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계륵 같은 직무분석
2015~2016년 정도까지 나는 괴짜 팀장과 생활했다. 괴짜 팀장을 조금 설명하자면 본인의 꿈은 머리를 길러서 꽁지 머리를 하고 다니는 것이었으며, 커피를 마실 때 설탕을 7개 털어 넣었다.
구성원에게는 친절하고 말을 똑똑하게 잘하는 반면에 경영진의 이야기에는 설렁설렁 대답하거나 받아들이지 않는, 딱히 잘 보이려고 하지 않는 묘한 태도를 가졌었다. 결국 그 묘한 태도가 발목을 잡아 더 좋은 자리로 올라갈 수는 없었다.
특이한 면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획력이 좋은 분이고 배울 점이 많았기에 나는 그 팀장을 좋아했다. 그에 반하여 선배들은 팀장님을 딱히 좋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팀장님은 어떤 업무를 하던 간에 직무분석을 해야 한다는 기승전->직무분석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다수의 선배들은 직무분석에 적극 반대하는 것을 넘어서 저저 또 직무분석 이야기를 한다고 거부반응을 보이곤 했다.
선배들이 반대하는 이유도 납득이 됐는데, 당시 직무분석이라는 업무는 너무 무거웠다.
현업에 왜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떻게 활용될 것인지를 설명하고 취합하여 정리하고 잘못된 부분은 다시 피드백이 오가는데 시간소요가 너무 오래 걸렸다. 각 부서가 정리한 업무조사서가 오고 피드백을 하여 수정을 요청하는 과정은 생략되었다.
업무조사서 작성을 요청하면 현업은 이전에 자료를 복사-붙여넣기 하니 리뉴얼 된다고 할 수도 없었다.
현업은 현업대로 시간을 소비시키고 장시간을 들여서 완성한 결과물을 경영진에게 ‘짜잔 이제 HR의 근간이자 업무의 근거자료가 될 직무기술서입니다!’ 라고 선보이면 ‘???이게 다야? 이게 성과야???’ 라는 반응을 보일 것이 확실했다.
게다가 당시에는 직무기술서를 현실에서 업무로 활용한 적이 전혀 없었다. 나도 기술서를 보면서 ‘음 그렇군 근데 이걸로 뭘 해야 하는거지?’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물론 업무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직무분석을 통하여 기본을 다져야 하는 것은 맞지만 너무 이상적인 이야기이고 가성비가 없는 계륵 같은 것이라는 것이 선배들의 주장이었다.
그렇게 갑론을박을 하다가 언젠가는 결국 팀장의 주장대로 직무조사서를 취합하였다. 아마도 팀장님은 그것을 활용할 계획까지 있었을 것인데, 그 이후 갑작스럽게 퇴직을 하게 되었다. 결국 직무조사는 날개를 피지 못하고 단순한 현업의 업무 내용의 기록으로 끝나게 되었다. 우리는 그 자료로 어떠한 활용도 하지 못했고 나에게도 어떠한 감흥도 주지 못했다. 나도 직무분석의 필요성에 대하여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2. 직무 인터뷰로 자신감 충전
그러던 중 2019년 귀인을 만나게 된다. 사실 내가 만난 것은 아니고 나에게 간접적으로 영향을 준 분이었다. 나는 당시 인재개발팀이라는 부서로 직무가 전환되어 조직문화와 교육을 담당하고 있었고 새로운 팀장과 일을 하게 되었다. 핵심가치, 리더십, 직무교육 등의 개발이 활발하게 진행 중이었는데 생산본부 기능직의 역량향상체계를 만드는 것도 우리의 미션 중 하나였다.
생산기술에 대한 문외한이 우리가 직무역량 향상 체계를 만든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난이도가 높은 업무라서 막막한 상황이었다. 경영진도 그것을 알고 계셨는지 본인이 전에 업무를 같이 하셨던 박사님 한 분을 소개해주었다. 박사님은 HR 현업에서 25년 이상을 근무하셨고 퇴직 후 컨설팅을 하고 계셨다.
