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리 구하기 1편 <스코틀랜드>
아껴야 했다. 걸을 수 있는 거리는 걷고 가끔 친구들과 갔던 커피숍도 집에서 만나기로 했다. 집안 온도는 18도로. 아침에 한번 저녁에 한번 히터가 돌아가게. 워낙에 외식을 하지 않지만 식성 좋은 세 아이들을 키우며 일반 식비마저 줄인다는 게 좀처럼 쉽지 않다. 영국은 지금, 물가도 난방비나 기름값도 누가누가 이기나 미치도록 질주하는 것만 같다. 모터보트 달고 수면 위를 거침없이 활주 하는 수상스키처럼. 남편의 월급으로는 몇 달째 튜브 끼고 제자리 수영만 열심히 하고 있는 기분이다. 숨이 차다.
아끼는 건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몸에 익혔다. 바다에 들어가면 몸이 저절로 뜨는 것처럼 말이다.
어릴 적 엄마는 항상 모난 사과를 한 보따리씩 샀었다. 누렇게 썩은 자리를 칼로 자르고 가르다 보면 사과 모양이 일그러졌지만 아주 달달했다. 사과뿐만은 아니었다. 떨이나 덤으로 주는 건 뭐든 그냥 지나치질 못했었다. 딸 네 명 중 셋째로 태어난 나는 언니들 옷을 항상 물려받았다. 늘어날 대로 늘어난 옷들만 입다가 어느 날 엄마가 새 옷을 사주셨다. 무릎까지 오는 흰색 줄무늬가 예쁘게 그려진 에메랄드 티셔츠. 얼마나 행복했던지 그날은 하루 종일 밖을 쏘다니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나는 노란 딱지를 좋아한다. 유통기한이 다한 상품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다시 붙여지는 노란 딱지. 제발 좀 사 가세요. 나를 부르는 소리에 발이 멈춰질 수밖에 없다.
'더 아껴서 살면 되지. 뭐.'
사이버 대학교에서 새롭게 공부한다는 핑계로 직장을 구한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던 내가. 드디어 일자리를 구하러 나섰다. 큰 딸이 학교에서 가져온 쪽지를 보고 나서부터다.
'2023년 중학교 3학년 역사 탐방 여행'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를 다니며 유대인 홀로코스트를 방문할 수 있는 기회라 의미가 있을 거라는 길고도 긴 편지였다. 허나 내가 뒤로 자빠질뻔했던 문구는 마지막 줄이었다.
여행비: 백만 원(한국돈으로)
옴마야. 심장이 천근만근 무거워서 바닥에 껌 딱지처럼 달라붙은 기분이다. 입과 심장의 거리가 머니까 입까지 작동되지 않나 보다. 딸한테 뭐라고 어떻게 말해야 할지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혀가 엉켜서 도저히 입이 열리지 않았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서야 딸을 불렀다.
"사랑하는 딸, 이 여행 가고 싶어?"
"네"
"나와 아빠도 이 여행을 보내주고 싶은데 비용이 너무 버거워.... 쉽진 않겠어....
근데 모르잖아. 우리 함께 기도하자."
실망감을 감추려고 어색하게 웃고 있는 딸이 고맙고 그저 미안했다. 남편과 딸과 나는 머리를 맞대고 간절히 두 손을 모았다.
<일자리 찾기> 기름값 안 들고 집에서 가까운 곳으로. 아이들 학교 시간에 맞춰서 오후 3시 이전까지. 일주일에 세 번만 파트타임으로. 전화를 받거나 글을 써야 하는 건 안되고.(영어니까) 돈과 관련된 회계일 빼고.(숫자는 겁나게 무서우니까) 어째 집어넣을 이력은 없는데 뺄 조건만 수두룩한 게 깊은 한 숨부터 나온다.
정말 오랜만에 이력서를 썼다. 남편에게 영어로 이렇게 쓰는 게 맞는지 물어가며 무엇보다도 '부지런하고 열심히 일합니다.'라는 문장을 마지막에 넣어 나름 강세를 표했다.
농장일과 청소, 온라인 한국어 튜터링 등.. 5일이면 연락 줄 거라고 하더니만 연락 온 곳은 하나도 없었다. 마흔 넘어 일자리 구하는 게 어렵다는 게 이런 거였구나. 속상해서 발만 동동거리는데 아침에 학교 가던 딸한테서 메시지가 왔다.
"엄마가 믿기 어려울 거예요.
버스에서 제 옆에 앉은 누군가가 핸드폰 앱으로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어요. 엄마가 한국어를 가르치면 멋있을 거예요. 많은 사람들이 배우고 싶을 거고요. 사랑해요"
서럽게 날이 섰던 내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그래 그까짓 것, 해 보지 뭐!'
딸의 응원에 힘입어 '한국어 클래스' 팸플릿과 웹사이트를 만들었다. 스코틀랜드 시골에 누가 배우러 올진 모르겠지만 온라인 오프라인으로 진행하겠다고 올렸다. 일곱 군데의 지역 도서관에 문을 두드렸고 다섯 군데의 도서관에서 내 팸플릿을 입구 책장에다 배치해 주신단다. 그리고 며칠 후 또 다른 메시지가 왔다.
'새라는 한국어를 배우는데 정말 관심이 많아요. K-pop을 좋아하고요. 곧 14살이 됩니다. 청소년도 받을 수 있을까요?'
한국어 수업이 설레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