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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스혜영 Sep 29. 2022

나는 바닷가로 장 보러 간다


푸르른 8월이면 나는 바닷가로 장 보러 간다. 내가 사는 틸리에서 한 시간만 차로 달리다 보면 세인트 모넌스(St. Monans)라는 작은 어촌 마을이 나온다. 팔꿈치까지 오는 고무장갑을 끼고 무릎까지 오는 장화를 신고 나면 짭조름한 냄새가 나를 끌고 간다. 바닷물은 벌써 저어만치 모습을 감추고 울퉁불퉁한 바위들이 노랗고 연둣빛의 해초머리를 풀어헤치며 해맑은 얼굴로 나를 반겨주었다. 바닷가 장보기는 백화점보다 백배 스릴 있다. 언제 어떻게 걸려들지 모를 장애물이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장애물은 해초. 물이 철렁이는 저 끝 바다까지 다다르려면 뽀글뽀글한 바닥 융단을 피할 길이 없다. 오분이면 거뜬히 걸을 거리를 몇 십 분째 좀비처럼 비틀거리며 걷다 쓰러지기를 반복했다. 마침내 집채만 한 거대한 바위를 만났다. 바위 밑으로 짙고 탁한 바닷물이 찰랑거린다. 꽤 깊어 보였다. 조심조심 갈라진 바위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야 큰 바위에 뿌리를 박고 물아래로 널브러진 다시마가 보였다. 정말이지 “다시마 봤다!”를 외치고 싶은 순간이었다. 두 번째 장애물은 깊은 바다. 발을 잘못 디디는 순간 난 이 광활한 바다에서 영원히 다시마와 함께 널브러질 거라는 사실. 마침 전화기를 들고 오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는 다리가 미치도록 후들거렸다. 다리에 힘을 꽉 주고 숨을 가다듬었다. 이제 미용질을 할 차례다. 바위에 붙은 다시마카락을 가위로 뚝뚝 잘라냈다. '바위야 시원하니? 내가 시크하게 깎아줄게.' 머리를 다듬는 동안 두려웠던 마음은 사라지고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가져온 면가방 밖으로 다시마카락이 넘쳐났다. 옆에서 구경하던 파도도 짧게 잘린 바위 머리가 마음에 드는지 자꾸만 내 장화를 처얼썩 치고 돌아갔다. 신선한 바다향기가 온몸으로 퍼져갔다.


이번에는 두 번째 장 가방을 들었다. 파래를 찾으러 가자. 해변가 주위를 걷다 보면 납작한 돌 주위로 '나 좀 쳐다봐 주세요' 애정한 눈빛을 보내는 초록 파래를 만난다. 거품을 몰고 온 바닷물에 일렁이는 파래를 모래가 섞이지 않도록 살살 뜯었다. 매콤 달콤한 파래를 무쳐 먹을 생각만으로도 입가에 군침이 돌았다. 

마지막 쇼핑 가방에는 사슴의 꼬리와 비슷하게 생겼다는 바다의 나물, 녹미채. '톳'을 담았다. 밤새 머물렀던 바닷물이 마실을 나가고 태양빛에 고스란히 온몸을 쬐고난 톳이 바짝 말라있었다. 짭짤하고 고소해서 과자처럼 씹어 먹기도 했다. 아는 척하며 어떤 날은 남편한테 건네주기도 하고 유기농 간식이라며 많이도 먹었었는데 톳은 독성이 있어서 데쳐서 먹어야 한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집으로 가져온 다시마를 곱게 펴서 하나씩 빨랫줄에 널었다. 창문을 열고 있으니 바다 냄새가 온 집안에 가득했다. 텃밭에 심어 놓은 무를 뽑아 슴벅슴벅 채를 썰었다. 무와 바득바득 씻은 파래를 조물조물거렸다. 배를 타고 한국에서 온 귀한 고춧가루도 솔솔 뿌렸다. 훈훈한 흙냄새와 짭조름한 바다 냄새가 입안에서 북적거린다. 남편은 신선한 파래무침이 좋다는데 아이들은 비린내가 난다며 먹지 않았다. 내 어린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웃음이 나왔다. 나도 바다에서 온 물건이라면 무조건 싫었었다. 아빠는 어떻게든 나에게 생굴을 먹여 보려고 내기를 걸곤 했다. 생굴 하나당 오천 원. 오천 원이라는 말에 눈을 질끈 감고 생굴 하나에 초고추장을 생굴크기만큼 발라서 한 입 물었던 기억이 난다. 아직도 회 같은 생은 먹기 어렵지만 파래나 미역은 생이 더 맛난다. 죽을뻔한 하루를 보내고 저녁 밥상 위로 올려진 파래무침. 붉게 물든 파래를 한 입 가득 베어 물면 혀 끝에서부터 바다로 데려간다. 짭짜름하다. 뭔가 허전했던 하루의 빈 공간들을 빠듯하게 채워주는 듯. 다시 바위 위로 올라가 가만 앉아본다. 아깝지 않게 주고 주어도 마냥 반가움을 감추지 못하는 바다. 싱그러움의 비밀은 거기서 오는지도 모른다.   



왼) 빨랫줄에 말린 다시마 중간) 이름모를 기다란 바닷말(이름이 뭘까요? 오) 무우와 파래 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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