박사님은 우리의 미션을 듣고 팀장과 함께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목표는 생산본부 기능직군들의 역량, 필요지식, 경험을 도출하는 것이었다. 당시 나도 같이 들어가고 싶었지만 박사님의 요청은 경력이 높은 사람이 함께 업무를 하기를 원하셨기에 나는 어깨 너머로만 훔쳐볼 수 있었다.
박사님은 일단 문헌조사를 시작하셨다. 과거의 직무기술서보다는 일본의 생산기술 분석자료를 모으셨고 카이젠도 공부를 하셨다. 그 이후에는 각 공장의 파트장, 직장들 중 인터뷰를 할 인원의 요건들을 주시고 스케쥴 잡기를 부탁하셨다. 요건은 각 직무별로 경험 많고 우수한 인력들이었다. 대략 30명이 넘는 수였다.
그렇게 파트장, 직장과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인터뷰는 먼저 현재 인터뷰를 하는 목적과 인터뷰자료는 향후에 어떻게 쓰일지 안내를 한다. 그리고 업무를 큰 분류로 3~5개 정도로 구분하여 설명을 부탁하고 그 업무들을 점점 파고드는 질문을 한다고 한다. 혹 아는 부분이 나와도 넘어가지고 않고 끝까지 들으며 계속해서 질문했다. 마무리로 그 일을 잘하기 위해서 필요한 경험, 지식, 행동들을 묻는다. 이렇게 진행되면 한 직무에 약 1시간 30분 정도, 조금 익숙해지면 1시간 정도 걸렸다.
인터뷰 과정을 들으면서 정리도 하지만 녹음도 동의를 받고 진행한다. 이후 녹음본을 들으면서 인터뷰 내용을 모두 워드로 기재한다. 그렇게 직무별로 인터뷰 내용이 정리되면 전체 인터뷰지를 토대로 직무역량별로 구체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행동지표로 구성했다.
최종적인 Out put은 3개 역량군, 17개 역량, 165개 행동지표의 형태로 도출되었고, 인원들의 Layer별로 행동지표를 구분하였다. 또한 직무기능 별 법규/규격, 학문/이론, 자격증 일람이 정리되었다.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하면 팀장은 무언가 눈을 뜬 듯 했다. 해당 프로젝트를 통하여 박사님에게 배운 것들을나에게도 전수해주었다. 나도 뭔가 있어 보인다고는 느꼈으나 직접 체험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정확히 뭐가 좋은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일단 배운 그대로 해보기로 했다.
신입사원들의 직무별로 역량과 행동지표 도출을 목표로 자료들을 공부하고 인터뷰를 실시했다. 인터뷰 대상은 해당직무의 우수 팀장으로 대략 24명이었다. 각 부서의 팀장들과 순차적으로 인터뷰를 진행하게 되었다. 팀장들의 반응은 다양했는데 열심히 준비해오는 분, 이런 경우가 처음이다 보니 흥미를 가지고 참여하는 분, 뭘 이런 걸 하냐는 분 등으로 나누어졌다.
부정적인 팀장들은 1시간이나 이야기할 거리가 없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는데 실제로 진행하다 보면 꽤 꼼꼼히 물어보고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가는 것에 놀라워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인터뷰를 부정적으로 생각하시던 팀장님들도 호의적으로 바뀌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자세하게 이야기를 하다 보면 해당직무에 대하여 인터뷰어가 해당 직무를 더 잘 이해하게 되고 정말로 궁금한 점, 애로사항들을 물어보게 된다. 나의 고충을 알아주는 사람이 싫을 리 없다.
나의 업무의 소중함을 이해해주는 사람에게는 호감을 느끼는 듯했다. 인터뷰가 끝났을 때 팀장님들은 본인 스스로도 팀의 업무를 정리하는 시간이 되었다며 고마워했다. 나에 대하여도 업무적으로 좋은 소문을 많이 내주었고 좋은 관계가 형성되어 업무 중 다양한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나는 인터뷰를 통하여 다른 직무에 대하여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알게 되었다. 6년 정도 같은 회사에서 HR을 해왔지만 채용과정 중 다른 직무에 대하여 문의를 받으면 지원자가 만족스러울 정도로 설명을 하지 못한다고 느꼈다. 6년의 피상적인 관찰보다 한번의 인터뷰로 다른 직무에 대하여 면밀히 이해하게 되었다.
