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세례명을 짓는 일
내 유년의 주말은 성당이었다.
토요일이면 점심 먹고 오빠와 성당을 가고
일요일이면 아침 먹고 엄마 따라 성당을 갔다.
성당에서는 언제나 지루했고 졸거나 딴생각을 하며 그 시간을 견뎠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에게 가끔 보상을 주었다. 토요일 교리공부를 마치면 어린이미사에 낼 봉헌금을 반절 갈라 사탕을 사 먹고 반절만 냈다. 참 맹랑했다. 어느 날 어린이미사 후에 수녀님께서 부모님이 주시는 봉헌금을 다른 곳에서 쓰지 말라며 모든 아이들을 꾸짖으셨고 나는 나쁜 짓을 멈췄다. 동전으로 봉헌금을 내니 얼마나 웃기셨을까
이후 성당을 선택할 수 있는 나이가 됐을 때 나는 당연하게 다니지 않았다. 그러다 빈털터리가 되어 집으로 돌아온 탕아처럼 두 번의 고달픈 수험생 시절에는 저절로 성당을 찾았다.
언젠가 졸면서 들었던 신부님 말씀 중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으로 성당을 다녔고,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으로 두 번의 시련을 이겨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 17장 6절
그리고 세 번째 시련이 왔다.
바로 ‘육아’다.
육아는 성당 다닐 힘도 없게 만들었다.
아이 때문에 뜬눈으로 수도 없이 밤을 새우던 날, 내가 항상 되뇌었던 성경구절은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이다.
참고 기다리면 아이는 자란다. 참고 기다리면 아이는 자란다. 하지만 참지 못하고 탈주하던 날도 몇 번인가 있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코린토 1서 13장 4절
어느덧 두 아이는 자라서 차례차례 유아세례를 받게 되었고, 아이들이 태어난 달을 축일로 둔 성인들에 대해 찾아보았다.
내가 알게 된 것은 훌륭하신 분들이 너무 많다는 것 하나, 나는 도저히 못 고르겠다는 것 하나이다.
그러다 문득 내 자식에게 주고 싶은 두 번째 이름에는 중요한 한 가지만 담아보자고 생각했다.
죽음이 없는 이름
내 삶은 거룩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봉헌금을 반절로 갈라 사탕을 사 먹듯 맹랑하게 한번 더 바라건대
나는 내 아이가 순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내 아이가 나보다 오래 살아 이 세상을 아름답게 누비며 살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첫째는 사도 요한, 둘째는 다니엘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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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은 거룩과는 거리가 멀다.
너희들이 나에게 엄마라는 이름을 주어
내 삶에 의미를 하나 더해주었으니
나 또한 너희에게 바라는 건 하나다.
아가야
내 아가야
나는 너가 언제까지고
내 아가로 살아남아있길 바란다.
너에게 준 게 목숨밖에 없어서
부디 오래 살아남아 주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