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을 간접경험하다

중학교 시절의 기억

by 맑은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집 앞이었던 학교가 이젠 한 시간가량이 걸어서 통학해야 했다. 면 소재지에 있는 중학교는 남녀 공학으로 면 전체의 학생들이 모이기에 단층이었던 초등학교 보다 3층건물에 운동장도 넓었다. 잘 가꿔진 교정에 구령대가 있고 태극기와 새마을깃발이 높이 매달려 휘날리고 있다.


우리 동네에서는 여자아이들만 다섯 명이서 입학을 했다. 아침이면 도시락 싸고 이른 아침 먹이느라 바빠진 엄마의 손길이 분주했다. 전기밥솥도 없던 시절 가마솥에 밥하고 김칫국 끓여서 아침상 차려주고 네모난 도시락에 밥 싸고 김치, 멸치볶음이면 만족했다.


약속도 없이 동네 앞 점빵에서 7시면 모여 비포장도로인 신작로를 따라 먼지가 폴폴 날리는 길을 삼십 분쯤 걸어가면 저수지가 나오고 본격적인 산길이다. 작은 오솔길 따라 산길을 부지런히 걸어 학교를 향해 간다. 오직 목적지가 보이는 곳까지 걸어가면 드디어 학교 운동장에 걸린 태극기가 펄럭이는 모습이 보인다. 여덟 시 정도가 되었다. 걸어오는 길에 기진맥진이지만 수업종이 울리면 다시 공부에 열중한다.


일 학년을 지나고 나니 학교 가는 길도 여러 갈래길을 이용하게 되었고 산 정상에서 잠시 엄마가 싸준 도시락을 삼분의 일만 나눠먹고 가는 여유가 생겼다. 노란색 네모난 양은 도시락에 하얀 쌀밥을 정성껏 눌러 싸준 도시락을 꺼내고 반찬도 적당히 덜어서 먹고 다시 힘을 내서 학교를 간다.


그날 아침도 어느 때와 다르지 않은 초여름이었다. 산길로 접어든 우리는 잠시 도시락을 먹기 위해 자리를 찾았다. 그런데 우리 뒤를 따라오던 배낭을 멘 아저씨가 힐긋힐긋 쳐다보며 산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아저씨를 힐긋거리며 수상하다고 생각했다. 도시락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서로 속닥거리며 잰걸음으로 학교를 향했다. '혹시 간첩 아니야?'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산속으로 들어간 아저씨는 한참을 기다려도 나오지 않았다. 우린 학교로 한걸음에 뛰다시피 하고 도착해 교무실로 가서 선생님께 수상한 아저씨가 있다고 말씀드리고 옷차림새를 말해주었다. 콩닥콩닥 뛰는 가슴이 진정이 되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도암경찰서에 신고를 하고 사이렌을 울리며 경찰들의 산속 수색이 시작되었다. 그 후 간첩이 잡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우린 졸업할 때 그 공로를 인정받아 경찰서장상을 수상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는 일이다 생각할 수 있으나 그때 당시는 반공교육과 간첩에 대한 교육과 신고가 철저하던 시절이라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한동안 우린 학교 가는 길 산속을 지날 때면 다시 그 간첩으로 생각되었던 아저씨가 나타날까 두리번거리며 주의를 주시하는 버릇이 생겼다.


삼 학년이 지나면 광주에 있는 고등학교를 진학하라고 한참 공부에 매진했다. 시험기간이면 동네 아이들끼리도 서로 전과를 빌려가며 공부를 했다. 어느 정도의 점수가 되어야 광주에 있는 고등학교 입학원서를 쓸 수 있기에 최선을 다했다. 공부하다 졸음이 오면 마당에 나와 잠시 하늘을 쳐다보고 아랫집 순자네 불이 켜져 있으면 다시 들어가 교과서를 펼쳐 공부를 했다.


오월 어느 날 중간고사 시험을 앞두고 여전히 새벽 일찍 학교를 갔다. 여섯 시 삼십 분 첫 차를 타고 조용한 교실에서 공부를 하고 하루를 시작했다. 그날도 어느 날과 다름없이 학교 수업을 하고 있었다. '딩동댕, 긴급방송입니다. 각 반의 선생님들은 학생들을 데리고 신속히 대피하시기 바랍니다. 비상상황입니다' 교실마다 울려대는 사이렌 소리에 놀란 학생들이 서로 밀치고 학교를 빠져나와 정신없이 산을 기어올랐다. 산속에 납작 엎드려 숨죽여 기다릴 수밖에....


한 시간가량이 흐른 후 비상상황이니 하교 후 바로 집으로 가라는 선생님의 당부를 들으며 우리는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그때 당시는 원인을 알 수 없었으나 무장한 군인들이 총칼을 들고 다니며 학생들도 무조건 쏴 죽인다는 소문이 들렸다. 영문도 모른 채 저수지를 지나 집으로 가는 신작로를 가쁜 숨을 몰아쉬며 집으로 향했다. 한참을 걸어가는데 동네 첫 집의 아저씨가 하얀 도포를 입고 걸어서 오고 계신다. '어디 가세요?"라며 인사를 하니 광주에 있는 아들네 집에 간다는 것이다. 광주에서 큰일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그 어른은 그날 걸어서 광주에 있는 아들네 집에 가서 생사를 확인하고 며칠 있다 집으로 돌아오셨다.


우린 한동안 집으로 와서 밖에 나가지 못했고 영문도 모른 채 학생이라서 군인이 오면 무조건 숨으라는 사실만 전달받았다. 그때 당시 5.18 광주항쟁이 일어난 것인데 두 시간 거리에 있는 시골학교까지 공포감이 밀려왔고 정확한 소식은 알 수 없으나 광주터미널 지하에 시체가 쌓여있네, 임산부도 칼로 찔렀다네 라는 소문만 무성했다. 며칠 학교는 오전수업만 마치고 집으로 왔고 평소처럼 행동하지 못하고 집과 학교 동네에서만 있어야 했다.


그렇게 우리들의 중학교 시절은 걸어가는 길에서 이루어졌다. 학교 가는 길 친구와 함께 걷고 이야기 나누며 도란도란 걸어서 학교를 갔고 수업이 끝나고 집에 오는 길은 조금 더 여유롭게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변화와 함께 산에서 나오는 열매, 꽃, 높은 하늘의 구름, 시원한 바람을 느꼈다. 그렇게 삼 년의 중학교 생활동안 많은 일이 있었지만 함께 하는 친구가 있어 행복했던 기억이 많은 시간으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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