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서양 바다 위 노을과의 접신을 꿈꾸며
나는 책상에 세계 지도를 펼쳐 놓고 지도를 따라가는 앉은뱅이 여행자다.
나라 밖 여행은 가고 싶지만 두렵다. 언젠가는 가 봐야지 하면서도 나가 봐야 아나, 노자도 앉아서 세상을 다 본다는데, 하며 가지 못하는 상황을 합리화했다. 그러다 딱 한 번 실행에 옮겼는데, 15년 전 친구들과 함께 한 베이징 여행이 전부다.
그러나 이번엔 다르다.
내 상태에선 그것이 무엇이었든 마음에 조그마한 동요가 일어난다면 움직이는 게 필요했다. 살아지는 일상에 스스로 변화를 줄 수 있는 것이라면 이후에 또 어떤 상태의 내가 되어가겠지 하는 마음으로, 무엇이 일어나길 기다렸다. 그렇게 다가온 것이 여행이었다.
퇴직 무렵, 나는 나를 지배하는 공허한 상태를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왜 이럴까' 대신, '그냥 그렇다', '이게 내 마음이다'하고 둬 버렸다. 사람들로 엮인 거미줄을 거둬들이고 진정한 몇 가닥만으로 간소하게 하니 관계가 가벼워졌다. 이제 오롯하게 내 공허한 마음과 얘기해 볼 시간이 되었다.
가장 먼 곳에 가면, 가장 먼 곳으로 영영 간 사람을 가장 가깝게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뭐라도 대답해 주지 않을까. 잘 있냐고. 나는 편안하게 잘 있으니 걱정 말라고. 그러면 마음이 놓이겠다. 그쪽 세상에서도 잘 지내고 있으니 죽는다고 영 사라지는 건 아닐 거니.
끝없는 먼바다 위를 불그레하게 비추는 노을빛이라면 이런 말이 전해지지 않을까.
대륙의 끝에 서서 대서양 하늘을 물들인 붉은 노을을 본다면.
마음이 가는 대로 상상하고, 상상하는 대로 마음이 더 갔다. 대륙의 끝 대서양이 이 세상의 끄트머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서양 바다 위 노을과의 접신을 꿈꾸며 떠나보기로 했다.
4월 초순, 스페인 포르투갈로 가는 여행사의 7박 9일 패키지 일정 속에 나를 맡겼다. 이 비슷한 기간으로 카보다로카 일정이 있는 패키지는 보이지 않았다. 나에겐 너무나 멀고 긴 두려운 여행이기에 이것도 엄청 용기를 낸 선택이었다.
가우디 건축이나 대규모 성당, 하몽이나 빠에야 같은 음식에 대해선 별 호기심이 없었다. 내 중심은 대륙의 끝에서 대서양과 바다 위 노을을 보는 것이었다. 선택한 패키지에 포르투갈 카보다로카가 명시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현지 사정에 따라 유럽의 서쪽 끝 카보다로카로 갈 수도 있다는 말에 혹시나 하는 기대가 있었다. 아니라면 포르투갈 벨렝탑 언저리에서 드넓은 바다라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있었다.
혼자가 되어 마음의 목적지로 떠나는 여행은 내 인생에 홀로 설 수 있는 분기점이 될 것도 같았다. 두려움과 공허함을 품은 채 떠난 여행에서 내가 어떤 모습일지, 돌아와서는 어떤 마음이 될지 보고 싶었다. 일종의 홀로서기 관찰 여행이기도 했다.
패키지여행의 모든 불편함은 아무렇지도 않은 평범한 일상쯤으로 마음다짐해 두었다. 패키지여행의 일정이 아무리 힘들다 해도 그러려니 하는 마음과 낯선 이들 속 혼자 하는 자유 여행 정도로 마음먹으니 오히려 편안하고 안전하게 생각되었다. 잠자리나 화장실 문제 등 사소하고 민감한 신체적 문제도 어떻게 내가 적응하게 될지, 이것도 내겐 중요한 실험대였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나는 내 생애 가장 먼 대륙의 끝으로 밤하늘을 날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