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까지 가자"의 실사판
우리 회사는 유난히 월급 인상률이 낮다. 그래서 대리를 달고 몸값을 높여 이직을 하는 사람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나도 대리만 달면 이직을 해야 하나 하는 생각에 매년 토익도 보고, 자격증 공부도 끄적였다. 하지만, 인사체계상 대리는 적어도 6~7년 차(여자 기준)에 달 수 있었고, 이런 취업난에 내가 경력직으로 취직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자신 있게 YES라고 말할 용기도 없었다.
나의 소중한 근로소득 250. 물론 월세 내고 생활비 하면 적금도 사치라고 느껴질 때가 있지만, 부모님께 손 안 벌리고 사는 당당한 29살이라는 자부심 하나로 하루하루 살고 있다. 인생에 한 번은 돈이 한 번에 들어오는 날이 있다는 데, 나도 예외는 아니겠지. 괜한 기대를 걸어본다.
옆 실에 나랑 동갑이면서 입사년차도 비슷한 권유리 씨가 있다. 유리 씨랑 친분이 있지는 않지만, 복도나 화장실에서 만났을 때 반갑게 웃음을 주고받는 사이 기는 했다. 입사년차가 비슷하면 왠지 모르는 동질감이라는 게 있다. 같은 월급에 같은 직급이다 보니 말하지 않아도 상황을 뻔히 알 수 있게 되었고, 미래의 경쟁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과 동시에 그래도 뒤처지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응원도 하게 된다. 유리 씨는 나에게 그런 존재였다. 그녀가 날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우연히 화장실에서 유리 씨를 만났다. 눈인사만 하였는데, 뭔가 유리 씨의 얼굴에서 광태가 느껴졌다. 기분 좋은 일이 있나? 마음속으로 여러 가지 유형의 질문들을 생각했지만 이를 다 닦을 때까지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오늘은 금요일 이제 퇴근까지 1시간 30분 남았다. 이렇게 설렐 수가. 이제 무엇을 하면서 시간을 때워볼까 고민하고 있는데 메신저가 울렸다. 동기 박진영이었다.
> 야야 그거 들었어?
>> 뭐?
> 권유리 알지? 그 우리보다 4개월 늦게 들어온 사람
>> 알지. 내 옆 실이잖아. 왜왜? 결혼이라도 함?
> 아니. 그것보다 더 충격적. 야 미친. 그 사람 코인으로 대박 났대. 서울에 집 한 채 샀다는데? 20평대.
>> 어? 구라 아니야? 진짜로? 누구한테 들었는데?
> 그 재무실에 김대리님. 김대리님이랑 권유리랑 친하잖아. 근데 요즘 권유리 그 사람이 명품을 휘감고 다닌다는 거야. 근데 솔직히 우리 월급으로 명품은 좀 힘들지 않냐? 가끔도 아니고 매일 다른 종류의 명품을 입고 다니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
아무튼 그래서 그 김대리님이 은근슬쩍 술자리에서 물어봤나 봐. 근데 비밀이라고 하면서 자기 비트코인에 5천 넣고 돈 생길 때마다 계속 샀대. 최근에 돈 다 빼고 집 샀다고 말하더래. 미쳤지 않냐? 야 걔 너랑 동갑 아니야? 미쳤지
>> 헐.. 미쳤다. 곧 퇴사하겠네
> 아니 그래서 대박이 서울에 집 그럼 오피스텔? 이렇게 물어봤는데 아파트라고 했대.. 장난? 적어도 10억은 번거 아님?
>> 그게 가능해?
퇴근 직전에 너무 충격적인 소리를 들었다. 요즘 유리 씨 얼굴이 좋아 보이긴 했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사실 유리 씨는 응원보다는 무서운 경쟁자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녀는 재무실에서 예쁨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윗사람들한테 맞춰서 사바사바를 잘하고, 일도 어느 정도 잘한다고 들었다. 윗사람들이 예뻐하니까 더 당당해져서 법인카드로 남자 친구랑 데이트할 때 쓰고 당당히 회의록을 작성한다고 하였다. 회사 돈으로 선물 같은 것을 살 때는 본인 것도 하나씩 몰래 사고 경비 처리하기도 한다고 하였다. 팀장님 실장님들도 이러한 유리 씨의 행각을 다 알고 있었지만, 그녀가 그들의 비위를 잘 맞추고 부르면 가장 먼저 오는 사람이기 때문에 모른 척 눈 감는 것 같다고 하였다.
이런 유리 씨였다. 어린 나이에 저런 건 어디서 배웠을 까 항상 궁금했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돈이 궁한가 생각도 하였다. 회삿돈으로 모든 걸 다 해결하는 것 같아서.
이런 사람이 서울에 집을 샀다고? 갑자기 화가 났다. 근로소득 250은 똑같을 텐데. 나는 월세에 사는데 쟤는 서울에 집? 거리감이 느껴졌다. 이제는 남 같았다. 부러웠다. 배가 아팠다. 옆자리 하대리님이 로또 5만 원만 당첨돼도 배가 아픈데, 서울 집 한 채는 배가 아픈 거로는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부러웠다. 아니다 뭔가 괘씸했다. 같은 조건인데 난 갖지 못한 걸 쟤는 가졌네?라는 생각이 온 머릿속을 차지했다.
코인으로 대박 나는 사람들은 인터넷에만 존재하는 줄 알았다. 인터넷에 그렇게 나오는 건 그만큼 소수니까 미디어에 노출되는 것이고 그 외 모든 사람들은 다 돈을 잃는다고 생각했다. 근데 나랑 매일 마주치는 그 사람이 인터넷에만 보던 그런 사람이라니. 충격적이다.
근무의욕이 사라졌다. 근로소득은 벌어서 뭐하나. 인생은 한방인데.
이제는 내가 그 사람보다 못한 게 뭔가 생각했다. 왜 나는 코인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을까.
후회가 된다. 부자가 되고 싶다. 메타버스를 공부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