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 부치는 편지
혁아, 안녕!
그동안 잘 지냈니?
우리가 얼굴을 마주 보고 깔깔대며 시답잖은 농담을 할 수 있었다면, 심심한 어느 날 망설임 없이 전화를 걸어 시시콜콜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면.. 아마도 나는 평생 너에게 편지를 보낼 일이 없었겠지. 친구끼리 새삼스럽게 편지는 무슨! 생각하니 멋쩍은 웃음이 나네.
우리는 같은 초등학교를 나온 동창인데, 꼬꼬마 시절엔 오히려 서로를 몰랐지. 성인이 다 되어 가까워졌지만 너는 우리 모두에게 어린 시절부터 함께 한 것 같은 살가운 친구였다. 때론 남동생 같이 징징거리기도 하고 뭘 사달라고 조르기도 했지. 또 어떤 날은 그 누구보다 듬직한 오빠 같기도 했어. 아들만 있는 너희 집에서 넌 딸 같은 자식이었을 테지. 말 끝에 묻어 있는 너의 따스함을 우리는 좋아했다.
우리가 우르르 몰려다니며 맛있는 걸 먹고 술도 마시며 하하 호호하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 우리는 불혹의 나이가 됐다. 난 불혹의 나이가 되면 좀 더 의연하고 멋진 으른이 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여전히 스무 살 때처럼 흔들거리다 잔잔히 머물다 오락가락인 미성숙한 인간이다. 그저 하기 싫은 것을 책임감으로라도 해내는 최소한의 양심이 있을 뿐이지. 너의 불혹은 어땠을까 문득 궁금하다.
혁아, 요즘 이슈가 되는 논란이 있어. 남녀 사이에 남사친, 여사친이 가능하냐? vs 가능하지 않냐?라는 질문인데.. 언제나 너를 떠올리면 무조건 가능!이라는 답을 하게 된다. 우리 모두의 좋은 남사친이던 니가 없다는 것이 원통할 뿐이지. 니가 만약 있었으면 시도 때도 없이 술을 마시며 사는 얘기를 나눴을 텐데 말이야. 이성의 감정이 없이 그저 인간 대 인간으로 시시콜콜한 얘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인데.. 애석하게도 이제 그리 편한 남자사람친구 찾기가 어려운 것 같아. 전멸이야 전멸!
나는 아직도 우리가 마지막 만났던 날이 생생하다. 출국을 코 앞에 둔 나의 송별회 날, 그날이 우리 마지막 만남일 거라곤 꿈에서도 생각지 않았지. 술을 마시고 취기가 올라 바닷가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온몸으로 맞을 때 어쩐 일인지 네가 나에게 베트남에 가지 않으면 안 되냐고 했다. 나의 첫 해외 살이는 나를 알던 모든 친구와 지인들이 약간의 아쉬움은 있었겠지만 누구 하나 가지 말라고 말리는 이가 없었는데. 딱 두 사람이 나에게 가지 말라고 했었다. 한 명은 우리 엄마, 그리고 나머지는 너였지. 너의 마지막을 못 본다는 것을 미리 알았던 것일까? 그때 어두컴컴한 하늘을 보며 니가 아무렇지도 않게 나는 왠지 오래 살지 못할 것 같다는 말을 했다. 죽음을 말하기엔 너무나도 어린 고작 스물다섯의 나이였다. 우리는 별 쓸데없는 소리를 한다며 너를 나무랐지. 지금도 니가 왜 그런 말을 했던 것일까 의아하고 궁금하다.
베트남의 기숙사에서 남자 친구랑 채팅을 하기 위해 졸린 눈을 비비며 노트북 앞에 앉아 있던 어느 새벽에 창용이가 네이트로 네 소식을 전했다. 나는 코웃음을 치며 분노의 메시지를 날렸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고... 정말 믿지 않았다. 설마설마하는
마음으로 한국에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 말없이 엉엉 우는 소리만 들렸다. 거짓말이 아니었구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 너희들은 네이트로 대화를 했다고 했고, 심지어 다음날 영화를 보자고 약속한 친구도 있다고 했다. 몇 시간 전까지 얘기를 나누던 니가 갑자기 그렇게 됐다고 했다. 119를 불렀었지만 너를 살릴만한 시간에는 오지 못했던 모양이다. 병원이 지척인 거리였는데.. 모든 것을 운명이라고 해야 하는 것일까.
나는 너의 마지막을 보지도 못하는 미안함에 하루 종일을 울고 또 울다 지쳐 잠을 자고, 다시 울고를 반복했었다. 그리고 어차피 한국이 아니었기에 그저 한국에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하듯 애써 너를 떠올리지 않으려고 했었다. 너는 그냥 보고 싶지만 떨어져 있는 친구의 포지션으로 자리 잡았다. 그게 비겁하게 슬픔을 이겨내는 나의 방식이었다.
이제 벌써 십오 년의 세월이 흘렀다. 너는 여전히 스물 다섯 청년에 머물러 있고 우리만 늙고 있다. 우리는 어떤 날은 말만 꺼내도 심각해질 것 같아서 짐짓 침착한 척하며 (그치만 눈은 절대 마주치지 않고 앞만 보고..) 니 얘기를 하고, 어떤 날은 먼 지방 어딘가에 네가 토끼 같은 자식과 다정한 아내와 잘 살고 있다는 듯 깔깔거리며 니 얘기를 한다.
얼마 전에 종영한 한 드라마에서 옛날 청춘들의 모습이 나오던데 치기 어려 보이지만 용기 있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당당하던 모습을 보니 우리 젊은 날은 어땠나 생각해보게 되더라. 내가 그런 모습이 있었던 것 같진 않지만.. 너에겐 용기 있는 청춘의 모습이 있었던 것 같아. 그랬으니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다시 대학생이 될 수 있었겠지.. 언젠가 우리들의 집은 니가 책임지고 리모델링을 해주겠다며 당당하게 말하던 니 눈빛에는 자신감이 묻어 있었다.
그런 날이 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혁아, 요즘 니가 참 보고 싶다. 실은 이 말을 꼭 하고 싶어서 주절주절 글을 썼다. 난 사실 다음 생을 믿지 않지만, (다음 생이 없길 바라지만 ㅎㅎ) 다음 생이 혹 있다면 그때도 꼭 서로의 좋은 남사친, 여사친이 되어 주었음 좋겠다. 서로의 늙어감을 옆에서 갈구면서 말이다.
좋은 곳에서 맘 편히 지내리라 믿을게!
니 몫까지의 힘을 낼 자신은 없지만. 내 몫의 힘은 내면서 살게. 또 보자! 내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