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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아나무 Oct 11. 2023

지금의 일, 마음의 모순을 끊는 일

직장을 그만두다

 올 2월 말, 나는 나를 온전히 두기 위해 명퇴를 했다.

시간이 해결해 주지 못하는 공허감을, 오로지 그 상태를 물러서지 않고 들여다보기로 했다. 

있는 그대로 나에게 빠져 보자, 그러면 어떻게 되려나. 의지가 닿지 못하는 상태를, 무엇도 의미화되지 않는 일들을, 애쓰지 않고 그냥 그대로 던져두고 내 속에서 어떤 마음이 일어나는지 보자. 나는 나를 보고 싶었다.




나에겐 삶이 의지가 아니라 의무에 가까웠다. 

자식들에 대한 엄마로서의 의무였고, 학생들에 대한 교사로서의 의무였다. 지속되어야 할 생활의 의무가 아침이면 나를 꾸덕꾸덕 일으켜 출근하게 했다. 

학생들을 보면서, 오늘도 변함없이 일상이 이루어지고 있어요, 하듯 웃었다.


힘내요

최선을 다해 노력해 봐요 그럼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이겨나갈 수 있는 힘이 생겨요

마음을 다하면 실패도 좋은 일로 이어지게 될 거예요

자신을 잘 들여다보고 쓰다듬어 주세요 다 잘 살고 싶어서 힘든 거예요

오늘 하루도 참 좋은 날이야 라고 최면을 거세요 

마음을 바꾸면 세상이 달라져요


나는 아무 문제없는 사람인 양 이런 말들을 하면서 힘을 주고, 용기를 내라 하고, 격려하고, 칭찬했다. 내가 뱉은 그 말들은 곧 내게로 되돌아 꽂히면서 나를 책상 밑으로 기어들고 싶게 했다. 눈을 마주치기 힘들어 허공에다 초점을 던졌다.


아침 독서 시간에는 책 소개를 하고, 책 읽기를 강조하고, 독서 일기에 댓글 달아주기를 하면서도, 정작 나는 그날 이후로 책 한 권도 읽을 수 없었다. 모순이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러면 안 된다고 마음을 다잡아 읽기를 시도해 보지만, 이내 답답하고, 울렁거리고, 가슴이 요동쳤다. 도무지 안 되었다. 

어떨 때는, 마음을 다스리는 책을 보면 좀 괜찮을까 하고 책을 고른다. 마음이 가는 목차의 장을 펼쳐 첫 문장을 보는데 갑갑증이 또 올라온다. 빠르게 덤벙덤벙 책장을 넘기면서 나를 잡아줄 문장을 찾아 헤맨다. 그러나 이내 책을 덮어 버린다. 한낱 문장으로 어떻게 마음을 잡아 둘 거냐며. 

어느 순간부터 아침 독서 시간에 하던 일들을 하지 않게 되었다. 아이들 앞에서 자신이 없었다. 내가 실천되지 않는 일들을 가르침이라는 명분으로 더 이상 이어갈 수가 없었다. 이래 가지고서야 내가 선생 노릇 제대로 되겠나 하는 자괴감이 밀려들었다. 남들은 몰라도 무력해지는 나 자신을 나는 알았다. 


언제라도 그 괴리감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몇 년을 더 다니게 되었다. 그렇게 기계적으로 지내는 동안 그만 두지 못하는 내 마음은 더 말라 들어갔다. 물기 없는 마음. 교사로서 이전의 내 모습과는 참 많이도 다른, 쪼그라든 의무인이 거기 있었다. 


그러다 2년 전에, 여러 번 자살 시도를 한 아이의 담임을 하게 되었다. 

중1이었음에도 꽤나 어른스럽고, 말도 조리가 있었으며, 배려심도 있는 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초등학교 때부터 자해를 했고, 중학생이 되어서는 자해와 자살 시도를 반복했다. 

이유는 다문화가정이었던 부모한테 있었지만, 자신은 자기 때문에 모두가 불행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기가 잘못 태어나서 어릴 때부터 부모가 싸우고, 도망가고, 자식을 버렸다고 생각했다. 자기만 없으면 된다고 자기 탓을 하기 시작하면 끝없는 우울의 나락으로 떨어진다고 했다. 그런 자신을 어떻게 할 수 없어서 자해한다고 했다. 심한 정서적 불안과 조울증을 앓고 있었으나 부모 중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하니까 그 애는 자꾸 자해와 자살 시도를 했다. 결과적으로는, 부모가 인정하고, 아이에게 사과하고, 아이는 입원 치료를 받으면서 점차 회복하게 된 경우였다. 


자해를 알고나서부터 그 애와 참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내 속에는 사별의 고통과 삶의 허망함이 한 우물인데,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버겁고 고통스러웠다. 내 문제도 못 다스리면서, 아이에게 자신을 따뜻하게 쓰다듬어주라고 하다니. 그 모든 게 네 잘못이 아니라고, 네가 살아야 부모님도 산다고 하면서, 너의 우울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아보자고 하면서, 죽을 생각으로 일단 살아보자고 했다.


그런 얘기를 주고받은 날의 저녁은 더없이 마음이 무거웠다. 어릴 때 다친 마음의 우울이 현재는 물론이고 어떻게 미래를 지배하게 될 지 예측이 되었다. 근본적인 원인을 알아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자해나 자살시도는 원인병증을 넘어서 습관화되기도 하니까, 나는 내 정신력을 다 끌어와 그 아이에게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나도 잘 안 되면서 선생이라는 이유로 힘을 내야 했다.


일 년에 걸쳐 그 아이를 겪고 난 후, 그 아이와 친구였던 몇몇 아이들이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상황을 제일 잘 아는 나는 그 아이들의 담임을 일 년 더 맡아 최소한의 내 소임을 마쳤다.

마지막 일 년이 물처럼 흘러갔다.

뭐 그러면 어때. 그냥 네 하고 싶은 대로 해. 네 마음 편한 게 최고야.

그렇다면 기다려보자. 

이런 말들로 격려인지 방임인지 나도 알쏭달쏭해하면서 장난치고, 갈등하고, 애쓰는 아이들과 함께 탈없이 보냈다.


나는 내 이유를 안다. 

남편이 저 세상으로 간 이후 멈춰 버린 마음. 세상의 시간은 흘러가도 내 마음은 헛도는 시계바늘처럼 허공을 헤매었다. 딴 세상을 사는 사람이었다. 기계적으로 출근하여 학생들 앞에 서지만 온전하게 마음을 다할 수 없었다. 그것은 나만 아는 마음이다. 몇 년을 그렇게 지내는 동안, 그렇게 지내는 나 자신 때문에 또 심한 한숨이 나왔다. 나의 모순이었다.


직장을 그만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평소에 말로는 그만둔다 그만둔다 하면서도 여러 가지를 생각하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진짜 내 마음의 모순을 끊고 벗어나기 위해 대책도 없이 나왔다. 

나에게 말했다.

내가 나를 온전히 편안히 할 수 있다면, 이후에 뭐라도 하겠지. 뭔 지는 몰라도 그것조차 지금의 일은 아니니 생각을 말자. 지금의 일은 내가 나를 찬찬히 잘 보는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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