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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아나무 Sep 23. 2023

그때 엄마 나이 53세

딸도 모르는 마음

아버지는 내가 고2이던 겨울에 갑자기 돌아가셨다.

엄마와 우리 5남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너무 힘들었다. 아버지를 선산에 두고 돌아온 날 엄마는 몸져누웠고, 나와 언니, 오빠들은 말을 잃고 돌아앉아 울었다. 삼우제를 지내고 며칠이 지난 뒤 엄마는 '인제 우예 살아야 되노. 말 좀 해 보소.' 하며 통곡했다. 

엄마 나이 53세.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이른 나이였는데, 엄마는 아버지를 잃고 혼자가 되셨다. 


엄마는 협심증이 있었던 아버지를 두고, 그날도 무사하실 거라는 생각에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한다며 일을 나갔던 자신을 늘 책망하셨다. 힘든 일이 생길 때면 더 그랬다. 

"내가 등신이다. 오늘은 일 안 가면 안 되나 했는데, 아픈 사람을 두고 무슨 지랄한다고 나가 가지고 사람을 떨갔노."  

 병 때문에 방바닥을 지고 누워 계서도 아버지는 우리에게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돈을 못 벌어와도 아버지의 존재는 가난을 이겨내며 살아갈 수 있도록 끌어주신 정신적 지주였다. 그런 아버지가, 엄마의 남편이 우리 곁을 떠나 먼 세상으로 가 버리셨다. 자식인 우리는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이었어도 엄마가 있어서 이겨낼 수 있었는데, 엄마는 어땠을까. 나는 엄마의 고통을 겉으로만 느끼면서 엄마의 마음을 안다고 여겼다. 그리고 엄마는 엄마니까 당연히 힘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남기신 짐은 고스란히 엄마의 몫이었다. 집안의 종부 역할에 학교를 다 마치치 않은 자식들, 혼기가 찬 자식들, 살림에 허덕이는 큰 아들 등 숨 답답한 태산 같은 일들만이 앞에 놓여 있었다. 그 겨울 엄마는 불도 켜지 말라며 벽을 향해 돌아 누우셨다. 엄마의 캄캄한 마음을 우리는 다 알지는 못했다.

"엄마. 우리가 잘할게. 좀 일어나 봐."

 돌아누운 엄마를 보며 무섭고 막막하기만 했다.


고3이 되던 이른 봄, 우리는 더 허름한 동네로 이사를 했다. 엄마는 나보다도 일찍 새벽 인력시장으로 나가셨고 컴컴해져야 돌아오셨다. 큰 결심을 한 듯 엄마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엄마가 얼마나 이 악물고 버티기로 한 것인지도 모른 채 우리는 각자의 일에 충실했다. 


갑자기 비가 온 여름 토요일이었다. 버스에서 내렸는데, 다른 애들은 기다리던 엄마와 함께 돌아갔지만 나를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버지의 부재를 뼈저리게 느꼈다. 나는 비를 피해 상점 처마 밑에서 우두커니 기다렸다. 비가 오니까 혹시 엄마라도 일찍 마치고 와서 나를 마중 나오겠지 하며 한참을 서 있었다. 기대는 점점 암울해져 갔고, 가슴에선 뜨겁고 서러운 것이 치받쳐 올라왔다. 억수같이 내리는 빗속을 걸으며 빗물인양 눈물을 흘리며 집으로 갔다. 

엄마와 언니가 와 있었다. 더 북받쳤다. 여태껏 모두가 참아왔던 울음을 혼자서 다 토해내듯 엉엉 소리쳐 울었다.

"다른 집 애들은 다 엄마 아부지가 우산 가지고 기다리는데. 엄마는 이기 뭐꼬. 아부지가 있었으면 이랬겠냐고! 아부지이." 

하지 말았어야 할 원망을 막 해댔다. 엄마가 울면서 말했다.

"아이고 미안하대이. 내가 이제 막 와서 생각을 못 했네. 니 아부지가 있었으면 안 그랬제. 얼른 우산 가지고 가서 기다렸제. 아이고 맹이 아부지이."

엄마는 누가 건드리길 기다린 것처럼 나보다 더 서럽게 울었다. 그동안 어떻게 꾹꾹 참아왔던 것인지. 엄마와 언니는 대놓고 울었다. 엄마와 언니가 힘들게 우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제야 철없는 나를 책망했다. 

억척같이 일만 하는 엄마를 보며, '아버지를 잊어버렸나, 아버지 없이도 꿋꿋하게 잘 견디네' 하는 마음이 내 속에 언뜻 있었던 같다. 참 어렸던 날의 투정이었다. 사실, 말 안 해도 다 알고 있는 걸 굳이 나는 우산을 핑계로 엄마를 아프게 하고, 가장같은 언니를 울게 했다. 엄마도, 언니도 아버지가 너무 그립고, 아버지의 부재가 너무 힘들다는 걸 알면서 말이다. 그날 이후로 결심했다. 절대 엄마 앞에서 울지 않겠다고. 


