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엄마가 함께 살았다. 새엄마 작은엄마 엄마
나의 어릴 적 기억은 엄마의 향기로 시작된다.
“어미야 애기 젖 먹여라”
할머니의 부름에 밭을 매던 엄마가 나를 안았다.
땀냄새와 풀냄새가 섞인 향긋한 엄마 냄새가 달콤한 모유와 함께 입안을 가득 채웠다..
할머니는 우리 집 여자들의 대장이셨고 할머니 말씀은 아무도 거역하지 않았다.
햇살이 가득한 풀밭에서
할머니는 토끼풀로 반지도 만들고 머리띠도 만들어 주셨다.
밤에는 할머니 품 안에서 옛날이야기를 듣고 잠이 들었다.
“우리 손녀 한복을 입히면 얼마나 예쁠까?”
할머니의 소원대로 나는 한복을 입고 온 가족이 둘러앉은 방에서 신이 나서 춤을 추었다.
할아버지를 뺀 가족이 모두 손박자를 맞추며 웃고 있었다. 아버지의 밝은 웃음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숨이 차서 춤을 멈추었을 때 나는 너무 많은 시선에 수줍어서 옷장으로 몸을 숨겼다.
그들의 마음 깊숙이 잠들어 있었던 흥이 잠시 모습을 보였던 순간이었다.
내 기억에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온 가족의 웃음소리였다.
우리는 충청남도 당진 시골마을에 살았다.
아랫집에 농촌청년회를 만들고 경찰을 지망하고 태권도를 가르치는 오빠가 살고 있었다.
어느 해 추석 명절날 저녁 그 오빠가 새엄마하고 아빠와 이야기를 나눈 뒤 나를 번쩍 어깨에 올려 목마를 태우고 마을 회관 같은데로 데려갔다.
오빠가 커튼을 열어줄때 그냥 “아빠"하고 뛰어나가라고 나에게 말했다
나는 컴컴한 커튼 뒤쪽에 있었고 그 오빠가 나가라고 커튼을 조금 열어줬다.
나는 시키는 대로 “아빠” 하고 커튼 밖으로 달려 나갔는데 거기엔 많은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고 모두들 아주 크게 웃었다.
나는 무슨 영문인지 몰랐고 당황했지만 그 오빠가 나를 목마를 태우고 다시 집으로 데려다주며 아주 잘했다고 칭찬을 해주었다. 연극 같은 걸 했었나 보다.
내 어릴 적 기억은 연극에 잠깐 나왔던 그때처럼
전체의 모습은 알 수 없고 커튼이 살짝 열렸을 때만
보았던 모습과 같은 짧은 기억들만 남아있다..
할머니는 계란형 얼굴에 긴 머리를 곱게 빗어 뒤로 비녀를 꽂아 쪽을 지셨다.
온화한 얼굴에 감성이 풍부하시고 몸은 호리호리 하셨고 허리가 굽으셨다.
할머니는 매우 부잣집 큰딸이셨는데 딸만 셋 있던 부모님이 돌아가시면서 큰딸인 할머니에게는 둘째나 셋째보다 더 많은 큰 재산을 물려주셨다.
동네에서 할머니땅을 밟지 않고는 다닐 수가 없을 정도였다고 했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도박에 빠져 그 많던 재산을 거의 탕진하시고,
일본에 가신 후 5년이 넘게 연락이 없으셨다.
가족들은 모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5년이 지난 후 초라한 모습으로 나타나신 할아버지는 할머니와 이웃남자와의 관계를 소문으로 듣고 할머니한테서 등을 돌리셨다.
그 이후 두 분은 서로의 그림자처럼 말없이 지내셨다.
할아버지는 얼굴이 동그랗고 키가 작고 벗어진 머리에 까만 갓을 쓰고 계셨고 희끗희끗한 턱수염을 기르셨다.
눈이 아주 날카롭고 강한 기운이 느껴지는 분이셨다.
할아버지는 집에 돌아오신 이후로 거의 매일 낚시를 하러 나가셨다.
붕어를 많이 잡아 오셨다.
할아버지가 없을 때 새엄마는 붕어를 손질하고 요리하는 게 아주 지겹다고 투덜거리셨다.
할아버지는 아버지나 새엄마에게는
존경할만한 어른이 아니었다.
그저 재산을 탕진하고 밥이나 축내는
쓸모없는 노인네 였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매일 밖에서 시간을 보내셨지만
친구들과 크게 싸우는 바람에 나가지도 못하시고
방에서 라디오만 듣고 계셨다.
내 남동생은 할아버지가 사랑하는 손주였다.
손주는 남자애인데도 인형같이 예쁘고 귀여웠다.
할아버지는 낚시를 안 나가시고 손주의 재롱을 볼때만 웃으시며 시간을 보내셨다.
손주에게 노란 오리 모양 장난감을 사다 주고
기뻐하셨다.
할머니는 아들이 둘 있었는데 아버지가 큰아들이고
작은 아들은 아주 똑똑하고 활발하여 마을을 위하여
청년연맹에서 일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해방 후 작은아버지를 시기했던 사람들이
북한 빨갱이라고 누명을 씌워 끌려가신 뒤
소식이 없었다.
소문에는 끌려간 사람들 모두 다 죽임을 당했다고도 했다.
그러나 무서워서 아무도 빨갱이가 아니라고
말도 못 하고 숨죽이고 살았다
할머니는 술을 마시면 자주 우시며 노래를 불렀다.
“석탄 백탄 타는 데는 연기도 펄펄 나는데 이내가슴 타는 데는 연기도 김도 아니 나네”
그 노랫말은 할머니의 속타는 마음이었다.
