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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쿰척 Jul 22. 2021

#5.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인생 최악의 날.

오늘도 박 팀장은 관종이다. 자리에서 가만히 있는 법이 없다. 괜히 일어나 앉았다가 사무실을 한 번 훑고 다시 앉고. 경주마처럼 앞 만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 눈이 괜히 옆으로 찢어져 있어서 다 보이는 건가. 사시 검사를 해야 할까...


박 팀장은 나의 팀장님으로 내가 퇴사를 하루에도 몇 번씩 고민하는 이유이다. 


그와의 악연은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시행된 날에 정점을 찍었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 사용자나 근로자가 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우위를 이용해 다른 근로자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는 행위 등을 금지하는 법으로, 2019년 7월 16일부터 시행됐다. (네이버 지식백과)


2019년 여름에, 한창 괴롭힘 방지가 이슈가 되었다. 우리 회사도 역시 사회적 흐름에 따라 괴롭힘 금지에 관한 교육과 강연을 진행하였다. 그때, 이제는 좀 세상이 달라지나? 나도 편하게 회사 다닐 수 있나? 기대를 하였다. 괜한 기대였다.


그날 오전에 실 전체에서 교육을 들었다. 노무사님이 실까지 방문하셔서 괴롭힘 금지법이란 무엇이며, 언행에 조심하셔야 한다고 몇 번을 강조하였다.


오후 업무가 시작되었다. 박 과장님이 메신저를 보냈다

> 서현이 이제 해 뜰 날인가? 사람들이 제발 각성하고 아무 말 안 하고 일만 했으면 좋겠다~

>> 그러게요ㅠ 제발~ 

'제발'에 맞는 이모티콘을 찾는 데, 또 메신저가 울렸다. 뭔가 어색했다. 박 팀장이었다. 박 팀장이 메신저를 보내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무조건 말로 갈구는 스타일이었는데. 뭘까?


> 서현 씨, 오늘 오후에 회의 있나?

>> 아니요, 없습니다. 

> 그럼 나랑 잠깐 회의실에서 얘기 좀 하지.


불길했다. 딱히 할 얘기도 없고, 무슨 근거인 지는 모르겠는데 일 얘기가 아닐 것 같았다. 난 촉이 좋은 편인데.


회의실에 갔더니 박 팀장이 빈 손으로 앉아있었다. 일 얘기는 아닌 게 분명하다. 보자마자 머리를 굴렸다. 최근에 무엇을 잘못한 거지? 뭐 딱히 없는 것 같은데.


> 앉으세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난 점점 더 끔찍해져 갔다.

>> 네. 


> 다름이 아니라, 다음 주부터 괴롭힘 방지법? 그거 시행되잖아. 그래서 그전에 한 마디 좀 하려고.


난 아무 생각이 없었다.

>> 아 네네~

> 서현 씨, 왜 그렇게 밥을 깨작깨작 먹어? 내 앞에서 그렇게 먹으면 난 밥맛이 떨어지더라고. 실장님 앞에서 는 그렇게 안 먹을 거 아니야?

>> 네. 

> 그렇게 계속 먹을 거면 점심을 동기들이랑 먹는 게 어때?

뭔가 묘하게 기분이 나빴지만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 그리고 서현 씨 왜 이렇게 얘기를 많이 해? 회사에서 옆자리랑 그렇게 할 얘기가 많나? 나 소리에 예민한 거 알지? 내가 서현 씨 때문에 일에 집중을 못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야. 

아 그리고 그 머그컵! 그거 서현 씨가 마실 때마다 그 머그컵에서 소리 엄청나는 거 알지? 나 진짜 피곤했는데 참다 참다가 지금 얘기하는 거야. 그래서 내가 하대리랑 자리 바꾸게 할까 생각도 했어. 


박 팀장이랑 가장 가까운 자리는 나, 그다음이 하대리이다. 


> 마지막으로 내가 듣기로는 서현 씨가 아직 나이도 어리고 하니까 다른 실에도 학생 이미지더라고, 그건 어때?

갑자기 훅 들어왔다.

