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틀랜드 - Cowden 일본 정원에서
아들의 학교 길을 가다 보면 'Cowden 일본 정원'이라는 푯말이 보인다. 이런 시골에 일본 정원이 있다니. 신기하긴 했지만 별 관심은 없었다. 그러다 친구가 무료 티켓이 있으니 같이 가자고 연락이 왔다. 가이드까지 포함된 그룹 티켓이란다. 아침 일찍 치즈 샌드위치를 싸서 가방에 넣고 일본정원으로 향했다. 정원에 모인 그룹은 한 10명쯤 되어 보였다. 소풍 가는 늦깎이 학생처럼 들뜬 마음으로 가이드를 기다렸다. 그런데 왠 걸. 짙은 구름 떼가 머리 위로 우리 그룹처럼 몰려들더니 가이드가 나타나자 우두득 억수 같은 비를 내뿜었다. 이제 막 모여진 물방울들이 낙하 예행연습이라도 하듯 우리 만큼 신나 보였다. 모두가 비를 피하려고 전시실로 뛰어들었다.
'Cowden 일본 정원'의 설립자 엘라는(Ella Christie Cowden) 1906-1907년 일본에서 살았다. 그때만 해도 여자 혼자서 세계 여행을 한다는 건 롯데 타워를 맨손으로 등반한 사람처럼 대단한 특종감이었다. 아마도 엘라는 일본을 떠나기 전 그 당시 가장 핫한 영국의 여행 에세이스트 *이사벨라 버드의 책을 읽고 영감을 받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여행가이면서도 정원사였던 엘라는 일본에 머물면서 일본식 정원을 사랑하게 되었고 그녀가 스코틀랜드로 돌아온 후, 지금의 달라(Dollar)라는 마을에 전통식 일본 정원을 짓기로 결심하게 된다.
전시실을 둘러본 사이 먹구름 떼는 뿔뿔이 흩어졌다. 오늘의 낙하 예행은 여기까지였나 보다. 동그란 해가 정원의 푸르름을 더욱 선명하게 빛내고 있었다. 일본과 스코틀랜드의 토양은 매우 유사하다. 습한 지역의 특정상 스코틀랜드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진달래, 붓꽃, 단풍나무, 소나무, 수국, 양치류 등이 심겨졌다.
무엇보다도 일본 정원 하면 빠질 수 없는 연못이야말로 일대 장관일 것이다. 연못에서 비치는 파란 하늘과 구름, 초록 나무와 일본식 누각이 한데 어울려져 또 다른 세상이 물아래에서 일렁거린다. 땅과 하늘을 연결한다는 지그재그 다리는 앞을 똑바로 보고 걷지 않고 선 물아래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을 하나로 모아 집중하게 만든다. 조심조심 한 걸음을 디딜 때마다 조급하고 복잡했던 마음이 천천히 진정되는 듯했다. 연못 옆으로 지푸라기를 꾸욱 눌러쓴 누각이 하나 서 있고 옛날에 밀을 가루로 만들었던 돌을 재활용해서 만든 석등도 보인다. 일본을 대표하는 미니 후지산이나 돌을 깎아 만든 일본 너구리(타누키), 신사가 있던 자리가 분명 일본을 상징하지만 풀 위에 가만히 앉아 주위를 둘러보면 할머니 집으로 가는 길 같기도 하고 한국의 수목원에 서 있을 법한 착각이 들 정도로 한국정원과도 비슷했다.
'Cowden'의 일본식 정원이 영국의 다른 일본 정원과 차별이 되는 이유는 일본인에 의해 만들어졌고 지금까지도 일본인에 의해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란다. 며칠 전에도 세 명의 일본인들이 이곳을 찾았고 미니 후지산으로 가는 입구 쪽에다 벤치처럼 보이는 전통 쪽마루를 만들고 돌아갔다. 다양한 나뭇잎 모양이 새겨진 벽을 보고 있으면 그들의 정성 어린 손길과 섬세한 디테일이 조그만 쪽마루를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저기 등이 굽은 나무 좀 보세요. 신기해요."
누군가가 휘어진 나무를 가리키며 말했다. 햇빛을 조금이라도 더 받으려고 무성한 나무들 사이를 삐집고 올라온 나무가 아니었다. 이상하리만큼 낮은 풀 위로 덩그러니 혼자 휘어 있었다. 다음에 이어지는 안내원의 말은 나를 더 놀라게 했다.
"엘라가 일본에 갔을 때 한국을 방문했었어요. 그때 소나무 씨앗을 가져와서 여기다 뿌렸대요."
그렇게 계산하면 이 소나무는 117살이다. 스코틀랜드, 일본 정원에서 만난 한국 소나무 할아버지. 1906년, 조선 땅에서 이제 막 솔방울을 터뜨렸을 소나무. 그는 조선의 땅이 곧 남의 나라가 될 거라는 걸 미리 알았던 걸까. 조선의 슬픔과 아픔, 애환과 염원, 여러 수난과 가난을 품고 멀리멀리 떠났던 걸까.
당신은 사랑하는 이 섬들을 기억하시오.
제물포
조안 그릭스비. <호숫가의 등불>
당신은 사랑하는 이 섬들을 기억하시오.
무성히 자란 아카시아 숲, 비 온 뒤 연초록의 풀밭
높은 지대 돌산 소나무들을
작은 섬들의 흰모래 깔린 해변 사이로
둥글게 소용돌이치며 빠르게 밀려오는 갈색 조류들을
(중략)
그래서 당신은 이 아름다운 섬들을 꿈꾸시오
서해 바다에 내린 어둠과 별들
고원지대에서 무성히 자란 아카시아 숲 속에 이는 바람
떠나가는 배의 불빛들을. 그와 같은 기억은
이 아름다운 섬인 그대의 심장에 붙어 따라다닐 것이다.
스코틀랜드의 시인 조안 그릭스비는 2년(1929-1930) 동안 조선에 머물면서 '제물포'라는 시를 썼다. 1929년, <호수의 등불>이라는 책을 출간하면서 조선을 배경으로 한 10편의 자작시를 실었다. 그 당시 제물포는 조선의 입과 같은 중요한 통로였다. 일본군이 상륙한 곳도 일본 함대가 러시아 함대를 공격한 곳도 전쟁뿐만 아니라 학교와 병원을 짓기 위해 외국 선교사들이 첫 발을 디딛었던 곳 또한 제물포였다. 'Cowden 일본 정원'을 만들었던 엘라도 시인 조안 그릭스비도 제물포를 통해 조선이란 낯선 땅에 처음 들어왔고 그 길을 지나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117년 된 소나무 할아버지. 마치 그가 조안의 시를 알았던 것처럼. 태어났던 조선의 아카시아 숲과 연초록의 풀밭, 검은 하늘에서 총총이던 별빛과 고깃배에서 반짝이던 불빛들, 서해 바다의 아름다움을 심장에 곱게 새기고 머난 먼 스코틀랜드까지 왔을 것이다. 그는 매일매일 사랑하는 조선을 기억했겠지. 그래서 할아버지 소나무는 다른 나무들처럼 곧을 수가 없었나 보다. 뜻밖의 장소에서, 꿋꿋하게 현재를 살아가는 소나무 할아버지를 보고 있자니 그가 나에게 살며시 말을 거는 것 같았다.
'당신은 내가 사랑하는 이 섬을 기억하시오.'라고.
*이사벨라 버드는 1878년 일본을 방문 후 <알려지지 않은 일본>이라는 책을 썼고 1984년 조선을 다녀와서는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이라는 책을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