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 남매이야기

식구

by 맑은샘

식구란 한 집에서 함께 살면서 끼니를 같이하는 사람으로 한부모 밑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한솥밥을 먹고살았다. 우리는 육 남매이다. 2남 4년 중 넷째, 특별할 것도 없이 평범했던 어린 시절 가난했지만 마음만은 풍족했다. 성품 좋은 아버지는 늘 웃음 띤 얼굴이었고 솜씨 좋은 엄마는 부엌에서 뚝딱뚝딱 육 남매의 식사를 맛있게 만들어 주었다. 호랑이띠와 닭띠로 일곱 살 차이가 났지만 늘 사이가 좋으셨다. 새벽이면 잠결에 도란도란 두 분이서 오늘 할 일이나 농사일을 의논하는 소리가 들렸고 책임감 있게 부모로서의 역할도 잘했다. 두 분 모두 우리에게 허용적인 부모님이었고 '안된다, 하지 마라'는 말보다는 무엇이든 해보고 경험할 수 있게 해 주던 분이었다. 동네사람들과의 사이도 좋았고 남의 일은 앞장서서 도와주던 부모님을 보고 자라서인지 육 남매는 특출하지는 않았지만 잘 놀고 잘 먹고 사이가 좋았고 스스로 자신의 역할을 잘했다.


첫째 아들인 큰오빠는 집안의 기둥이었다. 시골동네에 초등학교가 없어서 한 시간가량을 걸어서 학교를 보내면서도 늘 외할아버지, 할머니의 자랑거리였고 한 시간 거리의 초등학교까지 업어서라도 보낼 만큼 각별했다. 늘 아랫목에는 볼게를 덮은 스테인리스 밥그릇이 이불속에 따뜻하게 덮여있었고 가마솥에 흰쌀밥은 아버지와 오빠의 것이었다. 중학교, 고등학교를 진학하면서 얼굴도 잘 생기고 키도 훤칠해 동네에서도 칭찬이 자자했다. 오빠는 배구를 잘해 화순군의 자랑이 되었다. 면민, 군민체육대회 때는 늘 오빠를 데리고 가야 우승한다고 할 만큼 키도 크고 날렵해서 배구네트를 가르는 오빠의 강스파이크는 그날의 경기를 뒤집은 액션이었다. 동생들의 우상이자 자랑거리이기도 했다.


둘째 딸인 언니는 집안의 살림꾼이었다. 동그란 얼굴에 늘 웃음이 가득했던 언니였다 '이놈의 가시내가'라고 말은 하지만 늘 동생들에게는 츤데레였다.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하고 엄마 바쁠 때 동생들 업어 키우고 집안 살림 도맡아 한 고마운 언니였다. 어릴 적 열이 나고부터 좀 맹한 구석이 있다고 엄마는 늘 말씀하셨다. 나의 기억 속의 언니는 항상 포대기에 동생을 업고 동그란 단발머리를 했던 모습이 남아있다. 엄마가 논으로 밭으로 일하러 다닐 대 동생들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집안청소를 도맡아 하던 살림꾼이었다. 그런 언니는 중학교도 가지 못하고 열여섯 살 때부터 화순에 있는 방직공장에 가게 되었다. 집안에 한 푼이라도 벌어서 보태려고 주, 야간을 일하고 기숙사생활을 했다. 월급을 받는 날이면 고스란히 엄마에게 드렸다. 잠을 자지 못해 노르스름한 얼굴로 집에 와서도 집안청소, 빨래 밀린 일을 깨끗이 해 주던 언니는 스무 살 꽃다운 나이에 나이차이 많이 나는 형부와 결혼했다.


셋째는 작은오빠이다. 어릴 적부터 유난히 키가 작았다. 동네의 소문난 개구쟁이로 나무도 잘 타고 추운 겨울 동네 앞 산, 뒷산을 다니며 올무를 놓았다. 산을 한 바퀴 돌고 온 작은오빠의 손에는 토끼, 꿩이 들려있었다. 대나무 베어다 살을 깎아 연 만들고 나무를 깎아 팽이도 만들고 가지고 놀 수 있는 장난감은 무엇이든 작은오빠의 손에서 뚝딱 만들어졌다. 꼴도 베고 아버지를 도와 소 먹이며 외양간 청소, 농사일을 돕던 아버지 미니미였다. 작은오빠는 나랑 가장 많이 싸우고 다투었다. 장난을 좋아하는 오빠가 슬쩍 건드리면 둘은 누군가 하나가 울 때까지 싸웠던 기억이 있다. 그런 오빠도 집안 형편상 중학교 진학을 하지 못하고 농사일 도우며 야학인 재건중학교를 졸업하고 몇 년간 시골에서 농사일을 도왔다. 16살 추석 때 내려온 서울 사는 외삼촌을 따라갔다. 재봉틀이라도 배워서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그때 배운 기술로 지금은 서울에서 재봉틀을 돌리며 작은 공장을 꾸리고 있다.