엄마가 무너지는 것을 보고야 말겠다는 듯이 악을 썼던 나는 대학생이 되어 엄마를 다시 보게 되었다. 엄마가 지고 있던 가난과 노동과 인내와 책임 등 엄마의 삶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졌다. 오로지 자식들이 제 길을 잘 가는 것만이 그 무게를 덜어 드리는 것이었고, 그러면 엄마는 좋아질 거라고 믿었다. 종부로서의 책임과 자식을 둔 엄마로서의 일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서도 흐르는 세월은 간간이 웃음을 주었다. 자식들이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고, 손주가 태어나고, 집안의 대소사를 의논하는 친척들이 있어서 이제는 좀 편안해지셨을 거라 생각했다. 

막내인 내가 결혼을 하고 나서는 완전히 혼자가 되신, 늙어가는 엄마는 술을 한 잔씩 드셨다. 

"엄마. 평소에 술 한 잔도 못 하면서 어째 술을 먹어? 괜찮아?"

"내가 언제부턴 반주로 한 잔씩 먹어야 속이 내려간다. 하루 이틀 먹다 보니 괜찮네."

나는 그저 그런가 보다고만 생각했다. 그 헛헛했을 속을 더 깊게 보진 못했다.

노인학교를 다니시면서 배운 것을 꺼내 놓고, '인제 이걸 배워서 뭐 하겠노' 하시면서 힘든 자랑을 하셨다. 힘들면 그만 다니라고 하니까, 사람들 만나서 시간 보내다 보면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니 덜 적적하다고 했다. 어떨 때는 일부러 걸어서 큰 재래시장에 가기도 하고, 어떨 때는 친척들과 한나절 통화하기도 하고, 어떤 날은 옛날 살던 곳의 집주인을 만나기도 한다고 하셨다.

나는 엄마가 현명하다고 여겼다. 그리고 얼마나 쓸쓸할까 생각하다가 '옆에 친척이 있으니까 괜찮겠지' 하며 스스로 부담을 덜어내곤 했다. 전화하면 언제나 '난 괜찮다. 너거들이나 탈없이 잘 있으면 된다. 걱정하지 마라.' 그랬다. 그 위로의 말을 듣고는 쓰이던 마음을 내려놓고 엄마 걱정에서 놓여나곤 했다. 

엄마는 자신의 외로움과 쓸쓸함은 내비치지 않으신 채 자식들이 조금이라도 편치 않을까 봐 마음 졸임 하시다가 결국은 병을 얻으셨다. 74세 엄마는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53세에 혼자가 된 엄마. 53세에 남편을 잃은 나.

무슨 운명처럼 엄마를 닮았다. 엄마가 얼마나 힘드셨을지 온몸으로 느낀다. 자식인 내가 아버지를 잃은 슬픔과 엄마가 남편을 잃은 고통은 비교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비로소 느낀다. 곁에 있던 사람이 영영 사라진 현실이 믿기지 않는데, 혼자 남은 허망함이 일상을 뒤덮어도 바닥을 짚고 힘을 내야 하는 것이 남편을 잃은 엄마의 일이었다. 슬퍼도, 힘들어도 슬프다 , 힘들다 말할 수 없는 것이 엄마의 마음이었음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내가 힘들 때마다 그 시절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알게 된다. 가슴이 터지도록 엄마가 그립고, 마음이 아프다. 

나도 그때 엄마처럼 힘을 내야 한다. 벽을 보고 누워 계시던 엄마의 마음과 줄곧 '이게 다 무슨 소용있노.'하시던 마음 그리고 '니들만 탈 없으면 된다' 하시던 그 마음이 나에게도 저절로 들어오게 될 줄이야.


자식일 때는 부모의 죽음을 슬퍼하면서도 순리대로 받아들이게 되지만, 배우자의 죽음은 그렇지 않다. 죽을 때까지 평생을 함께 할 거라는 생각에 오히려 순리가 깨지는 슬픔이다. 순리대로 가지 못하고 중간에 휘어지게 되니 남은 사람이 길을 잃고 만다. 남은 생을 가게 되지만 꺾인 상처는 펴지지 않다. 꺾인 채로 가야 할 길을 가게 되는 것이 남은 자의 순리다.

엄마를 자주 떠올린다. 이 즈음이면 이랬겠구나, 저 나이엔 저랬겠구나 하며 나를 비춰본다. 혼자 남은 사람이 다 똑같은 길을 가는 건 아니지만 '사는 게 뭔지' 하는 이 의문은 마음속에 다 지니고 가는 것임을 엄마를 떠올리며 생각한다. 그러면 이 허망함 앞에서 덜 외로워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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