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프는 참 이성적인 사람이다. 흔히 여자들이 공감능력이 높다고 하는데 이 여자는 공감이라는 걸 잊어버리고 태어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때문에 서운한 적도, 내 속이 터져 버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미신 같은 건 잘 믿는 편이다. 별자리 성격설은 물론이고 대만의 전통 신앙이나 미신을 따른다. 한 번은 문을 두드리지 않고 호텔 방에 들어갔다가 된통 혼이 난 적이 있다. 그러다가 큰 사고라고 나면 어쩌냐고.
와이프 말에 의하면 호텔 방에는 신이 있는데 그 신에게 '오늘 하루만 빌리겠습니다'라는 의미로 문을 두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에 두드리지 않고 방에 들어간다면 그 신이 해코지를 할 수도 있다고 한다.
아니, 그러면 이 세상을 돌아다니는 여행객의 99%는 다 사고가 나야 한다는 소리인데. 무슨 할머니도 아니고 이런 걸 믿는 건지. 미신이나 종교를 믿지 않는 나에게는 정말 얼토당토않은 소리에 불과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와이프 말인데 따라야지.
대만에는 사원이 정말 많다. 언뜻 불교 사원처럼 보이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한국의 불교와는 꽤 다르다. 부처님뿐만 아니라 옥황상제, 관우 등등 별별 사람들(?) 역시 신으로 모셔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원은 대만의 주석이었던 장제스를 신으로 모신다고 하니 이게 정확히 무슨 종교인지 쉬이 짐작을 할 수 없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도교를 베이스로 하여 이것저것 짬뽕이 된 대만의 토속 신앙으로 보는 게 편하지 않을까 싶다. 부처도 인도에서는 힌두교의 한 신에 불과하다고 하다는데 대만이라고 해서 안 될 것도 없겠지.
한국의 불교도 토속 신앙하고 결합되어 있는 걸 보면 사실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전혀 그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내 아내가 민간 신앙을 믿다 못해 사원을 자주 찾아가는 사람임을 알았을 땐 좀 충격을 먹었다.
여하튼 와이프가 새해가 된 기념으로 또 사원에 가자고 했다. 혼자 가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러다 다치면 어떡하냐는 와이프의 잔소리가 예상되는바, 군말 없이 따라갔다.
사원에 들어가기 전에 사야 할 게 있다.
한국과 비슷하게 신들에게 올릴 것을 준비해야 하지만 집에서 만든 음식일 필요는 없다. 과일이 제일 흔하지만 과자를 사도 무방하다.
먼저 사원 입구 근처에 있는 테이블로 가서 신들에게 올릴 음식을 둔다. 그리고 절을 마친 뒤에 준비한 음식들을 집으로 가져가서 맛있게 먹으면 된다.
절을 하기 전에 가짜 돈과 향을 사야 하는데 돈은 양심껏 알아서 내면 된다. 우리는 대만돈 100원(한국돈으로는 대략 4,000원)을 냈다.
향에 불을 붙이고 나서 제일 먼저 하늘신에게 절을 올려야 한다.
절을 하는 방법은 이렇다. 먼저 자기 이름이 뭐고 어디에서 사는지 주소까지 정확히(!) 말해야 한다. 그다음에 바라는 바를 이야기하면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향을 든 양손과 고개를 가볍게 세 번 흔들면 된다.
아! 나는 한 가지 더 물어봤다.
'혹시 중국어로만 말해야 하는 건 아니죠? 신들이신데 한국어도 이해할 거라 믿습니다'
이 사원에서는 여러 신이 모셔져 있다. 모든 신께 절을 해도 상관은 없지만 제일 중요한 6명의 신께 절을 할 때마다 향 하나를 꽂아야 한다.
신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이렇다.
마조(媽祖)는 건강과 안전의 주관하는 신.
태세성군(太歲星君)은 그 해의 복을 바라는 신.
관우는 나쁜 사람을 못 오게 막아주는 신.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은 우리가 흔히 아는 그 부처님.
신농대제(神農大帝)는 농업을 주관하는 신.
문창제군(文昌帝君)은 공부를 주관하는 신.
절을 다 끝낸 뒤에 첫 번째 신이 있는 곳으로 돌아와 올 한 해의 점을 친다. 위에 보이는 나무 두 조각을 쥐고 소원을 빈 후에 바닥에 던진다.
다른 면이 나와야 소원을 들어준다고 한다. 같은 면이 나오면 꽝. 하지만 괜찮다. 될 때까지 던지면 된다.
다행히 올해는 한 번에 다른 면이 나왔다. 작년에는 네 번인가 던져서 다른 면이 나왔는데 와이프가 진심을 담지 않고 기도를 드려서 그런 거라면서 나를 나무랐다. 대충 하긴 했지만 나는 왜 이런 걸로 혼나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왜...
여전히 할 게 남아 있다. 막대기를 하나 뽑은 후에 옆에 있는 기계에 내 번호를 입력하면 그 해의 운세를 알 수 있다.
신기하게도 한국어도 있다. 하지만 번역 퀄리티는 영... 그리고 해석본도 없다. 그래서 중국어로 된 걸로 하나 더 출력했다. 나에겐 대만인 와이프가 있으니.
운세의 내용은 대충 올 한 해가 험할 거라는 이야기다. 나는 시큰둥하게 뭐 그럴 수 있지 하며 넘어갔다.
와이프도 따로 점을 쳤는데 '어떻게 운세가 지금 내 처지하고 이렇게 딱 맞을 수 있지', '너한테는 이 운세가 맞지 않을 거야'라고 말하며 역시 이 사원의 영험한 효과를 제대로 느끼고 있었다.
사실 나한테 대입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 말이라 '뭘 또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이냐'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가정의 평화를 지키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탁자에 올려두었던 가짜 돈을 태우면 사원에서의 모든 의식이 끝난다.
하지만 추가적으로 할 수 있는 게 있다. 바로 그 해의 안녕을 바라는 마음으로 사원에 이름을 남기는 것. 양 끝에 노란색으로 빛나는 기둥 같은 게 보이는가? 저 하나하나에 들어있는 게 다 이름이 적힌 종이다.
우리도 이름을 등록하러 사원 바로 옆에 있는 건물로 갔다. 새해여서 그런지 10분 정도가 지나서야 겨우 직원을 만날 수가 있었다.
직원 : 800원입니다. 200원만 더 내면 건강까지 챙길 수 있는데... 어떻게 하실래요?
나 : 어...
아니, 800원이면 이것저것 다 해주는 것 아니었어? 추가 요금도 있다고? 대단한 상술이구만.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어 와이프에게 물어보려고 고개를 돌렸지만 내 눈에 보이는 건 단호한 와이프의 눈빛이었다.
나 : 네, 그렇게 할게요.
한국돈으로 무려 4만 원이었다.
사원에 도착할 때만 하더라도 시늉만 하고 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다 보니 열심히 했다. 내가 뽑은 운세처럼 올 한 해가 쉽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였을까. 그래서인지 몰라도 모든 절차를 끝냈을 땐 무려 한 시간이 흐른 뒤였다.
비록 열심히 기도를 하긴 했으나 여전히 신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건강을 챙겨야 하는 것도 나 자신이고 어떤 일이 잘 되려면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하는 것도 나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만에 하나 신이 정말 존재한다고 하면, 그리고 그 신이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신다고 하면 올 한 해 무사히, 그리고 모든 일이 잘 풀리게, 또 나와 내 가족들을 보살펴 주셨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