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다가 만난 풍경
시골에서 맞는 아침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가을에 내리는 비, 운치는 있지만 수확하는 농민에게는 득이 될 게 없는 불청객이다. 수확을 앞둔 들판의 벼가 수확을 기다리다 지친 듯 고개를 숙이고 있다. 일주일 사이에 무거운 벼이삭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진 벼들도 있어 안타깝다. 농부에게는 일 년 농사의 결실인데 내 마음이 이러는 걸 보니 바라보는 농부들은 더하겠지. 주말 계획 속에 들깨 수확을 한 후 그 자리에 마늘모종을 심으려 했다. 여름에 심었던 들깨는 깻잎을 실컷 따 먹을 수 있었고 열매를 맺어 까맣게 익어간다. 돌봄을 받지 않아도 때를 알고 익어가는 모습이 참 신기하다.
비는 계속 내리고 있다. 다행히 가랑비로 바뀌고 있어 알록달록한 무지개 우산을 펼쳤다. 들판으로 나가봐야겠다. 하얀 대문을 열고 나오니 바로 황금빛 벼가 수확을 기다리고 있다. 밤새 내린 비로 수로를 따라 흐르는 물살도 제법 거센소리를 낸다. 한적한 논길을 걸으니 가을바람이 서늘하게 내 몸을 스친다. 동네 집집마다 주황빛 감이 익어가고 홍시 하나 먹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대봉, 납작 감, 단감 다양한 감나무가 결실을 기다리며 내 마음을 유혹한다. 길 따라 걷다 보니 작은 밤알이 몇 알 떨어져 있다. '꿩대신 닭이다' 쭈그리고 앉아 몇 알 주워 주머니에 넣었다.
끝없이 펼쳐진 들판은 황금물결이다. 진시황의 백만 대군이 줄지어 서 있는 것처럼 져들은 일제히 한 방향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다. 걷다가 슬그머니 주머니에 손을 넣어본다. 동글한 밤 하나를 꺼내 깨물었다. 하얀 속살이 단단하다. 껍질을 벗겨내고 표피를 살짝 벗겨 한 입 깨무니 아삭하다. 약간의 떫은맛조차도 추억의 맛이다. 오물거리며 길 따라 걷는다. 천천히 바람이 느끼며 넓은 들판의 한가운데로 나선다. 들리는 것은 물소리, 바람소리 이동하는 철세떼의 끼룩이는 소리뿐이다.
어느새 비는 그치고 평온한 만 남았다. 일찍 날아온 철새가 떼 지어 날아간다. 하늘에서 새들의 공연이 펼쳐진다. 앞서가는 새들을 놓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며 날아간다. 일렬로 날다, 횡렬로 변경했다 때론 제트기모양처럼 변하기도 한다. '대단하다, 어떻게 저렇게 질서를 잘 지킬까?' 끝없이 펼쳐진 들판 끝에 산이 보인다. 걸어온 길을 돌아본다. 도비산 자락을 타고 흐르는 수증기, 찐빵 솥에서 하얀 수증기가 피어오르듯 비 갠 산자락을 타고 하늘로 오른다. 장관이 따로 없다.
끼룩대며 어디론가 날아가는 철새 떼의 울음소리, 넓은 보를 따라 흐르는 힘찬 물소리, 하늘은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듯 검은 구름이 낮게 드리워져 느리게 흐른다. 가을아침, 바람은 누렇게 익은 벼이삭을 쓸고 내 머리카락 사이로 흐른다. 논둑에 피어난 강아지풀도 누렇게 변해 알알이 익은 알갱이로 무거운 듯 고개를 숙이고 있다. 천을 따라 흐르던 물줄기가 바다를 만나는 곳, 길가에는 키 작은 코스모스가 형형색색으로 피어 바람 따라 흔들리고 있다. 밤새 내린 비로 물줄기는 흙탕물을 뒤집어쓴 채 탁하게 변해 바다로 바다로 흐르고 있다.
그 물줄기를 따라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고 서 있다. 지구는 둥글다. 그곳에 서 있는 체로 360도를 돌아봐도 탁 트인 시야가 마음을 시원하게 한다. 바쁘게 살았던 도시 생활을 잠시 잊게 한다. 들판에 서 있는 것은 자연과 나뿐이다. 한참을 바람에 내 몸을 맡긴 체 멍하니 서 있다. 발걸음을 돌려 다시 집 쪽으로 향한다. 넓은 들판을 사진에 담고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멋진 모습의 도비산도 담았다. 천천히 걸으면 아무 생각이 없다. 길가의 이름 모를 꽃들도 아름답다. 진한 보랏빛으로 피어있는 나팔꽃도 이슬을 머금은 채 피어 싱그러움을 자랑한다. 그 사이에 노랑나비 두 마리는 나풀거리며 자유롭게 날고 있다. 모월저수지에는 세월을 낚는 강태공들이 낚싯대를 드리운 체 한 곳을 응시하고 있다.
내가 걷는 길은 목적지는 없다. 그저 이른 아침 들판을 따라가다 보면 하늘도 보고, 바람도 느끼고 발기 닿는 대로 충분히 걷는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생각이 많아진다. 무작정 걷다 보면 생각이 정리되고 복잡했던 마음은 평온을 찾는다. 가을 아침, 바람이 나를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나는 길을 걷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