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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마음아 3시간전

이혼기간만 7년, 그리고 제2의 삶을 시작합니다.

이혼 그리고 시작

남편을 만난 건 18살 여름이었다. 나는 주유소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학교 갔다 와서 바로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고 밤 12시가 되어서야 씻고 잠을 잤다. 그 해 군대 가기 전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 일부 대학생이며 졸업한 학생들이 주유소 식당방에 하숙을 쳤다.  아르바이트를 하던 유일한 홍일점 나를 오빠들은 귀엽다며 이뻐라 해주셨다. 그리고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잘생기고 성실한 그와 연이 이어지고 결혼하게 됐다. 때 묻지 않은 수순 한 청춘 남녀의 만남이었다.


그는 그 길로 군대를 갔고 나는 대학생이 되었다. 3년 동안 편지로 대화를 이어갔고 나는 졸업해서 서울로 직장을 잡아 취직했다. 아주 좋은 직장이었다. 첫 만남이 시작된 이후로 10년 연애 끝에 결혼으로 성사됐다. 이유는 나의 결혼관과 그의 선함이 이어준 결과다. 우린 다른 누군가와의 연애를 해본 적이 없다. 첫사랑이라고 생각했고 이것이 우리의 끝사랑일 거라 장담했다.


 결혼생활이 늘 좋을 수만은 없었다. 남들처럼 아주 사소하고 작은 걸로 투닥투닥거려도 설마 우리가 이혼하리라는 생각은 추어도 없었다. 아니 내 사전엔 없었다. 다들 그렇게 사는 줄만 알았고 우리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나만의 착각이었다. 늘 밖으로 도는 사람이고 친구를 좋아하고 술을 무척 좋아했다. 그래도 한번 실수라는 것을 해본 적 없기에 신뢰가 있었다. 간간히 추파를 던져오는 여자분들이 있어도 선을 넘지는 않았던 사람이다.


그런 그와의 삐걱거림이 날이 갈수록 심해진건 가난이 찾아오고 난 뒤부터다. 알 수 없는 짜증이 늘어만 갔다. 늘 가볍게 넘어가던 말실수나 아무렇지 않게 던진 말들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시작한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짜증이 늘었구나 싶었고 조금 과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렇게 밖으로 더 나간다 싶었다. 외출이 잦았고 술 먹고 늦게 들어오는 시간이 늘어만 갔다. 그 당시 나는 혼자서 장사를 해야 했고 나 역시 장삿일과 어린아이들을 케어해야 해서 힘에 부쳤다. 자꾸만 서운함이 쌓여 갔고 나 역시 원망과 짜증이 늘어 갔다. 이 모든 게 전부 그 사람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사고만 안 냈어도, 그때 내 말만 들었어도 그런 사고를 당하지 않았을 거라고 다그쳤다. 가장 힘든 순간에 가장 모진 말로 그를 원망했던 것이다.


그날도 평소처럼 티격태격 싸웠다. 그리고 그가 던진 말은 '우리 이혼하자'였다. 한 번도 그가 꺼내지 않았던 말이다. 사실 그전에 나는 그의 이상행동에 의심을 품고 있었다. 그렇게 싸움이 잦았고

거짓말을 했던 그날도 그가 한 말들이 거짓임이 증명할 만한 영수증을 보여주며 어쩌면 그에게 그 말을 유도해 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했지만 이미 우리의 신뢰는 거기서 무너졌는지도 모른다.


나는 더 이상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내 인생의 철칙은 '신뢰'이자 '믿음'이니까 그 원칙이 무너진 순간 더 이상 내가 그것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일주일을 고민해야 했다. 아이 셋, 초등학생 그리고 수술을 하고 난 나의 만신창이가 된 몸, 그로 인해 직업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어 요양차 쉬고 있던 찬라에 벌어진 일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쓸모가 다하니 이젠 버려지는구나!라고 하지만 돌이킬 수없었다. 잘못을 누가 했든 쌍방이 그럴만한 원인을 제공했을 테니... 그래도 치졸하게 느껴졌다. 더 이상 잃을 게 없는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소리는 더욱 험악해 보였다. '이혼하자'한마디에 모든 게 정리되는 사람. 무엇에 쓰였는지 정신없이 거친 말들을 퍼붓곤 하였다.  그 당시 나는 나를 고쳐 볼 거라며 심리공부를 시작하였고 심리상담을 받고 있었다. 대체 내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단호했다.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사지가 부들부들 떨리고 운전대를 잡고 운전하며 가던 내가 달리던 차를 멈추고 한바탕 눈물을 쏟아냈다. 당신 분명 후회할 거라고, 아이들 생각은 안 하냐고 나도 질세라 소리를 질렀다.

돌아오는 대답은 후회해도 괜찮다는 거였다.


아, 이혼이란 말 하나에 이렇게 사람이 달라지는구나를 알게 되었다. 내가 알고 지내던 사람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더 이상 그를 붙잡아 두는 것은 무리였다. 내 남편이 아닌 아이 아빠로 붙잡아두려 했으나 그는 이미 마음에서 떠난 뒤였다.  이혼의 과정 중 험악한 말들이 오고 갔다. 10년의 연애 10년의 결혼생활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란 없었다. 생판 모르는 남한테도 하지 못할 말들을 서슴지 않고 해댔다. 손을 내밀수록 나는 더 징그럽고 지긋지긋한 사람이 되어야 했다.  그리고 이혼수습을 밟아 나갔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결혼생활이라 합의는 순탄했다. 다만 아이들이 걸렸다. 10년을 애써 키웠다. 하지만 데려올 수 없었다.  암치료 후 요양 중이었고 그로 인해 직업이 없었다. 집도 없었다. 아이들을 데려 올 그 어떤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잘못은 상대편이 했는데 나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엄마가 되어 있었다.


이혼 도장을 찍고 가정법원 심리상담사와 마주했다.

다 속을 비워냈는가 싶었으나 막상 심리상담사 앞에 서자 눈물이 앞을 가렸다. 꺼이꺼이 눈물을 토해내듯 화장실로 급히 달려 나갔다. 소울음이 터졌다. 모든 게 다 허무했다.

이것이 최선인가. 그리고 그에게 아이들을 부탁해야 했을 때  죄인이 된 것만 같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한 엄마... 이런 나 자신이 미웠다. 처음으로 내가 살아온 삶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억울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노라고 그리고 지금부터의 삶은 나답게 살겠노라고


모든 게 내 탓이었고 모든 게 내 삶의 잘못된 선택이었음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더 성숙해져야 했고, 더 지혜롭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서도 잘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혼 숙려기간이 지나면서 분리불안을 느껴야 했다. 수시로 차오르는 절망감과 외로움, 분노와 우울을 다스리고 건너와야 했다. 건강을 챙겨야 하는 시간에도 아이들 걱정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내가 건강해야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올 것 만 같았다.

한참을 그 모든 감정들과 싸워야 했고 결국 나는 나를 일으켜 세우는데 집중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혼 그리고 7년이 흘렀다. 나는 다시 건강을 찾았고 삶이 조금은 반듯하게 일어섰다. 그리고 앞으로 단단한 삶을 그려내기로 다짐을 했다. 지나간 모든 것들에 미련을 두지 않기로 했다. 내 과오와 내 실수, 내 미성숙함의 결과를 받아 들이기로 했다. 그의 모든 것들을 용서하고 각자의 길을 응원하기로 했다.


이혼의 막을 내리기까지 7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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