직무 간 관계성도 알게 되었다. 협업은 주로 어느 부서와 하는지, 어떤 부서에서 문제가 생길 경우에 그 여파는 다른 부서에 어떻게 미치는지도 이해하게 되었다. 이후 각 부서의 관계성은 Supply Chain과 엮어서 각 부서의 소개와 연결고리를 알려주는 교육과정 개발로 이어졌다.
또 부수적인 효과로 인터뷰 대상인 리더들의 성향과 역량을 가늠할 수 있었다. 일을 잘한다고 소문이 난 리더들은 업무에 대하여 구조화하여 설명을 했고 각 직무를 잘하기 위하여 필요한 경험과 행동들에 대하여 명확하게 설명을 해줬다. 리더의 성향에 따라서 업무를 장황하게 설명하거나 팀의 업무임에도 잘 모르는 분야가 있는 경우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렇게 도출된 역량과 행동지표는 신입사원과 멘토들에게 전달되었고 3개월에 한번씩 자가진단과 멘토의 진단을 통하여 역량향상을 수치화하여 기록하였다. 신입사원의 입장에서는 앞으로 나에게 필요한 역량과 행동해야 하는 방향을 사전에 알 수 있었고, 멘토는 어떠한 교육, 경험을 하게 해야 하는지 가이드가 되었다.
다양한 성과로 파생된 것도 만족스럽지만 그 어떠한 경험보다도 직무 인터뷰가 나의 성장을 견인했다고 느꼈기 때문에 더욱 애정하게 되었다.
나는 HR은 사람, 직무, 조직, 문화 4가지 구성요소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데 유독 약했던 직무, 조직 영역에서 성장할 수 있는 좋은 경험이었다.
3. 우당탕탕 직무분석
인터뷰를 통하여 직무분석의 단맛을 느낀 나는 이후 괴짜 팀장처럼 직무 분석 신봉자가 되었다.
기존과 다른 업종으로 이직을 한 이후에도 회사의 이해도를 빠르게 높이고 싶었다. 이해도를 높이는데 직무인터뷰 만한 업무도 없기 때문에 항상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인터뷰를 통하여 내가 얻은 것들을 다른 동료들도 경험해봤으면 했다. 또한 이미 두어번 해봤기 때문에 나름 자신이 있었다. 강하게 밀어붙인 끝에 직무분석을 진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예상 외로 새로운 회사에서의 직무 분석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았다.
새로운 회사는 창립 이후 5년 정도 밖에 되지 않은 회사이다 보니 직무에 대한 조사자료가 거의 없었다. 또한 전통적인 직무들이 아닌 그 회사만이 갖고 있는 특수한 직무들이 많아 직무정보에 대한 레퍼런스를 찾기 어려웠다. 그동안에 작성해놓은 자료를 보면 부서별로 직군, 직렬, 직무, Task, Activity의 Layer의 크기와 작성방법이 제 각각이었다.
이직 전 회사는 전통적인 제조업 회사였기 때문에 직군, 직렬, 직무 등은 어느 정도 가이드 라인이 있기에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그 안에 내용을 구체화하는 것만 생각하면 됐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인원규모와 각 직무 간의 업무규모 비교해가면 직무 Layer부터 정의해야 했다.
직무 Layer를 정의하면 다른 회사, 연구기관에서 나오는 직무 범위와 상이한 형태로 만들어지게 되었는데 우리 마음대로 정의해도 되는지에 대하여 확신을 갖지 못했다.
이렇게 조정하면 그것도 맞는 것 같고 저렇게 조정하면 그것도 맞는 것 같았다. 그렇게 망설이다가 팀의 합의 과정을 거쳐 제일 적정하다고 생각하는 Layer별 업무 규모를 정의했다.
