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2 절망의 서막
CHAPTER 0 각성 편 : Prologue ②
[ 고장 난 시계, 멈춰버린 삶 ]
높게 지어진 빌딩도,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음악도,
쉴 새 없이 울려대는 경적도 없는 곳.
그저 산바람만 느릿하게 감도는,
논과 밭이 가득한 고요한 동네.
이곳이 나의 고향이다.
학창 시절도,
군 생활도,
지금의 직장 생활까지도
모두 이곳에서 이어졌다.
나는 이 조용하고 변함없는 고향의 경계를
단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다.
돈이 많은 것도,
특별한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또한
무언가를 끈기 있게 붙잡고
인내하며 노력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학창 시절 성적은 항상 하위권에 머물렀고,
재수와 삼수까지 했지만
결국 '하는 척'만 하며
아르바이트와 게임으로 시간을 흘려보냈다.
당연히 대학 입학에도 실패했다.
그렇다고 욕심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돈도,
학력도,
사랑도 원했다.
단지
내 능력으로는 어렵다는 것을
일찍이 깨닫고
아주 조용히 체념했을 뿐이다.
나의 삶은
나의 고향처럼 언제나 한가했고,
단 한 번도 치열하지 않았다.
고연봉, 고스펙, 부동산,
정치 갈등과 기후 위기 같은 말들은
언제나 나와는 무관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나는 믿었다.
이런 나의 삶이 영원히,
내게 죽음이 오는 그 순간까지도
그대로일 것이라고.
11월,
수능을 마친 고3 수험생들이
버스에서 내리는 모습을 보기 전까지는.
[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
수능이 다가오면
늘 마음이 뒤숭숭해졌다.
입시 실패의 기억 때문일까?
매년 수능일이면
나는 어김없이
버스에서 내리는 수험생들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단순한 부러움이었다.
그들 손에는 아직
‘시간’이라는 무기가 있었고,
나는 이미 그것을 잃은 사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내 시선을 사로잡은 건
학생들이 아니라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이었다.
남학생들은 반팔과 반바지를,
여학생들은 두툼한 패딩을 입고 있었다.
여름과 겨울이
같은 장면에 공존하고 있었다.
마치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처럼,
함께 있으면 안 될 것들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뒤섞여 있었다.
그 기묘한 풍경 속에서
이상하게도
내 등줄기를 타고 전율이 올라왔고,
한순간 턱 하고 숨이 막혔다.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몸 어딘가가 먼저 반응하고 있었다.
마음 깊은 곳에 눌러두었던
무언가가
격렬하게 일어났다.
하지만
그건 지금의 삶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끝내 외면하고 있던
'미래'가
그 순간 선명한 영상처럼 떠올랐다.
준비되지 않은 노후,
무너지는 국가 시스템,
생존이 불확실한 사회.
그리고 그 안에서,
겨우 50만 원도 안 되는 연금만을 붙잡고
무기력하게 버티고 있는 내 모습.
그리고 동시에,
아주 오랜 침묵을 깨고
'죽음'이라는 시계의 초침이
고요히,
그러나 분명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