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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르다 May 20. 2021

우울한 등

피딱지

혼자 있을 때면 늘 우울함이 엄습했다.

그 우울이란 것은 등 뒤에 딱 달라붙어서 보이지 않다가 혼자 있을 때면 정수리까지 올라와 기분 나쁘게 축 늘어져서 어깨와 마음을 짓눌렀다.

그것은 늘 언제나 함께 있어서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우울함이고 우울함 자체가 나였다.

대다수가 20대의 자신을 그리워하지만

'다시 돌아간다면'이라는 가정은 나에게 없다.

나는 나의 20대가 서럽다. 지독한 자기 연민.

-

문래역 근처에 있던 피아노 연습실은 월 35만 원이었다. 아는 선배의 선배가 운영하는 연습실이었는데 시계가 없으면 낮인지 밤인지 알 수 없는 지하였고,

피아노를 두면 반평 정도 남는 작은 방이었다.

아는 사람이 없었겠지만 나는 그 반평에 돗자리를 깔고 잤다.

씻을 곳이 없어서 연습실 근처에 있는 대중목욕탕에 종종 갔다. 대중목욕탕은 7,500원이었던가?

문래역 역사 내에 있는 아메리카노는 1,000원.

끼니를 해결해주던 곳은 연습실 근처 편의점이었다.

연고가 없는 서울에서 씻어야 하고 자야 하고 먹어야 하는 일은 고통이었다.

등에 메고 다니던 우울은 고통스러운 상황과 자기 연민을 만나 더욱 빛을 발했다.

-

답답한 공기 속에 컵라면을 욱여넣고 반평 돗자리에 누운 밤 못 견디게 무서울 때면 지금은 남편이 된 그에게 전화를 했다.

오늘은 도저히 여기에서 잠들 수 없다고.

그러면 그는 열두 시가 다되어가는 깊은 밤에도 두 시간을 운전해서 와 주었다.

그러면 그 밤은 모든 게 다 괜찮아졌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쾌적한 바람도 좋았고,

뱃속을 따듯하게 채워주는 어묵도 좋았으며,

잘 세탁된 베개도 안전하게 느껴졌다.

내가 2년 남짓 서울에서의 음악활동을 이겨내지 못한 이유 중에 하나는 바로 이 의식주 문제이다.

그리고 등에 매달린 그것으로부터 스스로를 살리기 위한 도망침이었다.

따듯한 안식처를 맛보게 한 그의 탓이었다. 나약하다 말해도 어쩔 수 없을 노릇이었다.

그렇게 졸업과 동시에 나는 결혼을 했고 이듬해 첫 아이를 낳았다.

-

한 날은 아이들을 돌보다 마음이 가뿐해서 소스라치게 놀랐다.

가벼웠다. 산뜻하고 그늘 없이.

세 아이들과 함께한 몇 해의 시간 동안 나의 우울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잘 말려진 피딱지가 되어 가끔 그것을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그 안에서는 이미 새 살이 건강하게 올라와 있었다.

-

내가 아이들을 키우고 있다고 여겼지만,

아이들이 나를 살리고 있었나 보다.

다시 기억을 더듬으며 습관처럼 스스로를 할퀴려 할 때마다 시도 때도 없이 재잘거리고 끊임없이 할 일을 던져주며 건강해지라고, 이제는 앞으로 나아가자며 내 등을 떠밀어 왔던 것이다.

고맙다 아가야. 고마워. 정말로.

등이 홀가분해진 나는 깨끗한 등에 아이를 업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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