넷째는 나다. 오빠 둘 언니하나 그야말로 중간에 끼었다. 어렸을 적에는 언니오빠 그늘에서 그냥 평범하게 지냈다. 초등학교 갔다 오면 따뜻한 툇마루에 누워 낮잠도 실컷 자고 뒷곁에 모아 놓은 돌멩이로 땅따먹기, 공기놀이, 자치기놀이에 푹 빠져 살았다. 초등학교 4학년때부터 언니오빠는 서울로 광주로 나가고 집에는 두 동생들의 언니노릇을 했다. 지금도 생각나는 것은 농사일에 늦은 엄마를 대신해 가마솥에 불을 때서 밥을 해 놓았을 때 '오메 네가 밥을 다 해놨냐'라며 흐뭇해하시던 엄마의 얼굴이 선명하다. 아랫방에 누에를 키울 때 뽕나무 잎을 따다 밥을 주고 물도 길러오고 언니오빠 타지로 나간 후부터는 언니오빠의 일을 대신해 맏이 아닌 맏이 노릇을 했다.


다섯째는 여동생이다. 얼굴도 작고 눈은 동그랗게 쌍꺼풀진 예쁜 동생이다. 태어나서 울음을 울지 않아 죽은 줄 알고 이불에 싸서 윗목에 두었더니 하루 지나니 울어서 엄마가 젖 물려 키웠다고 했다. 어릴 적에는 목이 가늘가늘해서 '회기'라는 별명을 붙여서 부를 만큼 뼈대도 약하고 키도 작은 동생이다. 오목조목하게 생겨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큰오빠 공부 가르치느라 집안형편이 어려워지면서 중학교만 졸업했다. 내가 3학년 동생이 1학년 때 중간고사 시험 때문에 버스 타고 가던 차가 전복되어 걸어오던 동생이 우리 언니 죽었다며 허겁지겁 울면서 달려왔던 기억이 선명하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엄마 아버지 도와 시골집에서 농사일 돕다가 작은 오빠네집 가서 재봉틀 배워 함께 살면서 몇 년 일했다. 엄마 쓰러지셨을 때도 두말없이 시골에 와서 엄마 돌보았던 마음 고운 내 동생.


여섯째는 막내딸로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특히 아버지가 막내딸이라고 아주 예뻐하셨다. 오일장에 다녀오실 때면 막내딸 손에 쥐어줄 오다마 사탕을 들고 술에 취해 비틀거리면서도 봉지는 놓지 않으셨다. 제일 늦게 태어난 동생이라 언니오빠 타지로 나가 있을 때 셋이서 지낸 시간이 가장 많다. 그래서인지 세 자매같이 어울려 지냈고 엄마 아버지 아프고 돌아가시는 걸 어린 나이에 경험해야 했던 아픈 손가락이다. 그러나 막내는 늘 씩씩해서 힘들다 내색하지 않고 혼자서도 삶을 잘 헤여 나갔다. 백화점에서 9년 근무하고 핸드폰매장도 개설해서 열심히 살았다. 지금은 오십이 넘었지만 아직까지 나는 솔로를 고집해 가끔은 노후가 걱정이 된다. 결혼해서도 9년간 함께 살면서 미운 정 고운 정이 다 들었다.


지극히 평범했던 집에 갈등이 생긴 것은 큰오빠의 결혼으로 인해 새언니가 생기면서부터였다. 엄마는 큰며느리를 얻고 기대감이 컸고 올케언니는 결혼해서 시댁의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면서부터 엄마는 병들어갔고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동생들은 비바람을 막아주는 부모가 없이 스스로의 삶을 견뎌내야 했다. 지금도 가장 슬픈 건 나의 좋은 부모님이 며느리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야 했다는 사실이다. 그때 당시에는 서로의 입장이 다 있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른에 대한 존경은 의무로라도 해댜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래서 내 인생에 용서하지 못한 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엄마의 큰며느리이다.


엄마가 아파서 시골에 홀로 있을 때 딸로서 가까이해주지 못했지만 그때의 마음은 늘 슬픔이었다. 큰 오빠가 주말이면 집에 와서 전기밥솥에 밥을 해 놓고 청소도 해주고 갔지만 엄마는 밥 먹는 것조차 잊어버릴 만큼 점점 자신을 내려놓았고 훗날 듣게 된 이야기지만 며느리는 동각에서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배변실수를 했던 엄마의 냄새를 견디기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참 어이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아들 바라기였던 엄마를 어떻게든 감당하려 했던 큰오빠의 마음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리다. 지금은 모든 것이 지나갔고 그 시간을 어떻게 견뎠는지 모를 만큼 수많은 시간이 흘렀다. 한 가족으로 태어나 함께 했다 시간은 많지 않았지만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기억되는 많은 일들이 스쳐 지나간 일처럼 가족의 동상이몽으로 마음속에 아련함과 행복함이 공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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