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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르다 Jan 15. 2023

작은 그릇

서른다섯

작은 그릇.

나는 작은 그릇이다.

무엇이든 담기다가도 또 왈칵 쏟아져 다시 주워 담다가 이내 다시 왈칵.

그러고도 담길 수 있는 것들만 간신히 담아내는 작은 그릇.

공기 중에 증발하고 그릇 표면에 딱딱하게 굳어져 남은. 처음의 그 무엇인가가 다시 담기는 다른 무엇과 섞여 다시 또다시 왈칵 거린다.

그러기를 수차례 매일 매달 매해 수 해를 거쳐 서른다섯 작은 그릇이 되었다.

그릇 안에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이것저것이 딱딱하게 굳어지고 엉기고 설켜서 흡사 지층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야 싹이 보인다.

울퉁불퉁한 표면 아래 썩어지기도 문드러지기도 한 것들 위로. 그 위로 작은 싹이 보인다.

곧 바람에 뽑혀버릴 듯 작은 싹은 어그러진 그릇 아래에 제법 단단하게 뿌리를 두고 얼굴을 내었다.

바람도 이고, 햇볕도 받으며, 가끔 공기 중에 수분이 과한 날에도 고개를 들고 있다.

이따금 내렸다, 올렸다 하며 일조량과 수분량에 적당히 영향을 받으며 올렸다 내렸다.

싹은 이제야 지면 위의 풍경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이제야 네 마음이 안녕한지.

네가 뭘 먹고 싶고 건강한지 궁금해하며.

어떤 말에 기운이 날지 꽤나 고민한 끝에 안부를 묻는다.

나는 서른다섯 해나 묵은 작은 종지만 한 그릇 위로 오른 싹이다.

이제야 삶이고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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