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답노트의 재구성1화

여전하네, 그 잔인하고 다정한 인사

by 하얀 나비
내가 만든 꽃바구니


"우산 안 쓰고 뛰어다니는 건 여전하네."


길 건너 세탁방을 가려고 신호등에 비를 맞고 서있는데 머리 위로 우산과 함께 그의 목소리가 젖은 어깨 위로 떨어졌다.


그의 목소리와 함께 13년 동안 닫아두었던 기억이 한꺼번에 내 앞에 쏟아져 내려왔다.


나는 대답 대신 축축해진 소매 끝만 애매하게 만지작거렸다.

여전하다는 그 말은 내게 칭찬도, 인사도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가 함께 써 내려가다 중단한 《오답 노트》를 다시 펼치라는 잔인하고도 다정한 명령 같았다.


세탁물을 챙겨 급하게 나오느라 화장도 안 하고 거울도 안 보고 나온 게 신경이 쓰였다. 세탁방 유리에 비친 내 엉망인 앞머리, 비에 젖은 나의 초라한 모습에 비해 얼핏 본 그의 모습은 좀 더 남자다워졌다고나 할까? 여유로운 표정. 멋있어진 그 모습에 설렘이 눈치 없이 고개를 들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3년을 더했건만, 왜 내 심장은 이 비좁은 세탁방 안에서 18살의 그때처럼 속수무책으로 널뛰고 있는 걸까.


현실은 소설이 아니라고, 이제는 그런 억지스러운 우연 따위 믿지 않는 어른이 되었다고 자부했는데. 그를 본 순간 마음이 쿵 내려앉고 말았다..


눅눅한 비냄새와 뜨거운 건조기 열기가 섞인 비좁은 세탁소안에서 그와 내가 다시 같이 숨 쉬고 있었다. 다행히 기계소리와 나의 심장소리가 섞여서 내 자존심을 지켜주고 있었다.


13년 전, 그는 체인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한 낡은 자전거를 탔었다. 갑작스레 소나기가 쏟아지던 하굣길, 그는 젖은 교복 소매를 걷어붙이며 나를 뒷자리에 태웠다. 우산도 없이 무모하게 빗속을 가르던 그 시절, 나는 그의 등 뒤에서 나는 눅눅한 비누 향기와 거친 숨소리를 들으며 이 비가 영원히 그치지 않기를 바랐다.


'꽉 잡아, 떨어진다!'


그의 외침에 못 이기는 척 그의 허리춤을 살짝 쥐었을 때 손끝으로 전해지던 뜨거운 온기. 그때 우리에게 지붕이란 고작해야 길가 편의점의 좁은 처마뿐이었지만, 젖은 어깨를 맞대고 서 있던 그 좁은 공간이 세상에서 가장 아늑한 성곽이었다."


13년 전 그날도 오늘처럼 비가 왔다.


정말 별것 아닌 일이었다. 그의 친구에 대한 이야기였고 사과 한마디면 끝났을 일에 우리는 각자의 자존심을 걸고 위험한 도박을 했다. 그놈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끝날 줄은 몰랐다.


"그렇게 내가 못 미더우면, 차라리 헤어져."


홧김에 내뱉은 내 말에 그는 한참을 침묵하다가 딱 한 마디를 남기고 빗속으로 자전거를 몰아 떠났다.


"그래, 네 고집대로 해."


그게 우리의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다. 다음 날이면 미안하다는 문자 한 통이 올 줄 알았는데, 그 문자는 13년 동안 도착하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가 먼저 굽히고 들어오길 기다리며 각자의 자존심이라는 성벽 안에 스스로를 가둬버린 멍청이들이었다


18살의 우리는 가진 거라고는 자존심밖에 없었다. 그 알량한 자존심 하나 지키겠다고 서로에게 가장 잔인한 말을 내뱉고 돌아섰던 그날도, 오늘처럼 비가 내렸었다.


마치 누군가 13년 전의 우리를 이 좁은 세탁소 안으로 밀어 넣은 것 같은 지독한 우연이었다.


수만 번의 우연이 겹쳐야 인연이 된다던데, 13년 만에 마주친 곳이 고작 동네 어귀의 낡은 세탁소 앞이라는 건 신의 장난일까, 아니면 미처 다 쓰지 못한 우리 서사의 미련일까?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가 우리의 말을 대신하고 있었다. 무슨 말부터 해야할지 안타까운 시간이 흘렀다.


"차 가져왔어 타. 데려다줄게"


“아냐, 바로 앞이야. 금방 뛰어갈 수 있어."


그가 내민 손보다 더 눈에 띈 건, 비 냄새가 밴 공기를 가르며 켜진 그의 고급차 헤드라이트였다. 13년이라는 시간은 그를 비를 피할 지붕이 있는 남자로 만들어놓았고, 나는 여전히 젖은 세탁물 봉투를 껴안은 채 빗물 섞인 땀을 훔치는 초라한 여자로 남겨두었다.


"아냐, 나 운동 삼아 걸어가는 거 좋아해."


말도 안 되는 고집을 피우며 뒷걸음질 치던 내 발꿈치가 세탁소 문턱에 걸렸다. 자존심이 빗물에 씻겨 내려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13년 전엔 비가 오면 같이 젖는 게 당연했는데, 이제 남자는 젖지 않는 세계(차 안)에 있고 여자는 여전히 젖는 세계(빗속)에 있었다.


우리는 같은 빗줄기 아래 서 있었지만 그는 비를 피하는 법을 배웠고 나는 여전히 비에 젖는 법밖에 몰랐다.


"너, 아까 안 타겠다고 할 때 13년 전이랑 똑같더라. 고집 세고, 자기 마음 절대 안 들킬 려고 하는 거."


"벨트 매."


그의 짧은 명령에 손을 뻗다 멈칫했다. 뒷좌석 시트 위에 놓인 분홍색 꽃다발. 누군가를 향해 달려가려던 그의 시간을 내가 가로챈 것만 같아 얼굴이 화끈거렸다.


"미안, 바쁜데 내가 방해한 건 아니지?"


내 질문에 그는 대답 대신 음악 볼륨을 낮췄다. 차 안을 가득 채운 은은한 향수 냄새가 10년 전 그에게서 나던 비누 향기를 지워버리고 있었다.


차 문을 닫자마자 세상의 모든 소음이 진공청소기에 빨려 들어간 듯 사라졌고 눅눅한 비 냄새 대신 서늘한 가죽 냄새와 이름 모를 세련된 향수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빗방울이 차창을 때리는 소리가 마치 우리 사이의 침묵을 재촉하는 메트로놈 소리 같았다.”


13년 전 그의 낡은 자전거 뒷자리에 앉았을 때 나는 그의 티셔츠 자락을 잡을까 말까 고민하며 온 신경을 손가락 끝에 집중했었다. 지금 손엔 자전거 대신 빳빳한 안전벨트가 쥐어 있다.


조수석에 앉자마자 엉덩이 밑으로 느껴지는 가죽의 질감보다, 내 젖은 바지 때문에 시트가 얼룩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먼저 앞섰다.


낭만적인 재회라기엔 내 꼴은 너무나 《생활인》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의 차 뒷좌석에 놓인 화사한 꽃다발을 본 순간 깨달았다. 신이 선물한 우연은 여기까지라고. 이 차의 문을 닫는 순간, 우리는 다시 각자의 지독한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13년의 공백을 채우려던 나의 설렘은, 그의 조수석에 놓인 낯선 꽃다발 앞에서 차갑게 식어버렸다.


어쩌면 이 차 안은 내가 타서는 안 될 공간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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