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도 이랬겠지

첫 아이를 낳던 날

by 맑은샘

스물 다섯 아버지가 돌아가신 일 년 후 결혼을 했다. 동네 선배와 집안끼리도 잘 아는 사이였다. 결혼준비는 예물, 예단도 간단히 하기로 했다. 전날 함을 팔고 집에서 잠을 잔 후 두시간 걸리는 결혼식장에서 다섯 시에 일어나서 자동차로 이동했다. 컴컴한 시골길을 달려 광주에 도착하니 그제야 실감이났다. 아버지의 빈 자리는 큰아버지가 채워주셨다. 화장을 끝내고 입장하는 순간 엄마를 보지 말아야햇다. 큰아버지 손을 잡고 버진로드를 입장했다. 주례사의 말은 마지막 말만 들렸다. '신사임당처럼 현명한 엄마가 되라' 그 말은 마음이 힘들 때 나를 다잡는 문구가 되었다. 돌아서서 부모님께 인사드릴 때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왈칵 눈물이 쏟아졋고 기다랗게 붙인 속눈썹이 떨어질 만큼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다녀온 후 인천으로 돌아로기로 한 날 엄마 집에서 하룻밤을 잤다. 홀로 집을 지킬 생각을 하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걱정하지 마라, 자주 들여다보마!' 다독여주는 시부모님을 믿고 신혼생활이 시작되었다. 누군가 그랬던가! 결혼하고 바로 현실이라고. 동암 남부역 광장쪽에 위치한 신혼집은 단칸방이었다. 서향의 2층 방 한칸에 부엌하나, 화장실은 1층에 있어서 불편했다. 그래도 둘이서 알콩달콩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연탄불에 냄비올려 밥하고 국 끓이고 회사 간 남편을 기다리는 일은 즐겁지만은 않았다. 무엇보다 타지에 홀로 있어야하는 외로움이 견디기 힘들었다.


결혼 후 3개월이 지났을 대 꿈을 꾸었따. 검은 돼지가 12마리의 새끼를 낳는 꿈이엇다. 복권을 살까? 고민도 했다. 그러다 임신인 걸 알게 되었다. 입덧을 하지 않아 불편함은 없었다. 하루하루 불러오는 배를 만지며 일상을 살아냈다. 예정일은 3월 중순이었지만 아이는 나올 생각이 없엇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잠자는 것도 불편해졌다. 무엇보다 수술을 해서 아이를 낳고 싶지는 않았다. 금전적으로 자연분만하는 것과 수술하는 것은 금액의 차이가 컸다. 주안에 있는 산부인과에 마지마 검진을 갔을 때 2주 기다렸다 아기가 나오지 않으면 수술을 해야한다고 했다. 그날 주안지하상가를 두 바퀴 돌았다.


2주가 지나 예정일을 넘겨도 아이는 나올 생각이 없었다. 이웃 사람들은 성모자애병원은 자연분만을 해 준다고 알려주었다. 다음 날 혼자서 병원에 검진을 갔다. 의사는 촉진제를 맞으면 아기를 낳을 수 있겠다고 말했고 그날로 입원을 했다. 산후조리를 도와주러 왔던 여동생에게 전화해 분만에 필요한 짐을 챙겨서 오게 했고 남편도 병원으로 달려왔다. 다음 날 새벽 6시 핑거를 팔에 꽂았고 분만에 필요한 관장을 했다. 조금 후부터 배가 살살 아파오기 시작했다. 10시가 되며 본격적인 산통이 시작되었고 허리가 너무 아팠다. 중간중간 의사가 자궁을 들여다보았고 통증은 주기적이고 반복적으로 시작되었다.


'수술해주세요' 소리가 나왔다. 드디어 분만실로 이동해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있는 힘을 다해 아이를 만나기 위한 일념으로 사력을 다했다. 11시 25분 할 수 없었을 것 같았지만 아이는 세상 빛을 보았다. 뱃속에서 얼마나 컸는지 머리가 까맣고 구렛나루처럼 길어서 나온 3.2킬로그램으 아들이었다. '엄마도 우리를 이렇게 힘들게 낳았겠구나! 아들이어서 다행이다' 처음 아기를 보며 든 생각이었다. 여자라서 아픔을 겪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도 잠시 손가락 발가락 열개, 눈, 코, 입 모두 있고 건강하는 걸 확인한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그렇게 난 엄마가 되었다.


시어머니는 칠순이 넘어 오시지 못했고 친정엄마는 거동이 불편해 올 수가 없었다. 바로 밑에 여동생이 와서 일주일간 산후 뒷바라지를 해주고 미역국도 끓여주었다. 동생이 내려가고 혼자서 육아를 감당하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엄마는 용감했다. 해보지 않은 일이었지만 천기저귀 삶고 빨랫줄에 널고 밤마다 수없이 쌓인 기저귀를 다음 날이면 하얗게 삶아 빳빳하게 개서 아이에게 보송하게 채워주는 헌신적인 엄마가 되었다.


그렇게 이십대 중반 엄마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를 낳아준 엄마를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밤새 잠을 자지 않고 칭얼대는 아기를 볼 때, 엄마도 이랬겠지! 아기가 열이나서 아플 때 어찌할 바를 모르던 나를 보면서 어릴 적 포대기를 하고 업어주던 어렴풋한 기억을 더음을 수 있었다. 그렇게 나보다 아기가 중심이 된 삶을 살아가며 신사임당처럼 현명한 엄마가 되고자 셀 수 없는 다짐을 해 본다. 오늘도 내 나이가 된 엄마를 그리며 이랬겠지!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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