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바람이 불어오면

가을무렵

by 맑은샘

처서를 지나면 바람의 느낌이 다르다. 올 여름 유난히 뜨거웠다. 그래도 절기의 변화는 거스를 수 없다. 뜨겁던 태양이 지고나면 언제 더웠냐는 듯 바람이 시원해진다. 시골들녘은 더 그렇다. 벼가 폈다. 바람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며 영글어가는 알곡, 주머니 하나마다 쌀알이 들어 햇볕과 바람에 점점 통통해져간다. 더웠던 여름 뙤약볕에 땀 한바가지 흘리며 농사일하던 아버지 엄마도 시원해진 바람에 한 숨 돌린다. 저녁마당에는 풀벌레 소리가 요람하다. 찌찌찌, 찌르르륵 그 소리하나만으로도 가을이 성큼 다가온 느낌이다.


풀베기 좋은 계절이다. 여름 소나기가 지나가고 뜨거운 햇살을 받은 풀들은 무성하게 자랐다. 여름 끝자락 아버지는 마당 한쪽에 퇴비를 만들 준비를 한다. 해가 넘어갈 무렵 선선해진 바람을 등지고 지게에 바지게를 얹어 두 손에 작대기를 들고 뒷산으로 향한다. 낫질 몇 번이면 금세 한 짐 벤 풀을 얹어 한 발을 꿇고 작대기에 의지해 끙차 일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풀을 한 짐 짊어지고 휴, 휴, 숨을 고르며 마당으로 들어선다. 온 몸은 땀으로 절었어요 힘들다 불평한 번 하지 않던 아버지.


며칠 동안 모은 풀이 마당 한 쪽에 산만큼 쌓이면 큰 작두를 꺼내오신다. 무쇠로 된 작두는 크기가 한자나되고 나무 손잡이에 새끼로 꼬아 만든 끈을 달았다. 2인 1조로 호흡이 잘 맞아야하는 작업이다. 아버지는 작두 앞에 앉아 풀을 한 줌 잡고 언니는 작두에 한 발을 올리고 끝을 들어올려 힘껏 밟는다. 싹둑, 삭둑 마당에 작두질하는 소리가 가득찬다. 언니가 지치면 작은오빠에게 바통터치, 키가 작은 오빠는 한 쪽발에 디딤돌을 놓고 아버지의 손을 보면서 작두질을 한다. 선선해진 가을바람이 불어도 풀을 넣는 아버지나 언니오빠는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풀냄새가 온 마당에 풍기며 마당 한쪽에 퇴비더미가 생겼다.


엄마의 부엌에서는 맛있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바로고기냄새. 여름 내 땀에 절어 일 하던 아버지를 위해 보양식을 만든다. 암탉이 알을 나항 스무하루동안 품어 깨어나 빼약빼약, 마당에 풀어 키운 병아리가 자라 튼실한 닭이 되었다. 오늘은 토실토실 살이 오른 닭을 한 마리 잡는날이다. 닭을 잡는 것은 아버지의 몫이다. 해가 질 무렵 치간 한쪽 횟대에 잠자러 올라간 닭을 다리 하나만 잡아채는 기술을 가졌다. 가마솥에 뜨거운 물 끓이고 닭 모가지를 비툴어 끓는물에 잠시 넣어 털을 뽑는다. '문덕 문덕 잘 뽑힌다' 다락털이 뽑히며 하얀 속살이 드러난다. '으, 아버지 징그러워' 하면서도 시선은 그곳을 향해있다.


털이 뽑힌 닭은 숲돌에 칼을 갈아 가운데 배를 가른다. 붉은 뱃속이 드러나며 닭의 창자르 따로 분리하고 모래집을 꺼내고 검은색 쓸개를 떼어낸다. 창자는 칼끝을 살살 밀면서 똥을 빼내 깨끗하게 씻는다. 모래집은 반으로 잘라 내용물을 꺼내서 버리고 뜨거운 물에 담갔다가 칼로 살살 긁어내면 누런 껍질이 벗겨진다. 닭의 뱃속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난다. 알주머니에는 미처 깨어나지 못한 알이 노랗게 핏빛이 맺혀있다. 수돗가에서 닭을 잡는 동안 우리 시선은 옽통 닭에게서 떠나지 않는다. 깨끗하게 닦인 닭은 바가지에 담겨 엄마의 부엌으로 이동한다.


옾나무를 베어온다. 껍질을 벗겨서 엄마에게 건네지면 가마솥에 물을 넣고 불린 찹쌀, 옻나무, 대추, 닭을 뱃속 가득 넣고 불을 땐다. 푹 고아진 닭 국물은 뽀얗고 약간은 검은 빛 물이돈다. 어떤 사람은 옻을 가까이 쳐다보기만 해도 가렵고 옻이 오른다는데 다행히 우리가족은 어릴 적부터 노출이 되어서인지 옻을 타는 사람이 없었다. 잘 고아진 달 한마리는 가을을 시작할 무렵 찬바람이 불면 먹는 보양식이었다. 물론 아버지의 기력회복을 위한 음식이었지만 자식들 입에 들어가는 것을 어찌 막으랴! 먹고 남은 것이 솥에 보관되어 있으면 쥐방울 마냥 들랑날랑 하며 동생들이랑 한 입 쪽쪽 빨아먹었던 맛있는 기억이 있다.


텃밭에 골을 내신다. 닭으로 온 가족이 몸보신을 하고 아버지 엄마는 김장때 쓸 배우, 무를 뿌릴 텃밭을 평평히 고른다. 한 줄씩 나란히 씨앗을 심고 흙으로 살살 덮는다. 선선한 가을바람 타고 며칠이면 연두빛 새싹이 고개를 내민다. 김장배추는 겨울동안 먹을 유용한 식량이었기에 정성을 다해 기른다. 두 잎이던 싹이 제법 배추모양이 되면 중간중간 솎음을 해 한바구니 뽑아온다. 서걱서걱, 밭에서 바로 뽑은 아기배추는 싱싱함 그 자체이다. 반으로 잘라 굵은 소금 뿌려 잠시 재워놓는다. 고추밭에서 빨간 고추 몇 개따고 식은밥, 마늘, 멸치젓갈 넣고 학독에 고루 갈아주면 달큰한 냄새가 난다.


잘 절여진 배추를 채반에 건져놓고 물이 빠지기를 기다린다. 학독에 있는 양념과 함게 버물버물 엄마의 손이 몇 번 움직이면 빨간 배추김치가 담가진다. 옆에서 이제나 저네자 기다리던 아기참새입들 속에 엄마의 손으로 집어 넣어주면 '음, 맛있다' 더운 여름을 지나 찬바람을 맞고 자란 배추는 연하고 부드럽다. 멸치젓갈냄새와 고추를 갈아 넣어 달큰한 맛이 일품이다. 오늘 저녁밥상에는 온 가족 양푼에 하얀 쌀밥 넣고 새로 담근 김치 넣고 비벼먹을 것 같다. 가을바람이 불어오면 곡식도 풍성해지고 선선한 바람에 가을들판의 알곡도 익어간다.


주말 시골마당에 가면 풀벌레 소리를 들어야겠다. 고추대를 뽑아내고 그 자리에 엄마 아버지가 그랫듯이 땅을 파고 골을 내고 그 자리에 배추씨, 무씨 몇 알 넣고 골고루 흙을 덮어 김장때 쓸 배추 무를 심을 예정이다. 지금은 계시지 않지만 어릴 적 어개너머로 보고 자란 그대로 세대는 이어지고 가을, 바람이 불어오면 가을 맞을 준비를 한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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