>> 전 오히려 좋은데요? 사람들에게 모르는 거 물어볼 때 좀 더 편하고, 다들 친절하게 대해 주시고

그 짧은 순간에 지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래 그렇다면 뭐. 알았어. 암튼 참고해~ 이제 괴롭힘 방지법 시행되니까 말 못 할 것 같아서 말하는 거야.

괴롭힘 방지법이 아니라 "금지법"이다. 아까 교육 때 시행 이전에 괴롭힘 당한 거는 소급 적용되냐고 물어볼 걸 그랬다.


회의실에서 나와서 갑자기 뭔가 억울했다. 무슨 감정인 지는 모르겠고, 기분이 나쁘기도 한데 또 왜 기분이 나쁜 지는 모르겠다. 오후 내내 이게 뭘까? 자리를 바꿔야 하나? 컵을 바꿔야 하나? 밥을 따로 먹어야 하나? 온갖 신경이 다 쓰였지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었다. 뭔가 기분이 더럽고 치욕스러웠다. 하지만 뭔가 누구한테 말하기도 그렇고 일단 오늘은 퇴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집에 혼자 누워있다 보니, 점점 기분이 안 좋아졌다. 그 말 하나하나를 곱씹어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의 결론을 내렸다. 아 박 팀장은 내가 만만하구나? 갑자기 엄마가 보고 싶어 졌다.


> 엄마~~ 뭐해요?

>> 나 그냥 에어컨 쐬면서 TV 보고 있지. 우리 딸 밥은 먹었어?

> 아니

>> 목소리가 왜 그래? 회사에서 무슨 일 있었어?

> 아니 엄마. 박 팀장이 오늘 나한테 이상한 말을 했어...

말을 하는 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성인이 되어서 이렇게 꺼이꺼이 운 건 처음이었다.

>> 서현아. 내일 당장 회사 가서 부서 바꿔달라고 해. 그 사람 진짜 미친놈 아니니? 너 잘못한 거 하나 없어. 엄마 지금 갈게. 너무 울지 말고 있어.

> 아냐.. 괜.. 찮.. 아...

말을 끝까지 이을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이 계속 흘렀다. 너무 오랜만에 흘려보는 눈물이라 그런지 숨이 계속 가빠졌다.


한 40분쯤 지났을까? 엄마가 도착했다. 엄마가 차를 몰고 빠른 속도로 온 것 같았다. 엄마는 말없이 날 안아줬다. 

>> 그 사람 누구니? 엄마가 내일 회사에 찾아갈까? 진짜 미친놈 아니야? 몇 살이나 처먹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너 그렇게 행실을 제대로 못하고 다닌 거 아니잖아! 너 내일 당장 부서 바꿔달라고 해. 내일 휴가 쓸래? 

> 아냐. 괜찮아...

엄마의 반응을 보니, 내가 정말 당해서는 안될 치욕스러운 걸 겪었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내가 잘못한 게 아니고, 쟤가 이상한 거야.

엄마한테는 괜찮다고 집에 보내고, 혼자 남겨졌다. 내일은 금요일이었다. 출근하는 날이라는 뜻이다. 정말 출근하기 싫지만, 내 입장을 분명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금요일 아침이었다. 퉁퉁 부은 얼굴로 출근을 했다. 나도 모르게 목소리도 작아지고, 말도 없어지고, 그냥 만사가 짜증 났다. 박 과장님한테 SOS를 했다.


> 과장님, 혹시 바쁘세요?

>> 아니 괜찮아~ 왜?

> 지금 잠깐 화장실 가실래요?

>> 그래!


화장실에서 과장님을 딱 마주하니까 또 눈물이 났다. 과장님은 누가 또 볼까 봐 날 사람들이 거의 오지 않는 회의실로 이끌었다. 


> 과장님, 사실은... 


난 어느새 울고 있었고, 과장님의 눈가도 촉촉했다. 

>>서현아. 너 잘못한 거 없어. 너 나이 때 이렇게 일도 잘하는 사람 없다. 그리고 내가 진짜 친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주변에서 다 너 칭찬만 해.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없어. 난 네가 밥을 그렇게 먹는지도 몰랐네. 밥 먹을 때 누가 남의 밥상을 쳐다봐? 그리고 소리? 그거 박 팀장이 더 내잖아! 자기 난 맨날 자리에서 혼잣말하면서. 아무튼 서현아. 너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 그 사람이 이상한 거야.

