나와의 화해의 기회를 기다리며 온 신경이 나를 향해 있었던 거다.



맨날 나한테 그 마음을 들키고 만다.


그래서 싸움이 오래가지 못한다.



제발 웃지 마라 웃지 마라


나에게 마법을 걸어보지만 소용이 없다.



사실은 결혼 전부터 그랬다.


그걸 그때 알아봤어야 했다.



풍경이 멋진 곳에서 남편이 벤치에 앉아있고 내가 사진을 찍어주었다.



나중에 사진을 보니 남편이 벤치에 앉아있지 않고 벤치옆 공중에 엉거주춤 무릎을 구부리고 있었다.



“아니 이게 뭐야?


왜 이러고 있었어?”



“자기가 자꾸 조금만 더 왼쪽으로 조금만 더.


아주 좋! 그렇게 벤치가 끝났는데도

자꾸 그렇게 가라니까 그랬지”



남편은 집안일을 거의 돕지 않는다. 결혼 초부터 그랬다.



“아버지가 집안일하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그 말이 남편의 모든 태도를 대변했다.


밥상이 다 차려질 때까지 꼼짝도 안 하고 기다린다.



그날도 남편이 집안일을 너무 안 도와줘서 싸운 날이었다.



방에 누워있다가 나와보니 남편과 어린 딸이 바가지와 플라스틱 통에 물을 받아 열심히 세탁실로 나르고 있었다.



“뭐 하는 거야?”



내 말엔 대꾸도 없이 둘이 열심히 화장실에서 세탁실로 물을 날랐다.



“빨래는 많은데 세탁기에 물이 넉넉하게 없어서”


나는 물조절 버튼을 눌러 주었다.


세탁기에서 물이 콸콸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남편은 은근히 머리가 좋다.


나의 설명서를 손에 쥐고 잘 써먹는다.


설마 이런 어리숙한 행동들이 모두 계산해서 만든 몸게그인 건 아니겠지?



처음 만남이 내 손으로 이루어졌듯이


남편은 모든 일에 망설이다 끝난다.


돌다리를 두드려 보고 또 두드려 보고 두드리다 결국 건너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답답한 내가 모든 일에 앞장서게 되었다.



어려서 시어머님이 막내인 남편을 금이야 옥이야 다칠까 봐 집 안에서만 키우셨다.



한 살 차이 나는 누나와 이모와 지내다 보니 여자들이 하는 놀이를 즐겨했다고 한다.


형을 오빠라고 불렀다고 한다.


나갈 때는 시어머니의 치맛자락을 꼭 잡고 다녔다.



어느 날 김치를 담그고 있을 때였다.


남편은 TV 앞에 앉아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나이가 들수록 드라마 취향이 넓어져 자기 전까지 줄줄이 챙겨 보느라 하루가 모자랐다.



드라마를 보면서 다행히 우는 모습은 아직 보지 못했다.



배추를 잘라 달라고 부탁했다


남편은 귀찮다는 듯


“천천히 하지 뭐가 그렇게 바쁘다고”


라고 말했다.



“천천히 오~래 혼자 다하지 왜 날 불러”


그런 뜻으로 들렸다.



그러나 나의 눈총을 오래 버티지 못하고 큰 스테인리스 그릇에 담긴 배추를 번쩍 들어 TV 앞에 가져가 앉았다.


눈은 여전히 TV에 꽂혀 있었다.



1분쯤 지났을까 갑자기 악하는 비명이 났고


손을 감싸 쥐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칼에 손을 베인 것이다.



“크게 다친 것 같아 응급실 가자”


남편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있었다.



응급실에서 무려 7시간을 기다린 끝에 의사를 만날 수 있었다.


의사는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이건 경미해서 해 드릴 게 없어요.


걱정되시면 파상풍 주사나 맞으세요.”



우리는 파상풍 주사만 맞고 집에 돌아왔다.



그날 이후로 나는 남편에게 칼 드는 어떤 일도 부탁하지 않는다



그랬던 남편이 몇 년 전부터는 조금씩 달라졌다.


숟가락을 식탁에 놓아주고 반찬도 꺼내고 세탁기에 빨래를 넣고 돌리고 청소기까지 돌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시무룩한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다



“내 말년운이 안 좋은 것 같아”



나는 또 웃음을 참지 못했다.

이러다가 100세까지 같이 살 것 같다.


MERRY CHRISTM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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