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육십이라니
예순, 난 여전히 서른두 살에 시작한 일을 계속하고 있다. 아침밥 차려주고 출근하기, 퇴근 후 옷도 벗지 못한 채 저녁준비를 할 때가 많다. 올해 12월 5일은 작은 녀석까지 독립을 하고 빈방을 청소하고 정리했다. 든든하게 존재했던 그림자가 없으니 더 허전한 마음이 든다. 이걸 바로 '빈 둥지 증후군'이라고 하나... 둘째는 나의 분신이라고 생각하며 길렀다. 녀석을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업주부에서 워킹맘으로 일을 시작했기 때문에 늘 미안한 마음이 많았다.
전업주부에서 새로 시작한 일은 속셈학원의 선생님이었다. '주부도 됨, 아이와 함께 출근가능' 내가 바라고 원하던 조건이었다. '아이를 데리고 다닐 수 있는 직장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하나님'이라고 기도를 하던 참이었는데... 벼룩시장의 공고를 보고 전화로 입사문의를 했다. 아파트 근처의 상가였고 5분 거리였다. 면접을 보았다. 50대 정도의 빨간 스웨터를 입은 안경 낀 원장님과 면접을 보고 4월부터 근무하기로 했다.
8시에 출근해서 등원하는 아이들 맞이하고 계단청소하고 점심때 먹을 아이들 쌀을 씻어 50인분 밥솥에 넣어 두고 취사버튼을 눌렀다. 오후 1시부터는 초등학생들 방과 후 수업과 하원지도를 하며 6시에 퇴근하는 조건이었고 3살 된 둘째를 데리고 출근하기로 했다. 새벽 6시 남편 밥을 차려주고 출근준비 해주고 부지런히 아이들 깨워 씻기고 밥 먹이고 아이를 데리고 출근했다.
엄마에서 천사반선생님으로 역할을 바꾸고 등원차량 타기, 계단청소하기, 네 살 반 아이들 한글공부, 수학, 그림 그리기, 종이접기, 화장실 지도하기 하루의 바쁜 일과가 정신없이 지나간다. 익숙하지 않은 일이라 힘들지만 꾸준히 하루하루를 채워갔다.' 이번 달만 하고 그만두어야지' 마음속으로 수없이 되뇌었지만 아이들이 잘 따르고 지나면서 아이를 대하는 기술도 늘어갔고 무엇보다 내가 참 좋아하는 일이란 걸 깨달았다.
순하고 착해서 말썽 부리지 않고 늘 엄마 옆에서 잘 자라준 두 아들 덕분에 하루도 결근하지 않고 일할 수 있었다. 특히 큰 녀석은 네 살 터울인 동생에게 지극정성을 다해 보살펴주었다. 엄마가 퇴근할 때까지 형아로서의 몫을 든든히 해 주었다. 여섯 시 퇴근인 엄마를 대신해 네시 반쯤 동생을 데리고 집으로 가서 놀아주고 지켜주는 것은 큰 녀석이 선택한 일이었다. 아파트 단지 앞의 상가에 있는 학원에서 근무하던 엄마를 두고 작은 녀석을 데리고 오 분거리의 집까지 걸어가는 형제의 뒷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동네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한참 놀고 있을 시간 우리 애들은 엄마 퇴근하기만을 기다렸다. 퇴근 후 저녁준비를 하고 가족이 함께 밥을 먹고 두 아들과 나는 건설기술교육원의 넓은 잔디밭에 축구공을 들고나갔다. 낮에 놀아주지 못한 아쉬움을 조금이라도 달래기 위한 방법이었다. 아이들과 넓은 운동장을 뛰고 달리며 공놀이를 하고 땀에 젖어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면 하루일과가 끝난다. 틈틈이 세탁기 돌리고 반찬 만들고 아이들 숙제 봐주고 주말이면 박물관이나 등산을 통해 아이들과 함께 할 시간을 마련했고 동네 친구들이 놀러 오면 수제비 부침개, 떡볶이를 만들어 집 앞에서 종일 놀면서 돈독한 우정을 나누었다.
특히 202동 904호 언니는 아이들이 아프거나 행사로 늦는 날은 조건 없이 우리 아이들까지 저녁을 먹여주고 함께 놀아주는 고마운 사람이었다. 간식을 먹을 때도 늘 함께 챙겨주고 우리 아이들의 유치원행사까지 참석해 주어 함께 기뻐해주었다. 당시 크레도스 차를 갖고 있었던 언니네 차를 타고 여덟 식구가 강원도까지 놀러 가기도 했다. 대관령 고개를 넘을 때는 아슬아슬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한 바구니에 만원씩 하던 오징어회는 처음 먹어보았지만 그 맛은 지금도 생각나는 음식 중의 하나다.
그렇게 시작된 나의 일은 현재진행형이다. 더 버거웠던 시간도, 더 바빴던 시간도 있었다. 일한다는 핑계로 아이들의 학교 방문을 하지 못했고 행사참석도 많이 하지 못했다. 그래도 늘 자신의 자리에서 자 자라준 두 아들에게 늘 고마운 마음이 크다. 큰 녀석 군대 갈 때도 일하느라 함께 하지 못했고 작은 녀석 군대 갈 때도 아빠만 따라갔다. 돌아보면 소중한 시간을 많이 놓치고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난 늘 일터에서도 집에서도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다. 허투루 시간을 보낸 적이 없고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려왔던 것 같다.
그렇게 살아온 시간 동안 아이들은 자랐고 큰 아들이 결혼 후 분가하면서 좀 더 여유로운 시간이 되었다. 한동안 허전한 마음을 둘 곳이 없어 마음의 방황을 하기도 했다. 아이들이 있을 때는 바빴지만 맛있게 먹어주고 늘 집안의 활기가 돌았는데 큰 녀석이 나가고 작은 아들은 공부한다고 서울에 있는 고시원에 살고 있으니 두 부부가 남아 활기 없는 시간이 지속되었다. 그때 내 마음을 달래준 것이 글쓰기였다. 나의 어린 시절부터 살아온 시간을 글로 남기면서 울기도 했고 빙그레 웃기도 했다.
예순, 물이 흐르듯 시간은 쏜살같이 달려갔고 빈 둥지만 남았다. 시간은 멈출 수 없고 계속해서 흐르고 있다. 파란 하늘에 흰 구름이 바람을 타고 흘러가듯이 우리의 세월도 그렇게 흘러갔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시간에 따라 기르고 사회인으로 만드는 과정 속에 엄마도 점점 아이가 자라는 만큼 자랐다. 나도 엄마가 처음이라 변해가는 과정 속에서 엄마노릇을 해 나가는 것이 정답인지 알 수 없었고 단, 최선을 다하고 열심해 해낼 뿐이었다.
만약 다시 태어나서 살아간다면 맨땅에 헤딩하듯 그렇게 열심히 살지는 않을지도 모르겠다. 낯선 도시에 와서 가정을 꾸리고 삶의 터전을 구축해 나간다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던 시간이었다. 그렇지만 그때그때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해내고 어린 시절 학교를 향해 걸었던 것처럼 꾸준히 지치지 않고 해 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제 깨닫고 있는 중이다. 예순의 오늘 난 나에게 질문을 한다. 요즘 어때? 잘 살고 있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