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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아나무 Oct 02. 2023

사회적 죽음, 참혹한 사별

진짜 애도는 

어느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는 문장은 결코 쉽지가 않다. 혹여라도 그 슬픔이 통상적인 것이 되거나 애도의 문장에 진심을 다 싣지 못하게 될까 봐, 주저하게 된다. 그래도 사회적 죽음으로 인해 울고 있는 TV 속 유족들을 보면 가슴이 아려와 어떻게 해야 그 눈물이 그치게 될른지 생각하고 생각해본다.


세상의 모든 죽음은 슬픔이고 아픔이다.

생명이 다한 자연적인 죽음과 사고나 병으로 인한 개인적인 죽음도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인데, 하물며 안전 관리 부실이나 산재, 전쟁 등 사회적 원인으로 인한 죽음은 슬픔을 넘어선 참혹한 아픔이다. 


납득하기 힘든 죽음은 그 가족들뿐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큰 충격이다. 그런 죽음 앞에선 숨을 멈추게 된다.

2014년 세월호 참사 때, 우리는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끔찍해했다. 그런데 2022년 이태원 참사, 2023년 오송지하차도 참사가 또 일어났다. 놀랍고 두렵다. 안전을 믿고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 머릿속에 이제는 이것이 결코 남의 일이 아닌 것으로 다가온다. 지나간 애도의 글귀가 다 마르기도 전에 연이어 일어난 사회적 참사 앞에서, 우리의 신경은 내가 살고 있는 공간에 대해 안전을 의심하게 된다. 


올해 들어 유난히 더 비극적인 죽음이 많아 침울해진다. 

참혹하게 죽음을 맞이한 누군가를 생각하면 그 유족이 아닐지라도 가슴에 움푹한 구멍이 생긴다. 온전한 한 생명이 자신도 모르는 어떤 이유로, 또 누군가의 괴롭힘 때문에 죽음의 순간을 맞닥뜨렸을 때 그 순간이 얼마나 무서웠을까. 그 두려움과 공포감을 생각하면 온 신경이 뻣뻣해진다. 병으로 사별을 겪은 사람도 이런데, 그 유족들은 어떻겠는가. 가늠할 수 없는 참혹함에 밥도 넘기지 못할 것이다.


한 존재는 하나의 세계다. 그래서 한 존재의 죽음은 하나의 세계가 사라지는 것이다.

생명은 부모로부터 태어나서 자기의 이름을 가지고, 자신의 시간과 공간을 살아간다. 세상에 없던 고유의 영역이 새로 생겨난 것이다. 거기에 가족들이 있고, 친구들이 생기고, 알게 되는 이웃들로 채워지면서 자신의 시공간이 확장된다. 좀 더 나은 사람이 되어 보려고, 좀 더 잘 살아 보려고 노력하면서 자기 세계를 만들어 간다. 

그러므로 그런 한 존재의 죽음은 그의 한 세계가 사라지는 것이다. 참사는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수많은 세계를 잃어버린 것이고, 유족들에겐 온 세상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는 문장은 결코 쉽지가 않다. 

누구나 겪게 될 죽음이지만 그 죽음이 자연의 섭리에 따른 것이 아닌 사회적 참변이라면 우리는 더욱 사회적 애도의 국화를 올려야 한다. 참변을 당한 한 사람이 내 자식이거나 부모, 형제, 남편, 아내가 아니라고 해서 남의 슬픔일 수만은 없다. 우리 모두가 유족의 마음이 된다.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살아도 살아있는 게 아닐 것이다. 


얼마 전 영화 <오퍼레이션 피날레>를 보았다.

내용은 유대인을 학살한 홀로코스트의 마지막 남은 전범을 끝까지 찾아내서 재판정에 세워 심판한다는 것이다. 이 임무를 수행하는 비밀작전요원들은 나치의 학살로 가족의 대부분을 잃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학살당한 가족들을 떠올리며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던져 아르헨티나로 숨어 버린 마지막 전범을 찾아낸다. 그리고 마침내 이스라엘로 송환하는 데 성공한다. 자신의 죄를 숨기고 아르헨티나인으로 평화롭게 살던 아돌프 아이히만은 명령에 따라 학살을 대행했을 뿐이라고 범죄의 책임을 희석시키려 하지만 끝내는 책임을 인정하고 사형을 받는다. 사형이 선고되는 날, 가족을 잃은 요원들과 육백만 명의 유족들은 미소를 지으며 어두운 삶에서 자유로워진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학살로 인한 참혹한 고통은 어떻게 해야 해소되는지 보여준다. 마지막 남은 한 명까지도 반드시 역사적 심판을 받도록 해야만 참혹한 죽음으로 인한 고통을 덜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유족들이 자신의 삶을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TV 속 유족들이 왜 그렇게 <진상규명 책임자처벌 위원회>를 만드는지 그 심정이 백분 이해가 간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야 가족을 잃은 억울함을 풀 수가 없을 것이다.

맹자는 환과고독, 즉 남편을 잃고, 아내를 잃고, 부모를 잃고, 자식과 친지를 잃은 이 네 부류의 사람들이 가장 외롭고 궁색한 백성이라 했고, 가난한 사람들과 이들을 가장 먼저 돌보는 것이 왕도라고 했다. 그런데 나라가 안전 관리 부실로 시민들을 환과고독자로 만들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영화에서처럼, 국가는 유족들을 위해 참사에 대한 책임을 분명하게 따져서 해결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에게 진정한 위로가 될 것이다. 이것이 진짜 애도가 아닐까. 


참혹한 이별을 겪게 된 환과고독 이웃들의 심정이 되어 본다. 억울함이 풀리지 않는다면, 일 년이고 이 년이고 돌덩어리를 가슴에 얹은 채, 잠들 수 없는 날들을 살게 될 것이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삶일 것이다. 이 참혹한 사별자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애도의 문장으로는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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