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즈음 우리는

서른 살의 향기

by 맑은샘

서른, 결혼하고 벌써 오 년의 시간이 흘렀다. 다섯 살 된 아이와 두리둥실한 내 배 속에 아기가 자라고 있다. 예정일은 삼월 중순, 아파트로 이사 온 지는 한 달 남짓, 오 년간 전세로 살았던 단독주택에서 삼환아파트로 이사를 왔다. 계속 살고 싶었지만 주인집의 사정으로 부득이하게 한 겨울에 이사를 하게 되었다. 정들었던 집이고 이웃과도 정이 듬뿍 든 곳이다. 이사계획이 없었고 더군다나 만삭의 몸이기에 더욱 난감했다. 근처 부동산에 이사 갈 수 있는 집을 의뢰해 놓고 몇 군데 보고 있던 중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퇴근하는 길에 부동산에 들러보니 마침 비어있고 올수리 된 집이 있다는 것이다. 토요일에 가 보기로 했다.


오전 근무를 마친 남편과 만수부동산에서 만났다. 중개인의 안내로 엘리베이토를 타고 10층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현재의 집보다는 좁아 보였지만 전찬으로 보이는 건설기술교육원의 운동장이 앞마당처럼 펼쳐진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당장 이사 올 수 있게 집이 비어있고 망설일 수 없었다. 계약을 하고 이사 날짜를 잡았다. 그동안 알뜰살뜰 모은 적금, 예금을 다 모으니 이사 갈 수 있는 비용이 마련되었다. 사천오백만 원이었다. 엄동설한 일월말에 회사 동료분들의 도움으로 아파트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만삭의 몸으로 이삿짐을 정리하고 도와준 고마운 회사직원들에게 집들이로 감사함을 표현했다.


봄이 오고 있었다. 그날도 청소를 끝내고 아들의 손을 잡고 532번 마을버스를 탔다. 예정일도 아직 여유가 있으니 시장구경도 하고 반찬거리도 사기 위해서였다. 초봄이지만 아직은 겨울외투를 입고 있었다. 덜컹거리며 버스는 만수동을 돌아 모래내시장에 도착했다. 아들손을 잡고 내려서 걷는데 평소보다 이상한 몸의 증세가 느껴졌다. 순간 식은땀이 확 나면서 빨리 집에 가야 할 것 같았다. 영문 모를 아들의 손을 잡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시간을 재어보았다. 점점 규칙적으로 진통이 느껴졌다. 다니던 산부인과에 전화하니 아직 분만하려면 멀었으니 계속 시간을 재면서 기다리다가 한 시간 간격으로 배가 아프면 병원으로 오라고 했다.


남편회사에 전화를 하고 막내 여동생에게 전화를 했다. 트럭을 갖고 있는 친구와 함께 부랴부랴 동생이 왔다. 출산할 때 필요한 짐과 아이를 데리고 병원으로 출발했다. 남편은 회사에서 바로 퇴근해 병원으로 오기로 했다. 입원수속을 마치고 분만대기실에서 누워있는데 계속해서 진통이 밀려왔다. '아기가 곧 나올 것 같아요' 다급한 나의 말에 간호사는 의사를 불렀다. 검진을 마친 의사는 부랴부랴 출산실로 나를 먼저 옮겼다. 저녁 아홉 시 십 육 분 진통 끝에 3.2킬로그램의 건강한 둘째 아들을 낳았다.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고 손발이 있는지 확인하고 '아들입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엄마도 이렇게 우리를 낳았겠지, 딸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마음속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출산의 고통을 몰라도 되니까.


대기실에서 오들오들 떨면서 입원실을 기다렸는데 병실이 없다고 했다. 대기실에서 밤을 지내야 할 것 같았다. 남편과 상의 끝에 집으로 가기로 했다. 택시를 불러 갓난아기를 데리고 집으로 왔다. 문제는 산후조리였다. 시어머님은 연로하셔서 오실 수 없고 엄마는 아파서 거동이 불편하니 도움을 요청할 때가 없었다. 수원 사는 동생이 전화가 왔다. '언니야, 내가 갈게' 5개월 된 조카를 데리고 와서 언니 미역국 끓이고 아기 기저귀 빨래며 살림을 맡아서 해 주었다. 그렇게 일주일의 시간이 지나고 동생도 집으로 돌아가고 집안 살림과 육아를 스스로 처리해 나갔다. 마음속에 슬픔이 차 올랐다. 퇴근 후 남편도 도왔지만 아이를 기르고 엄마가 된 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었다.


하루하루 견디며 지내다 보니 같은 아파트에 사는 이웃도 사귀게 되면서 점차 두 아이의 엄마로서의 삶에 길들여지게 되었다. 큰 아이는 유아스포츠단에 다니며 수영, 태권도를 배우며 실력을 나타내며 건강하게 자랐다. 둘째도 온순한 성격으로 잘 먹고 잘 자고 키도 크고 얼굴은 갸름하고 목이 길어 동네에 데리고 나가면 신세대형 얼굴이라고 예쁨을 받았다. 1층에 같은 또래의 아기가 있어 가끔 서로의 집을 오가며 함께 놀았다. 그렇게 서른 살의 우리는 삶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아기를 낳고 엄마가 된다는 것은 기쁨이기도 하지만 내가 엄마를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라는 걸 알았다. 살아가면서 엄마로서의 삶이 기쁨도 크지만 수많은 인내와 기다림과 연단이 필요하다는 것을.... 엄마가 필요할 때 오 개월 된 아기를 데리고 와서 언니 산후뒷바라지를 하러 고민도 없이 와 주었던 내 동생, 돌이켜보면 엄마의 도움 없이 아기를 낳고 나와 같은 마음과 상황을 겪었을 동생이지만 늘 의젓하게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의 선택을 해 낸 자랑스러운 동생이다. 난 그때 내 삶에 길들여지느라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서른 즈음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사람을 살아내는 중이었다. 이 글을 통해 고맙다는 인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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