근데, 그래도 그 사람이 너의 상사인 건 알지? 그냥 무시해. 무시하는 게 이기는 거야. 


난 또 눈물이 났다. 무시가 안 될 것 같았다. 


그날 난 하대리님한테 박 팀장님이 우리 자리 바꾸라고 했다고 말하며 자리를 바꿨고, 그 주 내내 점심 약속을 잡았다. 머그컵은 바꾸지 않았다. 마지막 자존심인가. 그리고 박 팀장님이랑은 일 적인 것을 제외하고는 말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다크 해진 내 모습에 눈치를 보기 시작했고, 다들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 90년대생이 객기 부리나? 생각하며 뒤에서 내 욕을 했을 것이 분명하다. 


월요일 아침. 새로운 자리로 출근을 했다. 훨씬 좋았다. 물론 기분이 좋다는 것은 아니었다. 저기압 상태인 데, 갑자기 박 팀장이 내 자리로 왔다. 

> 서현 씨 잠깐 얘기 좀 하지?


최악이었다. 또 무슨 말을 하려고

한편으로는 다행이었다. 설마 내일 괴롭힘 금지법이 시행되는데 오늘날 갈구는 건 아니겠지?


> 서현 씨, 지금 행동 뭐야? 난 지금 서현 씨가 나랑 싸우자고 하는 거로 밖에 안 보이는데?

당황했지만, 할 말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밑져야 본전. 난 아직 젊고 이직할 기회가 있다. 자신감을 가지자 서현아.


>> 무슨 소리세요? 전 박 팀장님이 원하시는 대로 다 맞춰드린 건데요? 제가 소리를 많이 낸다고 하셔서 하대리님이랑 자리도 바꿔드리고, 점심 먹는 거 보기 싫다고 하셔서 점심도 따로 먹고. 또 뭐 해드려야 하는 게 있나요?


그 당당하던 박 팀장이 당황한 게 보였다.

> 서현 씨 마음이 상했구나? 나 서현 씨 기분 나쁠 거 알고 말한 거야.

우주 최강 미친놈이다.

> 근데 지금 태도는 싸우자고 하는 거로밖에 안 보여. 화난 건 이해하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아?

>> 저는 그 누구보다 성숙하게 행동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기분이 매우 상했고, 부당한 대접을 받았지만, 회사원이기 때문에 일에는 지장을 주지 않았습니다. 휴가도 안 쓰고 출근하면서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하였고, 박 팀장님이 불편하다고 하시는 것들 다 고쳤습니다. 

그리고 박 팀장님이 저를 따로 부르셔서 왜 그러냐고 물어보시니까 하는 말씀인데, 저한테 한 행동 잘못하신 겁니다. 그건 명백한 잘못이고, 이로 인해 저는 상처를 받았습니다. 마음의 상처가 깊고 크지만, 언제 괜찮아질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전 성숙한 자세로 일에는 지장을 주지 않고 제 맡은 바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팀장님이 잘못하신 거에 대해서는 말씀하신 대로 괴롭힘 금지법 시행 전이니까, 따로 문제 삼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겪은 마음의 상처로 인해 제가 팀장님께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면 그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희가 일도 같이 해야 하고, 전 팀장님을 좋은 선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상처가 더 큰 것 같습니다. 회복은 제가 알아서 하겠지만, 잘못은 분명히 팀장님께 있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팀장님이 저를 따로 불러서 얘기하자고 하셔서 제가 말씀드리는 건데, 지금 제가 한 말로 문제를 삼으시진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전 팀장님이 얘기하자고 부르지 않으시면 말하지 않고 혼자 해결할 생각이었으니까, 이 대화는 저희 둘만 아는 걸로 하면 좋겠습니다.


갑자기 아웃사이더가 됐다. 내가 이렇게 말을 잘하는 사람이었던가?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고비는 있었지만,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박 팀장의 당황한 표정은 1km 거리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 제가 지금 기다리는 전화가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K.O. 완승이었다. 기분이 더러운데 이 통쾌함 뭐지? 


성숙한 성인이 된 기분이다. 기부니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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