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이 분들
별 일이 없으면 나는 우리 집 뒤에 있는 해발 174미터의 나지막한 뒷산을 걷는다.
작고 낮은 산이라서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이름도 있다. 구수산이다. 나 스스로 추측해 보면 거북 구, 머리수, 거북의 머리이지 싶다. 거북 머리처럼 둥그스름한 둘레에다 거북의 등처럼 골과 마루가 대여섯은 나 있어서 꽤나 산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골과 등성이를 오르고 내리다 보면 어느새 등에 땀이 난다. 높고 큰 산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구수산에 가면 구수산만의 고즈넉함과 계절이 있다.
긴 장마가 끝나고 가을에 접어들면서 맨땅을 밟고 싶었다. 키 큰 참나무와 소나무로 하늘을 가린 숲길에 들어서면 나뭇잎 사이로 언뜻언뜻 일렁이는 가을 햇살이 숨이 찬 내 심장을 끌어올린다.
조금만 더 올라와 봐. 목구멍이 시원하게 뚫릴 테니.
조금만 더 하는 격려 끝에 등성이를 올라서면, 중도포기를 이겨냈다는 장쾌함이 땀과 바람 그리고 햇살 무늬에 버무려져 비로소 가을 구수산의 맛이 된다.
작은 봉우리를 두 개 지나 평탄하고 매끈한 흙길에서 맨발로 걷기 시작한다. 크고 굵직한 소나무들이 만들어놓은 그늘에 바람이 잔잔이 불어오면 숨 가쁜 마음이 평온해진다. 이 길은 참 평화롭다. 조금 전까지 은근히 자리 잡고 있던 근심과 낙담들이 나도 모르게 평정된다.
아무 짓도 안 하고 그저 자연스러운 흙길인 줄만 알고 누리던 어느 날, 나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참 좋다 생각하며 천천히 걷는데, 나보다 좀 더 나이 들어 뵈는 아주머니가 맨발로 걸어오면서 먼저 인사를 하신다. 약간은 쑥스럽고 미안해서 말을 건넨다.
"이 길이 참 좋아요. 시청에서 관리를 잘하는 것 같아요. 자주 오세요?"
"매일 10시쯤에 와서 5번 왕복해요. 길이 어지럽혀지면 저기 저이들하고 빗자루로 쓸고요. 맨발로 매일 걸으세요. 좋아요."
엥, 이분들이 쓸어 놨다고?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이 길이 그저 자연적으로 매끈하거나 시청에서 관리한 것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고?
무척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이 길을 맨발 걷기에 적합하도록 이 분들이 시시때때로 쓸어놓은 것이었다. 인사를 나누고 걷다 보니 긴 대빗자루가 나무 곁에 세워져 있었다. 누리고 살면서도 그 생각을 못했다.
며칠 뒤 오후. 이번에는 초록색 긴 군용 빗자루로 길을 쓸고 있는 젊은 남자를 만났다. 그는 얼굴에 온통 땀벅벅이었다. 역시나 미안하고 고맙고 놀라워서 가던 길을 멈추고 망설이다가 말을 걸었다.
"무거운 빗자루로 많이 힘드실 텐데, 어떻게, 힘들지 않으세요?"
"괜찮습니다. 땀 흘리고 좋죠. 저 끝까지 맨발로 걸을 수 있도록 이어 보려고요."
아무 짓도 안 하고 그저 흙길인 줄만 알고 누리던 나는 또 한 번 심장에서 소리가 울렸다.
서로 안면도 없는 모르는 사람들이 각자 자기식대로 산길을 쓸고 있었던 것이었다. 사는 곳도 다르고 나이 차이도 많이 나는 이 사람들은 자신의 즐거움을 자연스럽게 타인과 공유하고 있었다. 게다가 마음까지 밝히고. 이 작은 구수산에서 이해타산 없이 본심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내 심장을 울렸다.
이것이 가을의 일이었고 여태까지 이어져 왔다. 힘이 되는 우리 동네 풍경이다.
이 사람들 덕분에 나도 가끔 산길 빗자루를 든다. 지금은 겨울이라 바람을 이겨낼 재간이 없어 모두들 비질을 잠시 멈추었다. 그렇지만 산길에서 오가며 건네는 인사 한 마디가 따뜻한 맨발 걷기를 재촉할 것 같다.
"안녕하세요?"
"네, 잘 계시죠?"
본심으로 살아가는 일은, 의도하지 않아도 누군가를 따뜻하게 안아주고 진한 울림을 줄 수 있음을 새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