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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나 Oct 26. 2022

시부모님의 금혼식

묵직하네요, 숫자 50




나의 시어머니, 그녀를 캐시라고 부르겠다. 단순히 그녀에게서 배우 캐시 베이츠의 풍채가 떠올라서는 아니다. 작년일까. 캐시와 대화하다 문득 그녀의 결혼기념일을 물어봤더랬다. 캐시 부부도 농번기를 피해 제일 한가한 11월로 날짜를 잡은 걸까. 어쩌면 내 부모와 하루 이틀밖에 차이가 안 나는 그녀의 결혼기념일이라니. 덤으로 내년이 그녀의 결혼 50주년이라는 말까지 들었다. 50년이라... 그녀의 큰 아들이 내년이면 오십이니 결혼생활도 꼭 그렇군요 싶었다. 아들 둘은 그녀의 결혼기념일을 알기나 할까? 둘째는 모르겠고 첫째 아들은 내가 옆에서 십 수년 지켜본 바로는 분명히 모른다. 저런.



어쨌든 이런 상황이 또 내 심기를 건드렸다. 캐시를 내 시어머니가 아닌 한 여자로 볼 때 글쎄... 적어도 50주년이라면 좀 더 행복한 단 하루가 되어야 할 텐데. 결혼 후 거의 처음으로 순수하게 그녀를 기쁘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느리라서가 아니다. 위에도 말했지만 그저 한 여자가 다른 한 여자를 챙겨주는 그런 맘이다. 그게 정확하다. 물론 결혼기념일은 당사자인 부부가 알아서 챙기는 거라고도 하지만 여든을 바라보는 캐시 부부는 그럴 여력도 생각도 없을 것이다.  



그런 마음을 먹은 지 1년이 지나 드디어 다음 달이 캐시의 결혼기념일이다. 전화 신호음이 가는 동안 내 기분이 제법 좋았다. 제법이 아니라 결혼하고 캐시에게 전화를 걸면서 거의 처음 가볍고 산뜻한 맘이었다. 어쨌든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주는 일, 특히 내가 자발적으로 행복하게 해주는 일은 역시 나까지 행복하구나. 하지만 지금 이건 사랑은 아니다. 예상 밖 며느리의 전화에 웬일인가 하는 캐시. 나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나: 올해 결혼 50주년 이시죠.

캐시: 아이고 그걸 어떻게 아나. 착하다. 금혼식이다.

나: 하하. 착한 게 아니라 관심이 있어서 그렇죠.

캐시: 야야. 그게 착한 거다.



컥.

별로 좋아하지 않는 단어, 착하다. 어쨌든.



나: 축하드려요. 졸혼도 안 하시고 50년이라뇨.

(결혼 15년 정도 돼서야 던지는 농담)

캐시: 허허허. 졸혼 안 하고 잘~ 살았다.

나: 그래서 말인데요 호캉스 아세요?

캐시: 아니? 모르는데?

나: 호캉스는요... 블라블라... 남자 친구랑 가셔야 되는데 하하

(전화를 너무 안 하다 하니 나오는 본정신 탈출 대화)



난 캐시에게 1박 2일 호캉스를 제안했다. 상황 파악을 마친 캐시는 처음엔 어떤 공식처럼 나의 제안을 사양했다. 하지만 결코 '극구 사양'은 아니다. '제법 설레는 사양'이랄까. 하지만 그 짧은 사양이 그녀의 진심이 아니란 걸 이젠 잘 안다. 신혼 땐 몰랐지. 자, 나는 그냥 밀어붙인다. 이미 적당한 방까지 다 골라두었기에 내 설명도 끊김 없이 나온다. 얌전하게 듣고 있는 캐시.



결혼기념일이 화요일이니까 월요일에 체크인하셔서요, 저녁은 중식 어떠세요. 호텔 내 식당 예약해 드릴게요. 다음 날 조식은 포함되어 있으니까 드시고요. 체크 아웃 시간도 좋네요. 12시. 수영복 꼭 가져가세요.

캐시는 11월 말에 그 지방에 한 번씩 눈이 내린다며 소녀처럼 들뜬 걱정이다.

어머 그래요? 시기를 좀 당길까요? 했더니 버스를 타서라도 가신단다.



역시. 그녀는 캐시 베이츠를 닮았다.



캐시는 호텔에서 어둠에 잠긴 도시, 그녀가 수 십 년 살았던 그 도시를 내려다보며 지난 50년의 결혼생활, 그 이상의 삶을 돌아보겠지.

별 다섯 개짜리 호텔에서 본인에게 별 수십, 수백 개를 매길 것이다.

열심히 살았고 잘 살았다고.



축하해요 캐시.





그나저나 우리 부모님은 올해 몇 주년 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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