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과 불행 사이
두 달 전쯤 교통사고가 났었다. 앞에 가던 트럭 두 대가 서로 부딪쳐 도로 경계대와 주유소 앞 기둥을 연이어 들이받고 멈추는 것을 보면서 나는 차를 멈추었다. 그러자 뒤 따라오던 승용차가 이내 내 승용차를 꽝 들이받아 숨이 멎는 듯하였으니 작은 사고는 아니었다.
트럭에 탄 사람들은 머리에 피를 철철 흘리며 구급차에 올랐고 내 차를 박은 뒷사람들도 다리를 절며 구급차를 타고 갔는데, 그때 당시 아들과 나는 몹시 놀란 가슴 외엔 외상이 없었다. 경찰차, 앰뷸런스, 견인차, 보험회사 직원들이 와서 한 시간 가량 사고 현장을 수습하는 가운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차는 망가졌는데 우리 둘은 멀쩡한 거야? 사람들이 모두 말했다. "정말 다행입니다.", "정말 운이 좋았습니다."
다행인 건 맞는데, 운이 좋았다고? 6개월 밖에 안 된 차가 사고를 당하고 우리는 놀라서 가슴이 곤두박질치는데. 하필 수능 시험을 치고 돌아오는 길에서 사고를 당하다니. 무언가 불길함이 막 드는데, 어쩌나.
아들에게 물었다.
"너는 운 좋았다는 말, 이해가 돼?"
"엄마, 이건 진짜 운 좋은 거지. 뒤 차가 화물차나 버스였다고 생각해 봐. 우리가 무사하겠어? 승용차였으니까 다행이지."
듣고 보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진짜 그렇네. 우린 운이 좋았네."
사고가 나지 않는 게 더 좋았겠지만, 알 수 없는 불가피한 그 상황에서 우린 운이 좋았고, 그만하기 다행이었다.
이 사고를 계기로 나는 '다행'인 일상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이것이 복의 기초라는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다행'으로 여기는 경우는 참 많다.
가령 짬뽕 국물을 쏟았는데 흰 바지에 튀지 않았다든지, 넘어졌는데 다치지 않았다든지, 빵을 사러 갔는데 딱 하나 남아서 살 수 있었다든지 등등, 작고 사소한 일에서부터 신경 쓰이는 일이나 바라던 일이 무사히 이뤄졌을 때, 우리는 '참 다행이야' 하며 안도의 미소를 짓는다.
그것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일상이 무사한 것, 이 추운 겨울날 따뜻한 방 안에서 한 그릇의 김치볶음밥을 먹을 수 있는 것. 이것들은 너무 일상적이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안 하고 살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정말 다행한 일상이다. 내가 누릴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에 마음이 놓이고, 평온한 만족감이 깃든 상태이다. 행복이라 표현하기엔 어쩐지 행복의 풍만함이 줄어드는 것 같아서 그 말을 꺼내 놓진 않지만, 분명 기본적인 행복감이다. 이런 '다행'이 많을수록 마음은 충만해진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고 내 마음에 달려있다'고도 하고, '행복은 너무 멀리 있다'고도 한다.
멀리 있다는 건 행복하고 싶지만 조건이 안 되니 나에겐 너무 먼 이야기라는 것이다. 남들은 다 어떻게 하고 사는데 나는 왜 요 모양 요 꼴이냐는 것이다. 이것은 애초에 자족할 수 있는 자기 마음이 아닌, 다른 곳에 기준을 두었기 때문이다. 경제적인 부든, 가족, 사람 관계이든 자신을 형성하고 있는 환경이 우선 기준이 되어야 만족의 한 칸 한 칸 방이 생기는 것인데, 이미 보이는 사회적 모습에서 기준을 가져오니 작은 만족이 빛을 내지 못하는 것이다.
행복감은 사회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개인이 느끼는 감정인데도, 우리는 순간순간 '다행'한 상태가 '행복'이라는 감정인 줄 모르고 지나쳐 버린다. 경제적인 것이든, 사람에 관한 것이든 행복의 기준을 자기 가까이에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행복의 감정인 줄 모르겠거든 '불행한가'를 물으면 된다. 불행이 아니라면 '다행'인 거다.
나도 내 마음이 무언지 모를 때 종종 반대로 묻는다. 특히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나는 왜 이리 힘드나 싶을 때,
'그래서 너는 불행하나?'
행복하진 않아도 불행하다는 생각은 안 든다.
'행운을 바랐는데, 행운이 없어서 불행하나?'
그렇진 않다. 행운은 없어도 별 탈이 없으니 불행은 아니다.
'바라던 대로 안 돼서 불행하나?'
마음이 주저앉긴 해도 불행이라고 할 수는 없다. 더 나빠지지는 않았으니까.
'남들이 10억을 가졌는데 너는 없어서 불행하나?'
씁쓸하긴 해도 불행은 아니다. 밥은 먹으니까.
수없이 많다. 수없이 많은 이와 같은 일상으로 삶은 연속되고 있다. 따지고 보면 참 다행한 일이다. 이러한 많은 다행함이 없다면 삶은 진짜 고달플 것이다.
우리는 통상적으로 행복과 불행 사이 어디쯤에 산다. 행복 아니면 불행, 이 둘이 아니라 대부분 '다행'의 일상으로 이어진 삶을 살아가고 있다. '다행'이 아닌 먼 곳에 있는 것을 행복이라고 여기는 것은 영영 행복감을 누리지 못할 떠 있는 마음이라는 걸 깨닫는다. '다행'한 일상이어서 행복한 삶이다.
어릴 때부터 엄마가 늘 말씀하신 게 있다.
"사람은 올려다보고 살고, 사는 건 내려다보고 살아야 한다."
'인격은 훌륭한 사람을 보고 배우고, 힘든 것은 우리보다 더 힘든 사람들이 있음을 생각하고 살아라'라는 말씀이었다. 가난으로 인해 자식들이 마음 다치고 주눅 들까 봐, 심지 굳은 좋은 사람이 되어 살아가길 바라셨던 것이다. 부모가 되어 보니 그 마음이 더 간절히 와닿는다. 온갖 정보가 곳곳에 노출되어 너무나 쉽게 남들과 비교되는 세상이다 보니 마음 한편 안쓰럽고, 나 역시 쪼그라들기도 한다.
엄마의 당부는 경제적인 것뿐만 아니라 힘들고 아픈 모든 것들을 포함한 말씀이었음을 살다 보니 알게 된다. 내 속에 갇혀 있을 땐 나만 돈이 없고, 나만 일이 안 풀리는 것 같은데, 나를 벗어나 둘러보면 모두 비슷한 말을 한다. 무엇이든 문제 하나 없는 집은 거의 없고 힘들어한다. 문제와 갈등을 풀면서 '다행'들을 만나고, 삶은 또 굴러간다.
생각해 보면, 그 말씀 덕분에 암암리 지금까지 자신을 낮추고 '그래서 참 다행이야'라는 많은 순간들로 살아온 것 같다. '다행'이 많은 삶을 살다 보니 그것이 복인 줄도 몰랐는데, 이제 그것이 좋은 운인 줄도 알겠고, 복인 줄도 알겠다. '참 다행'이다. 고마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