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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스혜영 Jan 14. 2022

설령 그럴지라도...

16년 만에 처음으로 내가 떠나는 여행.

"이번 주말에 당신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와요."

남편의 말이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덥석 물었다. 

생각해보니 남편이 강의하러 아니면 결혼식에 참석하러 훌쩍 떠나고 홀로 아이들과 남겨질 때가 종종 있었다. 

결혼 16년 만에 처음으로 내가 떠나는 여행 이라니.. 두근두근 소풍 가는 아이처럼 설레 였다. 

뭘 부터 챙겨야 하나? 옷은? 먹을 거는? 

순간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빠가 젖먹이 막내를 봐주고 친구와 단둘이서 아기자기한 커피숍에 들어갔을 때가 떠올라서다. 생크림이 뭉게뭉게 피어있는 달콤한 커피를 주문하고서 계산하려고 보니 내가 기저귀 가방을 어깨에 메고 있었다. 나와 기저귀는 수어지교의 관계다. 그랬던 기저귀 말고 내가 필요한 소지품을 넣어야 하는데 왜 그리 어색한 건지. 

하늘은 우중충하게 흐렸다. 낮인지 밤인지 헷갈리겠다. 차에 해드 라이트를 켜고 몇 분을 달리자 비가 우두둑 떨어졌다. 앞 창문의 와이퍼가 양옆으로 움직일 때마다 빠드득빠드득 소리가 난다. 잔잔히 들려오던 라디오 음악을 윽박지르는 듯. 이렇다고 소풍을 취소할 수야 없지.

열쇠를 따고 들어 간 집은 너무 조용하다. 고요함이 낯설으리 만큼.


작년 9월부터 아이들을 학교로 보내면서 서먹하게 남겨진 나에게 스스로 물어본다.

'혜영아, 네가 좋아하는 게 뭐니?'


아주 어렸을 때는 발레를 하고 싶었다. 부모님께 떼쓰지 않았지만 집안 분위기상 어울리지 않아 으레 접었다. 중학교 때는 그림을 잘 그린다고 제법 칭찬을 받았었다. 그리고 고등학교 올라가서 "바보 같은 너는 미술 배울 자격이 없어." 단호하게 내 꿈을 무 자르듯 잘라 버렸던 미술 선생님의 말씀이 진리가 되어 그림도 접었다. 

코로나로 직장을 잃고 오랫동안 살았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면서

사십 중반이 된 나에게 좋아하는 게 뭐냐는 질문에 수줍던 내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그림을 그리고 싶어."  

그림책 작업을 하고 있다. 요즘은 유튜브를 보며 프로 크리에이터라는 걸 배우고 있다. 아이패드의 메인 화면도 못 바꾸면서 프로 크리에이터라니. 초보를 위한 프로 크리에이터 강좌만 몇 시간 째다. 한국말인지 일본말인지 들으면 들을수록 귓구멍에서 모든 말들이 튕겨나간다. 눈꺼풀에는 바위가 앉았나보다. 눈이 빠질 것만 같아 스크린을 닫았다. 초집중에 어깻죽지도 아파오고 커피 마실 때는 멀쩡하던 허리 마자 아프다고 일어 나란다.   

2박 3일 부푼 가슴을 안고 손오공처럼 구름 위로 날아 올라 뭔가 대단한 성과를 남기고자 했던 나의 기대와 달리 프로 크리에이터로 그림 2장 겨우 그렸다. 차라리 영화나 몇 편 볼 걸 그랬나? 


새로운 시작은 설렘으로 시작해서 설령으로 되묻곤 한다. 

'설령 내가 그림을 그린다고...

누가 알아봐 주겠어? 

글과 그림이 범람하는 시대에 내 그림이 홀라당 빠지지 않으라는 법이 있겠어? 

이러다 그림작가가 되긴 되겠나?' 

꼬리에 꼬리를 물은 설령을 붙잡아준 건 나이 일흔에 발레를 시작한 심덕출 할아버지의 말이다. 

"내가 살아보니까 삶은 딱 한 번이더라. 두 번은 아니야.
내가 아홉 살 때 아버님이 반대를 하셨고 지금 집사람이 반대를 하는데 솔직히 반대하는 건 안 무서워.
내가 진짜 무서운 건 하고 싶은데 못 하는 상황이 오거나.
내가 하고 싶은 게 뭔지 기억도 안 나는 상황인 거지.

그래서 난 지금 이 순간이 소중해. 할 수 있을 때 망설이지 않으려고. 끝까지 한 번 해보려고"
<나빌레라 中>

작년 3월에 나왔다는 이 드라마를 나는 이제야 보고 있다. 


고대하며 기다렸던 시간과 달리 나만의 소풍은 단물 빠진 껌처럼 끝나 버렸다.  

집에 돌아오니 내가 보고 싶었다며 멀리서 두 팔 벌려 안겨오는 아이들이 있어서 기뻤고 평소에 시린 내 손과 발을 온몸으로 녹여주는 남편이 있어 감사했다.

무엇보다도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알고 도전하고 있는 이 순간이 소중함을 나는 절실히 알고 있다.  

 





위의 사진: 바닷가를 산책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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