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점검
지금 밖은 하릴없이 나를 묶어 놓는데,
살빛 같은 겨울 햇살 속으로 등을 웅크린 고양이 한 마리가 하품을 하며 마당을 지나간다.
바람은 '거기 누구 없소'하듯 창문을 덜컹이고,
질주하는 자동차는 살갗을 쓸어갈 듯 찬 쇳소리를 낸다.
어디서 오는 것일까. 마음을 가르는 이 차가운 바람은.
따뜻한 방구석의 온기가 나를 가둬 놓는다.
겨울은 화기를 품은 차가운 물이라 몸속의 열을 보존하기 위해 잔뜩 웅크리고 있다.
명리학을 공부한 지 두 달째.
나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
마음이 갑갑해 오는 이유는 대체 뭣 때문인가.
나를 알고, 자연의 기운을 알고, 타인과 더불어 잘 살아가기 위해
이것만큼 유용한 공부가 어디 있을까 싶어 눈이 번쩍 떠졌는데,
이쯤에서, 겨우 이쯤에서 내가 어수선해져 버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무얼 어쩌자고 이걸 하고 있는가.
어제까지만 해도 지인과 지인의 사주를 놓고 수다스런 탐색을 했다. 우리는 짧은 눈으로 혀 짧은 소리를 하면서도 우리가 살아갈 자세에 대해 공감하며 즐거워했다.
그런데 이 갈 길 몰라하는 허황감, 갑갑함이 웬 말인가.
나무가 많으면 좁아진 공간 때문에 '갑갑하다'라고 하는데, 내 마음에 해를 보려는 나무가 많다는 건가.
마음 쓰이는 여러 가지가 엉켜있다. 그중 내가 주체가 될 수 없는 일들은 거리 두기를 하고, 오로지 나 자신의 욕망과 관련된 나무들을 점검해 봐야 한다. 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길래, 무엇 때문에 갑갑해하는 것인지.
탐구하고 싶고, 표현하고 싶고, 확산하고 싶은 마음.
이 세 그루의 욕망이 자리 잡고 있다. 오로지 나에게서 나오는 것들이다. 그러나 나는 공간이 좁은 사람이라 벅차다. 내 그릇에 비추어 내 욕망이 욕심은 아닐까, 어리석은 마음은 아닐까, 또 내 욕망으로 인한 짜증은 아닐까. 이것들이 걸린다. 이 제어장치가 나를 묶어 놓는다.
한편으로는, 욕망에 대한 자기 점검이 수시로 일어나다 보니 나아가지 못하는 답답은 있지만 나를 겸손하게 만들기도 한다. 알고 보니 나의 사주 구성에서 오는 성향이다. 하고자 하는 것은 있으나 이것저것 고려하다 보면 쉽게 밖으로 표출되지 못하는 원국이다. 그러니 답답하다. 그러나 광폭해질 수 있는 나를 제어하는 힘이 내 속에 있다. 이런 나를 받아들인다. 겸손하게 살아라는 뜻이다. 그래서 나와는 다르게 자신의 의지를 마음껏 펼쳐내는 기질을 가진 사람을 보면 부럽기도 하다. 결국 내가 가지지 못한 것, 내 부족함 때문에 방황을 하고 있나. 마음이 혼탁해진다.
수많은 사람들의 명리학 편력들이 내 머리를 쥐고 흔든다. 차근차근 하나하나 기초를 세워 열어가보자 했는데, 희한하게도 이 공부가 질주하는 본능이 있는지 멈춤 없이 앞으로 나아가고 만다. 마치 저 바깥의 자동차 소리 같다. 안전거리가 필요한데, 저절로 냅다 달리기만 한다. 멈추어야 한다. 느리게 가는 마차를 불러와야 한다. 차근차근히 손님을 앉히고 손님을 온전히 모셔가야 한다. 마차를 끄는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는 상태가 되어버리면 정말 곤란하다.
밖은 차갑고 방 안은 따뜻하여 안팎의 온도차가 몹시 나는 날이다. 균형이 맞지 않아선지 마음이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는다.
마음을 다칠 순 없으니까, 이럴 땐 억지로라도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가야 한다.
그래, 힘을 내서 나가자.
긴 패딩을 입고, 방한모자를 잘 눌러쓴다. 장갑도 끼고, 마스크도 잘 여민다.
이제 나가보자.
며칠 사이 얼었다 녹았다 한 산길은 딱딱하게 얼어 있다. 그래도 땅이 녹았던 흔적들이 울퉁불퉁 남아 있어 밟으면 뽀드득 소리가 난다. 층위를 이룬 흙들은 차갑고 심심한 겨울 산책길을 마치 건반처럼 연주한다. 따뜻했던 며칠 전의 기억을 담고 있는 것이다.
산 위를 오르니 칼바람이다. 그래도 끄떡없다. 등에는 어느새 땀이 나고 콧물이 마스크 사이에서 들락날락한다. 땀과 바람이 하나가 되어 내 몸을 감싸지만 하나도 춥지 않고 거뜬하다. 추위를 많이 타는 겨울생 나로서는 신기할 정도로 가뿐하니 이 무슨 조화인가. 이게 겨울 산책 맛이다.
머릿속이 비어 가고 온전히 겨울맛을 느낀다. 모자로 마무리 무장을 하길 잘했다. 이 방한 털모자가 내 귀를 덮고 있으니 맹추위에도 눈썹이 간지러움을 타는 정도다. 완전무장이 준 보호, 이런 건 진짜 직접 해봐야 안다. 정말이지 저 멀리 국립공원 산능선에 쌓인 설경이 안나푸르나같이 아름답다. 넓게 넓게 흰 날개를 드리우고 사람들의 마을을 품고 있는 저 광경을 보니 가슴이 탁 트인다. 나오길 참 잘했다.
내려오면서 생각했다. 오늘의 완전무장 중에서 아주 결정적으로 내 안의 온도를 유지해 준 것은 무엇일까.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방한모자다. 귀를 따뜻하게 막았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귀때기 떨어져 나갈 뻔했다.
세상의 온도를 느끼고, 세상과의 온도를 조율하는 것 중 너무 당연해서 그 중요성을 지나쳤던 나의 귀. 추위를 만나고서야 세상의 소리를 감지하고 나와 소통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가라앉는 그 순간에 나를 방치했더라면 내 귀는 내 안의 온통 어지러운 소리에서 차갑게 떨고 있었을 것이다.
무엇이든 방치하면 길을 잃고, 쓸모가 되지 않는다. 내 목소리를 잘 들어봐야 한다. 내 속을 모른다면 듣지 못할 것이고, 듣지 못한다면 난 여전히 어제와 다르지 않은 오늘을 살고 있을 것이다. 나는 변화하고 싶다. 죽을 때까지 변화하면서 살다 가려면 잘 듣고, 잘 보고, 잘 말해야 한다. 우선 잘 들어야 한다. 내 귀를 잘 열고, 잘 들어야, 세상과 소통하게 된다.
다시 집. 따뜻한 방. 마음이 들뜨지 않고 편안하다. 창 밖의 차소리도 안전속도로 가는지 굉음이 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