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쓰는 성냥팔이 소녀
“이거 하나만 더 따야지.”
커다랗고 울퉁불퉁하게 각 이선 바위들은 썰물 때가 돼서야 비로소 하늘 위로 머리카락을 확 풀어헤쳤다. 하얀 따개비들 사이로 연초록색의 가늘고 기다란 미역과 검붉은 색의 넓적한 다시마들이 선텐을 하듯 벌러덩 들어 누웠다. 루비는 한 손으로 바위를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미역을 움켜쥐고 능숙하게 미역을 바위에서 떼어냈다. 바위는 아파서 비명을 지르기보다는 간지러웠던 곳을 긁어주는 것처럼 아주 시원해 보였다. 어느새 루비 가방 위로 바위의 머리카락이 한 다발 뿁혀져 있었다. 머리숱이 작아서였을까? 루비는 할머니가 미역을 따오면 머리 위에 얹어놓고 빗으로 머리 빗는 흉내를 내곤 했었다. 억새 지도 않고 야들야들하게 윤기 나는 미역이 정말 루비 머리카락이랑 닮았다.
“루비 머리카락 따러 간다”
매일같이 할머니가 집을 나서기 전에 하던 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을 나섰던 할머니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1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검은 소와 누런 소들이 평화롭게 누워있는 푸른 초장을 지나면 루비의 허리만큼 올라온 청보리밭이 나온다. 보리밭 사잇길을 걷다 보면 보릿대가 흥겨운 바람에 춤을 추며 루비의 옆구리를 간지럽힌다. 루비도 흥에 겨워 신나는 디스코를 추다 보면 멀치감치 양치기 개가 자기도 끼워달라고 멍멍 짖어댄다. 개 짖는 소리에 양 떼들은 루비를 향해 뛰어간다. 꽃을 발견한 벌들처럼 루비 주위를 맴돌며 졸졸 따라간다. 루비에게 언덕을 오르는 길은 힘들지도 외롭지도 않았다.
송골송골 이마에 맺히는 땀을 오른팔로 왼팔로 닦기를 반복하다 십자가가 우뚝 서 있는 교회 종탑이 눈에 띄었다. 루비의 발이 저절로 할머니가 항상 앉으셨던 자리를 기억해 갔다. 풀이 고르게 올라오다 할머니가 앉았던 자리에 이르자 풀이 눕히고 접혀서 더 이상 자라지 않는 흙과 모래만 남아 있었다. 그곳에 루비는 털썩 주저앉았다. 발바닥이 뜨거워서인지 할머니의 온기가 느껴져서 인지 엄지발가락부터 정수리까지 짜릿한 기분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따가운 햇살이 루비의 눈꺼풀을 사뿐히 눌러주었다. 머리카락 하나 흔들리지 않는 고요함이 밀려오려는데 '빵빵' 요란한 경적소리와 함께 노란 차 한 대가 씽 자나 갔다.
루비는 해가 지기 전에 집에 들어가야 한다. 정신을 가다듬고 바닷물이 촉촉하게 적셔있는 미역줄기를 한 손에 쥐었다.
“미역 사세요. 미역 사세요. 미역 사세요.”
루비가 팔을 추켜올릴 때마다 미역이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1년 사이 시장도 많이 바꿨다. 이곳저곳 대형 마트들이 생기면서 길거리 상인들은 없어지고 네모진 하얀 선들이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사이로 차들이 가득했다. 대형 간판이 걸려 있는 마트에서 나온 사람들은 쇼핑 카트에 가득 실은 물건들을 차 트렁크 안에 넣고 총알같이 루비 앞을 지나갔다.
“이러다가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겠어.”
루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마트 입구 주변을 서성 거리며 다시 용기 내서 소리 질렀다.
“미역 사세요. 미역 사세요. 미역 사세요.”
마주 오던 세명의 남자아이들 중 한 명이 핸드폰을 들고 사진을 찍어댔다.
“야, 요즘 누가 미역을 사 먹어?”
찍은 사진을 보면서 서로 키득거리다 한 남자아이가 루비 뒤로 슬며시 다가와 쓰고 있던 초록 모자를 낚아챘다. 그리고 다른 남자아이한테 모자를 휙 던졌다. 모자를 받은 아이는 한 손가락으로 모자를 빙빙 돌리더니 또 다른 아이한테 던지면서 사라졌다. 루비는 쫓아갈 힘이 없었다. 오늘 내로 이 미역을 다 팔아야만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이미 버거웠다.
“미역 사세요. 미역 사세요. 미역 사세요.”
밖으로 나와야 할 루비의 목소리는 자꾸 안으로만 기어 들어갔다. 해가 지면서 날이 조금씩 어두워 지자 찬 공기가 스멀스멀 루비 옷깃 사이로 들어왔다. 루비는 재빨리 얇은 외투의 지퍼를 목 끝까지 추켜올렸다. 배도 너무 고팠다. 코끝에서 맴도는 바다 냄새는 마치 미역을 먹으라고 속삭이는거 같았다.
“이거 팔아야 하는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미역줄기가 입안으로 미끄러져 오독오독 씹혔다.
갑자기 할머니와 성탄절 때 먹었던 닭고기, 햄, 크리스마스 푸딩이 눈앞에 펼쳐졌다. 푸딩을 먹으려고 밀려오는 침을 삼키며 포크에 손을 대는 순간 모든 것이 안개처럼 휘 사라졌다.
“안 돼!”
서둘러 미역을 한 입 또 베었다.
이번에는 할머니가 나타났다. 루비는 놓치지 않으려고 할머니를 꼭 껴안았다. 할머니는 예전처럼 루비 머리카락을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쓰다듬었다.
“이쁜이 루비구나!”
루비는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꾹꾹 담아두었던 수많은 말들이 토네이도가 되어 터져 나갈려는데 막상 목구멍에 걸려 숨 조차 쉬기 어려웠다.
“할머니 가지 말아요”
배에 힘을 주어 말을 입 밖으로 밀어내려 애쓰는데 누군가가 루비를 흔들었다.
“괜찮니? 여기서 자면 안 되지?”
루비가 눈을 희미하게 떴을 때 꽉 깨문 입술 사이로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한 아시안 아주머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루비를 바라봤다.
“여기 가면 미역 살 수 있다고 트위터에 올라왔더라. 우리 딸이 오늘 생일이라 미역을 찾다 찾다 포기하고 집에 가려던 참이었거든. 이 외지에서 미역을 찾을 수 있다니 정말 고맙구나.”
루비의 눈에 고였던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아줌마가 미역으로 국 끓어줄게. 우리 딸도 이사온지 얼마 안 돼서 친구가 없거든. 너무 잘 됐네. 우리 집에서 밥 먹고 너네 집까지 데려다줄게.”
할머니는 종종 루비가 좋아하는 라자냐를 만들 때면 라자냐 누들 대신 미역 줄기를 넣었다. 치즈가 노랗게 살살 미끄러져 미역 속으로 수영하면 라자냐는 깊은 바다의 맛을 고스란히 담아 담백함과 고소함의 절정에 이른다. 그런데 미역으로 국을 해서 먹는다는 건 생소한 말이었다.
‘미역이 어떻게 변신되는 걸까?’
루비는 뭔지 모를 미역국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