‘왜 그렇게 정의했나요?’라는 질문에 답변을 하기 위하여 우리 나름의 근거를 정리했는데, 결론적으로 ‘우리 조직규모에는 그 정도가 가장 적정하기 때문입니다’라는 말을 설득력 있게 하기 위하여 노력했다.
직무분석의 목표가 명확하지 않아 많이 흔들렸다.
아무 자료도 없는 상황에서는 직무Layer의 정의 -> 업무조사 -> 직무체계 HR검토 및 조정 -> 역량, 행동지표 도출 -> 현업 합의의 과정이 필요했다.
차근차근 Layer 정의, 직무 체계 검토, 역량과 행동지표 도출을 목표로 세워서 3단계로 진행을 했다면 좀 더 시야가 트였을 것이다. 그러나 명확한 계획이 없이 세개의 목표를 모두 탐색하면서 혼선이 생겼다. 직무체계를 조사해서 만들다가 Layer를 정의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앞단으로 돌아갔고 조사를 하면서도 인터뷰의 욕심이 나서 역량과 행동지표를 스킬문 형태로 만드는 목표를 중간에 세우기도 했다.
이 과정이 나에게는 무척 고통스러웠는데, 내가 하자고 해놓고 명확한 목표를 제시하지 못하여 헤매게 만드는 것 같은 죄책감 때문이었다. 구성원들에게 역량 향상의 기회가 될 것이라고 큰소리는 떵떵 쳐 놨는데 동료들은 딱히 그런 기미는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쉬움도 컸다.
직무분석에 대하여 공부를 해보면 목표를 명확히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쓰여있다. 기본이 없는 상황에서는 명확한 목표를 세우기에 너무 수집해야 하는 정보가 많았다. 최대한 많은 정보를 수집해가면서 직무의 윤곽을 잡아가는 형태이다 보니 아무래도 체계적이지 않았다. 그렇게 우당탕탕하며 우격다짐으로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우당탕탕 하는 성룡의 영화도 대부분 해피엔딩 아닌가, 과정이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결과물은 나름 의미가 있었다.
직무 Layer를 본부 규모, 직무는 팀 규모로 정의하였는데 이것이 조직개편을 검토하기에 용이했다. 각 부서 간의 관계성도 직접적으로 눈에 보였으며 이전에는 통합을 고민하지 않던 부서들도 통합 가능성을 논의하게 되었다. 이전에는 조직개편이란 경영진이 원하는 조직구성을 받아 적는 수준이었지만 경영진에게 근거를 갖고 제안을 할 수 있었다.
직무 Flow라는 정보공유 시트도 만들었다. Supply Chain과 회사의 직무를 연결한 내용이다.
아웃풋은 2 직군, 8 직렬, 27 직무로 도출되었고 Activity, 필요지식/경험, 스킬문, 조직별 이슈사항의 형태로 구성되었다. 스킬문은 최근 스킬이 트렌드가 되어 조대연 교수님의 세미나에서 얻은 인사이트를 토대로 전문지식+업무영역+행동을 문장형태로 구성하였다. 이후 채용, 교육에서 활용할 예정이다.
첫번째 무의미했던 경험과 두번째, 세번째 경험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것은 직무분석에 대한 애정의 차이가 아닐까 싶다. 무의미하다고 인식하고 무의미하게 취합하여 어떠한 노력도 안 했던 첫번째의 경험은 업무적으로도 나에게도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앞으로 HR에 활용할 기본자료를 만들겠다, 이것은 나를 성장시킨다라는 인식을 하니 실제로 결과물도 활용도가 높아지고 나 자신도 크게 성장하게 되었다.
사람은 공을 들일수록 애정이 생기는가 보다.
아마도 나는 앞으로 네번째 직무분석을 또 경험할 것이며 그것은 나를 더욱 성장시킬 것이다.
직무분석은 HR의 구성요소 중 조직과 직무영역을 확장하는데 최적의 경험이다.
다만, 경영진의 기대감까지 충족시킬 수는 없으니 몰래 야금야금 직무분석을 해나가기를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