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담비의 부활
방과 후 아들은 나에게 보여줄 게 있다며 붉은 다람쥐가 살고 있다는 나무로 나를 데리고 갔다. 빽빽한 나무들로 둘러싸인 학교 운동장을 가로질러 유난히도 키가 크고 날씬한 나무 앞에 멈춰 섰다. 아들은 이 나무가 도토리나무라고 알려 주었다. 한두 발짝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대추알만 한 초록 도토리들이 널따란 이파리 사이로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기다란 가지들은 쭉쭉 하늘 높이 무성하게 뻗어 밝은 해를 다 가려버렸다.
"쉿! 여기서는 조용히 해야 해요."
아무 말 않고 잠잠히 있는데도 아들은 못 미더운 듯 조용히 하라고 단단히 이른다. 그늘진 땅바닥에는 아이들이 차려 놓은 예쁜 도토리 밥상이 있었다. 떨어진 도토리들을 한데 모아 만들었단다. 우리는 도토리 밥상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공벌레처럼 허리를 구부리고 앉아 붉은 다람쥐를 기다렸다. 나와 아들을 본 다른 아이들도 도토리 밥상까지 헐레벌떡 뛰어오다가 초록색 신호등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바로 멈춰 서더니 조용조용 앉았다. 우수수수. 가지에 달린 마른 이파리 소리 말고는 아무런 소리나 어떠한 움직임도 없었다.
붉은 다람쥐가 귀하다는 걸 스코틀랜드에 와서 처음 알았다. 멸종 위기에 놓인 붉은 다람쥐를 지키기 위해 영국은 엄청난 노력을 하고 있다. 보통 멸종 위기의 원인을 살펴보면 사람들의 무자비한 포획이나 산림 파괴를 들 수 있겠지만 붉은 다람쥐는 다르다. 멸종의 주원인이 회색 다람쥐 때문이란다. 붉은 다람쥐가 영국의 토색동물이라면 회색 다람쥐는 1870년대 북미로부터 들어오기 시작했다. 다람쥐에게도 수두처럼 다람쥐두(squirrel pox)라는 것이 있는데 회색 다람쥐는 이 바이러스에 면역을 가지고 있는 반면 붉은 다람쥐는 면역력이 없다. 만약 다람쥐두를 가지고 있던 회색 다람쥐가 붉은 다람쥐에게 그 병을 옮기게 되면 상당한 고통과 죽음을 초래하게 된다. 이뿐만 아니라 회색 다람쥐는 나무껍질을 벗겨내는 습관이 있어서 영국의 목재 피해에도 상당한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 회색 다람쥐가 영국전역에 퍼져있는 반면 붉은 다람쥐는 스코틀랜드 북부 지역에서만 그나마 볼 수 있다.
'회색 다람쥐에게 먹이를 주지 마세요.'
'토지를 소유하고 있거나 농부라면 덫이나 독을 사용해서 회색 다람쥐를 통제하세요.'
회색 다람쥐를 제거하기 위한 여러 법들이 만들어졌지만 그중 가장 적합한 제거 방법은 도살이라고 한다. 회색 다람쥐의 박멸을 목표로 둔 웨일스에서는 회색 다람쥐가 이미 다량으로 도살되었다. 그에 따른 비용 또한 만만치가 않다. 그러던 영국에게 최근 회소식이 생겼다.
거의 멸종되었던 소나무담비(Pine Marten)의 부활이다. 고양이처럼 작은 몸집에 밍크처럼 부드러운 갈색 털을 가진 소나무담비는 몸길이만큼이나 덥수룩한 꼬리가 길게 늘어져 있고 목 밑으로 보이는 황금색 또는 노란색 턱받이가 특징이다.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서 드물게 살고 새, 파충류, 과일, 견과류 등을 먹는 잡식성으로 알려졌다.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점은 소나무담비가 붉은 다람쥐 보다 회색다람쥐를 더 맛있어한다는 것이다. 회색 다람쥐는 커서 느릴뿐더러 통통해서 영양가가 더 많기 때문이란다.
그렇다면 왜 소나무담비가 멸종위기에 쳐했을까?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흔하디 흔한 소나무담비의 수가 급격하게 줄어들기 시작한 때는 18세기말, 빅토리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민첩하게 가파른 산을 오르락내리락거리는 소나무담비를 사람들은 숲 속의 전문 등산 가라고 불렀다. 또한 그의 재빠름 덕분에 사람들은 그를 사격하기 시작했다. 결국 소나무담비의 사격은 인기 있는 스포츠가 되면서 재미와 모피를 위해 사람들은 소나무담비를 무자비하게 박해했다. 때마침 영국 삼림 또한 급격히 사라지면서 소나무담비는 거의 전멸에 이르렀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붉은 다람쥐의 멸종위기는 회색다람쥐가 아니라 결국 사람인 것이다. 안타깝게도 소나무담비의 번식 속도는 매우 느리다. 1980년대부터 법으로 보호를 받고 있지만 이제야 그의 부활을 볼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자연은 소생하기 마련이다. 느리더라도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소생하고 있다. 이 거대한 자연의 순리를 없애거나 방해하거나 역으로 돌리게 할 힘은 오직 사람밖에 없음을 다시 일깨워 준다.
"우리뿐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에게 집을 제공하기 위해서라면
힘이 닿는 한, 모든 일을 해야 하는 책임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데이비드 애튼버러 경 - 영국의 방송인 겸 동물학자, 탐험가-
도토리밥상 옆으로 조르르 앉아 가만가만히 붉은 다람쥐를 기다렸지만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들은 한 사람씩 자리를 비우더니 고사리 같은 손으로 땅에 떨어진 도토리를 바쁘게 주워댔다. 마치 나보다 더 작은 존재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고 당연히 해야 할 의무를 아는 것처럼 행동했다. 사람이라는 무서운 존재에 파괴나 약탈이라는 단어가 삐집고 들어갈 수 없을 만큼 아이들은 순순하고 깨끗했다. 개미와 거미, 애벌레와 나비를 보면서 뛰 노는 아이들은 이 광활한 지구가 내 집이면서 또한 이 작은 존재들의 집이라는 것 또한 인식하고 있는 듯했다. 굳이 데이비드 애튼버러 경이 수많은 환경과 동물 다큐를 만들어 가며 책임론을 떠들어대지 않더라도 아이들은 자연과 사람이 어떻게 공존해야 하는지 이미 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스코틀랜드에 살면서 일부러 숲 속을 찾을 때가 많다. 콰르르르 경쾌하게 울리는 시냇물소리, 차르르르 발 밑에서 차오르는 귀뚜라미 소리, 치르치르 하늘 높이 흩날리는 새소리, 바아아아 엄마를 찾는 새끼양 소리, 우수수수 바람 따라 돌아눕는 마른 풀잎의 소리. 가만히 있어도 초록이 주는 에너지와 힐링은 매번 숲을 들를 때마다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조용한 숲 속 한복판에 서 있으면 촉촉한 발끝에서부터 싱그러운 코 끝까지 전달되는 모든 것들이 나와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이런 연결은 내가 지구라는 거대한 행성에 발을 디딛고 숨을 쉬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들을 차에 태우고 집으로 가려는데 푯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푯말에는 붉은 다람쥐 두 마리가 그려져 있고 그 위로 '10'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속도를 10으로 줄이라는 뜻이다. 붉은 다람쥐가 놀라지 않도록 천천히 걸어가듯 운전을 하며 학교 길을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