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에서 저녁 만남은 위험한 거 아시잖아요
입사 초기부터 유난히 우리 동기들을 챙겨준 선배가 있다.
이지훈 : 89년생, 남, 미혼, 경력직
우리보다 1년가량 빨리 입사하신 지훈 선배님은 경력직으로 뽑히셔서 동기가 없으셨다. 그래서 입사 초반에 동기모임을 할 때, 종종 같이 모여서 밥도 먹을 만큼 친하게 지냈다. 지훈 선배는 다른 회사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으셨는데, 그래서 그런지 사명감이 남달랐다. 맨날 우리가 힘들다고 퇴사하고 싶다고 하면, 선배는 우리 회사같이 복지, 급여, 업무 다방면에서 괜찮은 곳이 없다고 퇴사는 절대 안 된다고 만류하였다. 우리는 다른 회사 경력이 있는 선배의 말을 믿고 그 누구도 퇴사하지 않고 열심히 다녔다.
어느 날, 아무런 예고도 없이, 지훈 선배가 퇴사를 했다.
너무 충격적이었다. 동기들 중 그 누가 퇴사를 해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지훈 선배만큼은 우리들 중 회사를 가장 오래 다닐 사람이었다. 당장 지훈 선배한테 연락을 해보려고 했지만, 메신저는 이미 오프라인.
후회했다. 왜 난 그가 퇴사를 결심하기까지 아무런 징조도 발견하지 못했던 걸까.
지난주에 우연히 식당에서 마주쳤을 때까지만 해도, 조만간 밥 먹자고 안부를 전했다.
"밥 먹자"라는 그저 인사치레에 불가했던 것인가. 그날 날짜를 잡아야 했다. 내가 게을렀다. 선배는 항상 그 자리에 있을 줄 알고.
동기 단톡방이 난리가 났다. 그 누구도 몰랐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던 퇴사였다.
> 어떻게 우리들 중 아무도 모를 수가 있어? 아 지훈이 형 얼마나 힘들었으면 퇴사를 한 거야?
>> 그니까 말이야. 지금 카톡 해봤는데 답 없네. 나중에 진정되면 연락 주겠지. 기다려보자
충격의 일주일이 지났다. 일주일 내내 지훈 선배의 퇴사 얘기가 사내 가십 1순위 었지만, 일주일을 넘지는 못했다. 지훈 선배는 일주일 동안 답장이 없었다.
동기 박진영이 메신저를 보냈다.
> 야. 나 어제 지훈 선배 만났어.
>> 헐? 혼자?
> ㅇㅇ 아니 형이 좀 난감해하는 것 같아서. 나중에 다 같이 보자고 말은 했어.
>> 잘했네. 그래서 퇴사는 왜 했대?
심각했다. 생각도 못했던 전계였다.
지훈 선배 내 부서는 총 3명으로 다른 부서보다 좀 작은 규모였다.
실장, 팀장, 지훈 선배 이렇게 세명이었다. 지훈 선배는 입사 초반부터 싹싹하고 주변 사람들한테 잘한다고 소문이 자자했다고 들었다. 내가 입사했을 때도 사람들이 지훈 선배를 그렇게 소개했으니까.
지훈 선배는 문제가 없었다. 그 윗사람들이 문제지.
발단은 이러했다. 지훈 선배는 회사에 대한 애사심으로 일찍이 집을 회사 근처로 옮겼다. 회식이 있을 때마다 배웅을 해주고 마지막으로 집에 들어가는 것도 지훈 선배였다.
여기까진 내가 알고 있던 사실. 지훈 선배는 이런 것도 불평불만이 없었다.
내가 모르고 있던 것들은,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것들이다.
지훈 선배네 팀은 유난히 회식이 잦았고, 개인적으로 모이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그때마다 지훈 선배는 또 집까지 배웅하고, 가장 늦게 집에 들어갔다. 새벽까지 회식이 계속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실장, 팀장은 점점 더 지훈 선배를 편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아마 이때 회사 동료가 아닌 동네 동생쯤으로 생각한 것 같다.
팀장은 개인적으로 저녁을 따로 먹고 밤늦게 지훈 선배에게 술 취해서 전화를 했다. 전화해서 자기는 서울에 사니 내일 출근해야 하는 데 집에 들어가기 너무 피곤하다고 지훈선배네서 자고 가겠다고 통보한 것이다. 거기다가 자기가 지금 있는 위치를 가르쳐주지도 않고, 자기를 데리러 오라며 진상짓을 했다.
지훈 선배는 당황했지만, 우선 직장 직속 선배이고 그래도 친하게 지냈던 분이기에 사정이 있겠거니 생각하며 힘들게 찾아서 잠자리까지 제공해주었다.
하지만, 한 번이 아니었다. 이게 시작이었다. 그 이후 팀장은 약속이 있을 때마다 지훈 선배를 찾았고, 지훈 선배가 고향집을 갔을 때는 비밀번호를 알려달라고 협박하며, 주인 없는 집에서 투숙을 했다. 지훈 선배는 반복되는 팀장의 행동에 진지하게 면담을 요청했다. 팀장도 부끄러워 미안하다고 사과를 할 줄 알았는데,
> 야~ 넌 남자 세끼가 말이야 의리도 없이, 야 됐어! 나도 이제 너 안 불러 됐다!
라고 말하며 오히려 지훈 선배가 쫌생이라며 비난했다고 한다.
그 이후에 더 이상의 밤늦은 연락은 없었다. 하지만, 의리를 저버린 대신 군기잡기가 시작되었다.
팀장은 처세술에 강해서 실장을 쥐락펴락 하고 있었다. 팀장이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훈 선배의 면담 요청 이후 지훈 선배 빼고 실장님 팀장님 둘만의 회식이 잦아졌고, 팀장은 자기의 일을 다 지훈 선배에게 넘겼다.
지훈 선배는 야근이 잦아졌고, 실장은 지훈 선배가 바쁜 걸 알면서도 방관했다. 더 소름 돋는 건 팀장의 언행이었다. 팀장은 지훈 선배가 있든 없든 지훈 선배의 험담을 했다.
> 얘는 완전 요즘애들이어서 그런지 아주 의리도 없고, 애가 회식도 안 하고 좀 그래~ 너네 팀 애가 부럽다. 우리같이 좁은 조직에서 어떻게 살아남으려나 몰라.
지훈 선배는 그렇게 일도 못하고 미움받는 사람으로 낙인이 찍혔고, 그래서 회사 사람들과의 만남을 자제했다. 다. 지훈 선배가 인사팀, 복지팀 등에 상담을 요청했지만, 상담을 요청했다는 소문을 듣고 발 넓은 팀장이 지훈 선배를 더 갈궜다.
> 네가 지금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아?
지훈 선배는 그렇게 퇴사를 했다. 지훈 선배는 박진영한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 나한테 내일은 없어. 진짜 계속 회사 다니다가는 내가 팀장 죽일까 봐, 퇴사하는 거야.
지훈 선배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생각하니 울컥했다. 하지만, 지훈 선배의 대범함에 놀랐다. 지훈 선배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해 나름의 선물을 남기고 갔다.
지훈 선배는 팀장이 이상하다고 느낀 시점부터 모든 일을 다 녹음했고, 이를 이사진께 메일로 뿌렸다. 이로 인해 징계위원회가 열렸다. 지훈 선배는 팀장 같은 사람은 잘려야 한다고 이런 일을 꾸몄다고 한다.
팀장은 타 부서로 발령을 받았다. 이게 징계였다. 팀장은 계속 회사를 다닌다.
얼마나 잘못해야 잘리는 거지?
한숨만 나온다.