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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은샘 Aug 16. 2024

나의 아버지

방매양반


  아버지의 헛기침소리에 사립문이 열리고, 새벽이슬 걷히기도 전에 바지게지고 논두렁 밭두렁에 풀을 가득 베어 돌아오시던 분, 외양간에 달린 가마솥에 베어온 풀 넣고 옥수수 대, 지푸라기 썰어서 베어온 풀과 함께 소죽 먼저 쑤어 주고 아침을 드셨던 주셨던 분이다. 방매양반은 우리 아버지를 부르는 호칭이다, 방매댁과 결혼하면서 자연스럽게 부르게 된 것이다. 1928 무진년생 호랑이띠 96세, 늘 그리운 이름, 5형제 중 차남으로 평지가 고향이며 강산이씨 셋째 딸과 결혼하며 데릴사위 격으로 장가를 온 셈이다. 댁호가 어떻게 정해졌는지 알 수 없지만 동네 사람들이 방매양반, 방매양반해서 그런 줄 알았다.     

  165센티 정도의 키에 다부진 체격으로 항상 웃는 얼굴을 하셨던 분, 2남 4녀 먹여 살리느라 농사일에 소장수에 하루도 쉬지 않았지만 아버지가 늦잠을 주무시는 걸 보지 못했다. 동분서주 하며 아무리 바빠도 자식들에게도 동네에서도 사람 좋기로 유명하셨던 분이다. 키는 크지 않았지만 명절 씨름대회 열리는 장원을 할 만큼 기운도 남다르셨던 장사였다. 아버지는 소를 키우셨다. 집에서 기르는 소도 있었지만 보성장, 나주장, 화순장, 5일장을 다니며 좋은 소를 사와 며칠 잘 먹여 다음 장에 파는 방식으로 소 장수를 하셨다. 오일장을 가려면 소를 몰고 걸어서 이십 리 길을 걸어가야 했기에 늘 깜깜한 새벽부터 일과가 시작되었다. 시장에 가려면 소를 몰고 함께 걸어가셨다가 팔고 돌아오시는 길은 책보에 둘둘만 현금뭉치를 허리춤에 매어 여름에도 점퍼를 항상 입으셨다.     

  허리춤에 찬 전대는 막걸리 한 잔 거나하게 취해서도 풀지 않고 주무시던 아버지, 중장터에 오일장이 열리면 거나하게 취하신 취하셔서 해가 지도록 집에 오시지 않으면 장터 여기저기 찾아다니는 것은 나의 몫이었다. 비틀거리는 아버지 부축해서 돌아오는 길 “오메, 내 딸이 데리러 왔냐” 라며 활짝 웃으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봄이면 키우던 소에 쟁기를 매달고 “이랴, 이랴, 워~워~하며 고랑을 만들어 씨앗뿌리고 논을 갈아 벼농사를 짓던 농부였다. 농사일이 힘들고 지치면 밭고랑에 앉아 잠시 쉴 때 중장터에 가서 노란 두 되짜리 주전자에 막걸리를 받아오게 했다. 열한 살 어린 나이에 심부름은 내차지였다. 아이 걸음으로 왕복 20~30분이 걸리던 길을 막걸리를 줄줄 흐르게 들고 오면 갈증 난 목을 축이셨다.     

 소죽 끓이고 밥해 먹고 땔감이 많이 필요하던 시절, 리어카를 끌고 범바위산 에 가서 가죽장갑을 끼고 아카시아나무를 가득하셨다. 방학이면 아버지를 따라 나무를 하러 이 산 저산으로 갔다. 가까운 산은 나무를 많이 해서 거의 민둥산이라 먼 산까지 가야했다. 도둑골에 가면 나무가 많았다. 아버지와 나는 깊은 골짜기까지 갈대나무를 해서 리어카에 가득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농사철 쓸 거름을 만드는 것도 아버지의 일이었다. 풀을 가득 베어 마당에 산더미만큼 쌓이면 작두를 꺼내와 언니, 작은오빠와 언니가 작두를 밟고 아버지는 작두에 풀을 넣어주었다. 싹둑싹둑, 풀을 써는 작두소리가 마당 가득 퍼졌다. 이마에 땀수건을 두른 아버지의 등이 촉촉이 젖어갈 때쯤 풀을 써는 일은 끝이 나고 소똥과 분변을 섞어 두었다가 잘 삭으면 논밭에 거름으로 사용되었다.     

  아버지는 단벌신사였다. 농사꾼이 늘 땀에 절은 옷 입고, 장에 갈 때는 점펴를 입으셨지만 일 년에 한 번 서울에 있는 외삼촌 네 갈 때 입는 양복 한 벌에 누군가 매어 준 넥타이는 늘 벽에 걸어두고 서울 창신동에 갈 때만 그 넥타이를 꺼내 목에 매었다. 벽에 서툰 글씨로 써 놓은 주소를 들고 버스를 타고 제사를 지내러 다녀오신 아버지였다. 궁핍한 살림이었지만  엄마에게 좋은 남편이었고 우리에게는 좋은 아버지였다. 자식들 키울 때도 화 한 번 내지 않으시고 힘든 일 속상한 일도 소주 한 잔에 털털 털어버렸던 분, 그런 아버지가 우리 곁에 오래 계실 거라 생각했지만 나의 아버지는 61세 환갑을 지나고 바로 갑작스런 이별을 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 전화를 받고 택시를 타고 집에 가던 그 길 , 도착해서 마주한 아버지의 앙상한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나의 사랑 나의 아버지, 지금은 엄마랑 함께 하늘나라에서 잘 계시겠죠? 살아생전에도 그렇게 우애가 좋으셨던 분인데, 돌아가시기 전 엄마 병수발 들며 호미 들고 밭고랑 매시던 아버지, 살아생전에 부엌에서 아침마다 아궁이에 제일 먼저 불 피워주셨던 자상했던 아버지, 결혼해서 큰 애 임신했을 때 꿈에 나타나 하얀 도포자락 휘날리며 밝은 후광이 비치던 곳으로 가시던 아버지의 모습 “ 걱정 말아라, 애기 건강하게 낳아서 잘 키우고” 라고 단 한번 꿈속에 찾아오셨던 분, 지금도 문득 문득 그리운 아버지를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웃는 모습으로 뒷짐 지고 마당에 들어설 것 같고 소를 보면 아버지의 눈망울을 보는 것 같아 늘 그립고 그리운 나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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