할머니의 작은아들이 잡혀가시고 얼마 후 작은엄마의 임신사실을 알게 되었다.
갈 곳 없는 작은엄마가 아들을 낳아 키우며 그 집에서 같이 살았다.
새엄마의 괄괄한 성격 때문에 작은 엄마는 언제나 숨을 죽이고 살았다.
집안에 다툼이 생기면 작은엄마는 나를 포대기로 감싸서 등에 업고 뒷산으로 올라가며 하소연을 하셨다.
“아휴 새엄마 성질머리 때문에 내가 힘들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남편이 없는 내가 제일 서러운데 이 꼴을 맨날 봐야 하니…”
작은 엄마는 마음이 좋아질 때까지 나를 업고 걸으시며 그렇게 나에게 말을 하셨다.
“내가 좋아? 새엄마가 좋아? 내가 좋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엄마와 나는 한편이 되었다.
나는 너무 어려서 작은엄마의 사정을 몰랐지만 작은엄마가 참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집은 2개의 밥상에 따로 앉아서 먹었다.
큰상에는 남자들과 할머니가 앉으셨다.
나는 할머니 무릎에 앉았다.
둥글게 생긴 조그만 양은으로 만든 접는 밥상에는 엄마와 새엄마가 앉았다.
그 밥상에 반찬이라고는 김치찌개와 어제 먹다 남은 반찬 같은 게 있었다.
반찬도 맛있는 것은 다 남자들 밥상에 놓여있었다.
그리고 아이들은 할머니나 할아버지 무릎에 앉아 물에 만 밥에 계란찜이나 고등어자반을 얹어서 먹여주셨다.
구수한 된장찌개와 여러 종류의 김치가 항상 빠지지 않았고 짭짤한 고등어자반이나 갈치자반, 간장게와 달걀찜과 감자조림이 있었다. 김도 가끔 올라왔고 여름엔 오이무침과 가지무침, 마늘종 무침, 된장에 묻어뒀던 깻잎이 떨어지지 않았다.
할머니는 엄마가 애기 젖을 먹이니 잘 먹어야 한다고 밥상에서 음식을 엄마에게 당겨주셨다.
새엄마는 그걸 싫어하셨다.
새엄마도 어리셨던 것 같다.
엄마가 내게 젖을 먹이려고 밭에서 나와 앉아있는 동안에 밭일을 쉬지 않느냐고 할머니께 불평을 했다.
새엄마는 아버지와 결혼 후 아들을 낳았으나 3개월 만에 그만 홍역으로 아기를 잃고 말았다.
그 후로 몇 년을 기다려도 아기가 생기지 않았다.
새엄마는 생리가 시작될 때마다 실망하여 방에 누워 며칠씩 울고 나오지 않았다.
가족들도 모두 어둠이 드리워진 시간을 똑같이 겪어야 했다.
대를 이어야 한다는 어른들의 강요에 하는 수 없이 둘째 부인을 얻게 되었다.
그 일로 할머니와 새엄마의 의 관계가 안 좋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새엄마의 자리를 넘보지 않을 만큼 뭔가 부족한 사람을 찾다가 구한 사람이 나의 엄마였다.
둘째 부인으로 들어왔다기보다는 씨받이가 맞는 말이었다.
외할머니의 큰딸이었던 엄마는 굿을 하러 다니는 남자와 결혼을 하였는데 한번 나가면 열흘씩 걸리기도 했다.
엄마가 아기를 낳을 때쯤 남편은 굿을 하러 나갔고 엄마 혼자서 출산을 하게 되었다.
산속에 위치한 집은 몹시 추웠고 먹을 것도 넉넉지 못했다. 연락할 방법도 없었고 도와줄 사람도 없었다.
혼자 고생 끝에 아기를 낳았지만 잃고 말았다.
엄마는 견디기 힘든 고통과 슬픔에 정신마저 놓아 버렸다.
그 후로 남편에게 버려지고 외할머니 집에서 계시다가 아버지의 둘째 부인으로 오게 되셨다고 한다.
신체는 아무런 장애가 없었지만 허공을 향해 자주 중얼중얼 혼잣말을 하셨다. 그러나 아무도 귀담아듣지는 않았다.
자세히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중간에 한숨을 짓는 것을 보면 신세한탄 같았다.
물을 많이 아끼셨고 음식도 가끔 숨기셔서 한참뒤 상한 채로 발견되곤 했다.
그때마다 새엄마의 꾸짖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는 맨날 혼나고 사셨다.
아무리 혼내도 달라지지 않는데 그냥 습관처럼 새엄마는 엄마를 혼내셨다.
엄마는 첫째로 오빠를 낳으시고 둘째로 나를 낳고 셋째로 남동생을 낳으셨다.
첫째인 오빠는 새엄마가 맡으시고 둘째인 나는 할머니가 맡으시고 셋째인 남동생은 할아버지가 맡으셨다.
자연스럽게 편이 나뉘었다.
언제부터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우리 삼 남매는 아무도 엄마를 엄마라고 부르지 않았다.
새엄마를 엄마라고 불렀다. 어른들이 그렇게 부르도록 한 것 같았다.
엄마에게는 별 호칭이 없었다.
어른들은 “어미야” 하고 불렀다.
우리 집의 나를 제외한 모든 여자들은 아무도 행복하지 않았다.
그저 저마다의 슬픔을 자기 몫으로 짊어진 채 그렇게 한 지붕 안에 살았다.
모두 비슷한 만큼의 슬픔들을 가져서
견디고 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