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 뒷자리, 아버지의 숨소리

by 도로미

토요일 새벽 6시.
한 주 내내 쌓인 피로에 눈이 잘 떠지지 않았다.
그래도 일찍 일어나
엄마, 여동생과 함께 신안 옥도로 향했다.


배편은 목포에서 출발했지만
중간에 반월도 퍼플축제를 들렀고
보라색 라벤더는 아직 꽃망울만 맺혀 있었지만
내 마음은 다른 설렘으로 가득했다.
6년 만에 외삼촌 부부를 뵈러 가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세월은 느리지만, 사람을 변하게 한다.
외삼촌과 숙모는 예전보다 많이 야위고
그 세월이 얼굴에 잔잔히 내려앉은 듯했다.


직접 잡으신 도미와 우럭, 홍어와 고동,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을 정갈하게 차려주신 저녁상.
우리는 밤이 깊도록
오래된 추억을 천천히 풀어냈다.


그러다 삼촌이 문득 내게 물었다.
“수연아, 너… 그때 집 나간 거 기억나냐?”


어렴풋한 기억.
여섯 살, 아버지에게 간다며
무작정 집을 나섰던 어느 날.

광주행 기차에 올라 어른들 틈에 섞여 앉아 있었고,


광주기차역에서 내려 길을 헤매던 나는
낯선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파출소에 맡겨졌다.
짧은 위탁가정, 자다가 이불에 오줌을 싸던 기억,
그리고 다시 파출소로.

그 뒤로 광주역 칠성약국이라는 곳에 있었던 희미한 기억이 남아 있다.


하지만 내가 없어진 21일 동안,
우리 가족에게는 지옥 같은 시간이 흘렀다고 한다.

아버지는 목포의 골목골목을 뒤지고 다니셨고,
엄마는 내가 빠진 이부자리를 보며 밤마다 우셨다..


전단지를 들고 다니며
“이 아이 보신 적 있나요?”
하고 묻는 일이 일상인 고통의 시간..

나는 그 모든 시간을 알지 못한 채
한 젊은 약사의 다정함에 기댔고
갑자기 찾아온 아버지 품에 안긴 채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뒷좌석 아버지 품에 안겨 있었다.

그때 들려온 아버지의 안도의 한숨.
“푸우—”
그 소리는 아직도 내 머리 위에 따뜻한 숨결로 남아 있다.


엄마는 훗날 내게 말씀해 주셨다.

“수연아, 넌 아버지한테 진짜 잘해야 한다.
널 찾는다고 울면서 온 목포를 뒤지고 다니셨단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 한편이 조용히 젖어든다.
부모가 된 지금은
그 절절한 마음이 훨씬 더 깊이 다가온다.

나는 다행히 돌아왔고 아들 둘도 별 탈 없이 잘 자라주었다.


하지만 지금도
잃어버린 자식을 찾지 못한 부모님들이 계신다.

전기요금 고지서 한쪽에 아이들의 전단지를 볼 때마다
나는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선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밤하늘을 향해 기도하듯

아이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고 계실 것이다.

그분들의 고통을 감히 저는 헤아릴 수 없지만,
그저 이렇게 조용히 마음을 모은다.


“부디 자녀들이 무사히
그분들 곁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 작가의 말

이 글을 쓰면서 많이 망설였습니다.
돌아온 저는 행운이었고,
지금도 자녀를 기다리는 모든 부모님들께
감히 감정을 섞는 일이 조심스러웠습니다.


제 이야기가
그분들의 마음에 작은 위로가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두 손 모아 기도드립니다.


� [수연의 브런치 글 더 보기](https://brunch.co.kr/@6735c529d53b426#artic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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