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나를 자라나게 만드는 시간

by 나린

독서하기 좋은 계절 가을이다.


어린 시절, 언니의 손을 잡고 문예반에 따라갔던 날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때는 왜 그렇게 책이 좋았을까. 세상이 아직 좁고 어른들의 말이 전부였던 시절, 책은 나만의 비밀스러운 탈출구였다. 교실 창밖보다, 놀이터보다, 나는 책 속에서 더 자유로웠다. 현실의 풍경은 늘 닫혀 있었지만, 활자 사이로 펼쳐지는 세계는 끝이 없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천재적인 상상력, 인어공주의 바닷속 슬픔과 사랑은 어린 나의 감성을 흔들어 놓았다. 그때부터였다. 읽는 일이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살아가는 방식이 되어버린 건.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키우며 한동안 책은 뒷전이었다. 그러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동화책을 읽어주기 위해 주말의 도서관을 찾은 나는 다시 독서의 기쁨을 만났다. 그림이 담긴 책을 소리 내어 읽어주면서 느꼈던 그 따스한 몰입감, 그것은 어쩌면 책을 갈망하던 어린 시절의 나를 다시 품어주는 순간이었다. 아이들이 재미나게 웃는 옆에서 나도 함께 웃었다. 그 시간 속에서 나는 엄마이면서도 여전히 독자였다.


세월이 흐르고 아이들이 제 자리를 찾아가는 시간이 되니, 내 독서는 다시 내 삶의 중심으로 돌아왔다. 책을 고르는 일은 인생의 대화를 고르는 일처럼 신중하면서도 설렌다. 누군가 추천해 준 책이든, 서점 한구석에서 제목 하나에 끌려 펼친 책이든, 읽기 전의 설렘은 언제나 같다. 그리고 그 설렘 뒤에는 늘 한 문장이 남는다. 나를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드는 문장, 혹은 오래 묵은 질문 하나.


요즘 나는 고전을 다시 읽는다. 화려한 문장보다 오래된 지혜가 주는 울림이 크다. 아처를 다시 펼칠 때마다 ‘인생은 방향을 잡는 기술’이라는 깨달음이 새롭고,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에서는 ‘죽음 앞에서도 배움은 끝나지 않는다’는 경건함을 배운다. 그리고 싯다르타를 읽을 때면, 삶의 모든 고통조차 결국 깨달음으로 이어진다는 진리를 느낀다. 같은 책이라도 나이가 쌓인 만큼 읽는 깊이가 다르다. 책은 변하지 않지만, 읽는 내가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독서의 신비다.


책을 읽는다는 건 결국 자신을 다시 만나는 일이다. 세상이 복잡해질수록 문장은 단순해지고, 사람 사이의 거리만큼 문장 속에서 위로를 찾게 된다. 책은 언제나 내 곁에 있으면서도, 내가 외로울 때 가장 깊이 손을 내민다.


앞으로 읽고 싶은 책이 많고, 다시 읽어야 할 책도 많다. 그 수많은 이야기들이 내 삶의 또 다른 시간으로 이어진다는 게 감사하다. 누군가는 말한다. “책이 세상을 바꾼다”라고.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책은 세상을 바꾸기 전에, 나를 먼저 바꾼다.”


오늘도 한 권의 책을 펼친다. 그것이 나의 하루를 가장 품격 있게 여는 방법이며, 나를 어제보다 조금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드는 가장 확실한 길이니까.

읽는다는 것은 결국, 살아 있다는 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